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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알미니안, 웨슬리안, 개혁주의

알미니안이 등장했을 때 도르트 신조의 작성자들의 입장은 이런 거였습니다. 로마서의 논리도 같은 방식이라고 저는 믿는데요.

1. 하나님은 다 부르셨습니다(일반적 부르심). 
2. 그런데 아무도 응답하는 이가 없습니다(전적 타락). 
3. 하나님 입장에서는 다 쓸어버리고 새로 만드셔도 무방합니다. 
4.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중에 몇몇을 부르셨습니다(효과적인 부르심). 
5. 그리고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반드시 구원에 이르도록 그들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6. 그러므로 선택이 있으면 유기는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7. 유기가 하나님편에서의 버림처럼 이해되지만 언약에 대해 신실하지 않았던 쪽은 사람입니다. 
8. 언약에서 계속 배도가 나타나자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개입케 하셨습니다. 
9. 목적은 죄를 깨닫는 것이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며 종국에는 창조 질서의 반영입니다. 
10. 그런데 유대인들은 복음의 약속이 아닌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다가 넘어졌습니다. 
11. 이 일의 작정이 창세전에 이루어졌습니다. 
12. 알미니우스는 시간 곧 창조와 섭리를 작정과 혼동을 했습니다. 
13. 창조와 섭리는 작정의 반영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작정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14.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은 하나님의 불공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앞선 설명(1-6)처럼 사랑과 긍휼을 드러냅니다. 
15. 보통 이 일이 창세전에 정해졌다고 하면 죄와 타락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16. 아마도 알미니안이나 웨슬리의 염려도 이런 게 아닐까 합니다. 
17. 이런 작정을 허용적 작정이라고 합니다. 
18.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자신은 가까운 원인이며 하나님은 먼 원인이십니다. 
19. 작정은 이처럼 섭리 내에서 시행되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세 가지 방식으로 시행됩니다. 
20, 첫째, 자유롭게 둘째, 우연하게 셋째, 필연적으로 이뤄집니다. 
21. 이 작정의 시행에서 하나님은 제1원인이시며 피조물은 제2원인입니다. 
22. 이 두 원인은 동시 발생(divine concurrence)합니다. 
23. 다시 선악과로 돌아가서 아담의 타락은 두 원인이 동시 발생적입니다. 
24. 그러나 앞서 18번에서 설명한 대로 아담의 선택은 가까운 원인이며 하나님의 허용은 먼 원인이므로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며 이 죄의 책임은 아담 자신에게 있습니다. 
25. 피조물은 그대로 자유로우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있으며 아퀴나스가 자연신학으로 내재주의 신학을 펼친 이래로 하나님의 자유에 결정적 하자를 일으키게 됨으로 후기 스콜라에서 현대 개신교 신학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의지를 중심한 신학이 핵심에 있습니다. 
26. 후기 스콜라 신학은 극단적인 주의주의로 경도되기도 했는데,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주권에 손상과 구원을 인간의 공로로 돌리는 신학을 만듭니다. 흔히 알려진 반-펠라기즘입니다. 
27. 종교개혁 신학에서 작정, 절대주권, 노예의지(전적 타락), 구원의 단독성은 공통 분모입니다. 
28. 바빙크가 최고선으로부터 그의 신학을 시작하는 것은 이런 의지중심의 신학적 체계를 보여줍니다. 
29. 아마도 웨슬리는 충분히 이런 체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사랑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인정할만 합니다. 
30. 그가 말하는 선행적 은총은 반펠라기즘의 주입된 의 개념이 아니라 회심 전에 은혜, 그러니까 개혁신학이 흔히 말하는 "준비하는 은혜" 혹은 앞서 1번의 내용에 해당합니다. 
31. 같은 선행적 은총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맥락과 쓰임이 다르며 정의도 다른 셈입니다. 
32. 웨슬리는 현상에 더 초점을 둔 것 같고 개혁파는 본질에 더 초점을 둔 것 같습니다. 
33. 예컨대, 히브리서 6:4-6의 상태를 개혁파는 신자가 아닌 걸로 보지만 웨슬리는 선행적인 은총의 상태로 있다가 타락한 것으로 봅니다. 
34. 두 설명이 다 틀린 건 아닙니다. 보는 지평이 다를 뿐이죠 
35. 다만 웨슬리안 스스로 자신들을 알미니안의 후예라 자처하는 것은 좀 아쉬운 일입니다. 
36. 웨슬리는 휘트필드의 요청으로 사역에 동참하는데 휘트필드는 전형적인 개혁파 목사입니다. 
37. 이는 두 사람의 신학적 노선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38. 웨슬리 역시 회심한 신자는 타락할 수 없다고 본다는 점에서 알미니안과는 분명한 차별점이 존재합니다. 이런 이해는 성도의 견인 교리와 설명이 다르며 서 있는 지평이 다를 뿐입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반드시 성도를 주권적으로 인내로 이끄신다에 방점이 있으며 웨슬리가 회심한 신자의 타락을 말하는 것은 이런 상태에 대한 다른 설명입니다.
39. 웨슬리의 '만인속죄론(universal salvation)'은 불신자의 자동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고, 죽으셨고, 속죄하셨다는 뜻이며, 그 주님이 "어디서나 누구든지 다 회개하라고 명하셨음"을 의미합니다. 
40. 일종의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교훈적 의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41. 제가 믿기로는 웨슬리는 복음 안에서 형제라고 생각합니다. 
42. 그의 이런 신학은 목사로서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돌아오던 길에 모라비아 형제들을 만나고 올더게이트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해 서문을 읽고 회심하는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43. 오랜 신앙 생활과 목사임에도 자신이 회심치 못한 상태임을 깨닫게 된 사건이 그의 신앙 여정의 계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44.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르트 신조가 말하는 TULIP의 다섯 가지 교리는 가장 성경적인 이해이자 해석이라고 봅니다. 
45. 저는 오히려 웨슬리안이 알미니즘과 거리를 두고 개혁신학의 품에 안겨야 한다고 믿습니다.

*논쟁은 사양합니다. 
*제 사견일 뿐이며 제 의견이 모든 개혁파를 대변하지도 않습니다.
*웨슬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는지는 저도 확언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복음 안에서의 대화를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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