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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묻는 게 힘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8년 간 항우에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들의 운명은 해하전투에서 갈렸지만 8년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유방의 리더십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항우는 항상 "어떠냐(何如)?"라고 참모들에게 동의만을 구했으나 유방은 항상 "어떻게 할까(如何)?"라고 의견을 물었다. 항우의 하여는 우리말의 용례에도 남아 있다. "하여간에"라고 쓰이는데 동의를 하든 말든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페북에 글을 적어보면 꼭 안 듣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이해하고는 글쓴이의 담벼락에 와서 자기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한다. 그 때 물어야 할 것은 먼저 상대의 생각이 자신이 이해한 바로는 이런 데 이게 맞느냐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생각은 이런 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게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의견을 형식적으로 묻는다고 해서 다 좋은 리더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느 조직이든지 망하는 조직은 점점 의견 개진이 없어지는데 이유는 자신이 낸 의견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물음은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물어야 하고 그 전에 제대로 듣는 것이 선행해야 한다.

집단 상담이나 대화 모임을 인도해보면 어느 그룹이나 동일한 현상이 하나 있다. 상대가 말을 할 때, 가로채거나 말이 끝난 뒤에 그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묻기 보다 이어서 자기 말을 하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 내 소그룹 모임에서도 반복된다. 한국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카페도 전국에 넘쳐난다. 그런 수다 모임 후, 헤어지고 나서 혼자 가는 길에 헛헛해진 가슴을 경험해봤을 것이다. 왜 그럴까? 말하는 사람은 있어도 듣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말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앞서 이야기한 것의 연속이다. 말 자르기나 끝난 후에는 자기 말을 이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이 두 태도의 내면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고 있었던 태도가 깔려 있다. 그래서 말 중에 자르는 것이고 말이 끝난 후에 자기 말만 하는 것이다.

진시황이 세상을 떠나고 초나라 귀족 집안의 항우는 자라면서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했을 것이다. 잘 배운 엘리트 교육 덕분에 8년을 내리 한번도 지지 않은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그에 비해 유방은 패천 출신의 백수건달이었다. 누가 백수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지도 않고 그 낮은 지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리더로서 우뚝서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이 사소한 성장배경에서 습득된 습관 하나가 그들의 운명을 갈라 놓았다.

그래서 나는 간혹, 가르치는 방식 중에 yes, but이라는 방법을 활용한다. 먼저 상대의 생각에 대해서 80 정도 동의하면서 자기 생각을 20 정도 개진하는 방식이다. 탁구를 잘 치려면 상대가 넘긴 공을 상대의 테이블 위에 넘겨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대화들을 보면 상대가 무슨 공을 넘기든지 나는 내 공을 치는 방식의 대화를 한다. 대화란 일종의 랠리다. 한 공으로 주고 받는 것이다. 보통 부부 싸움을 할 때, 상대의 넘긴 공을 무시하고 내 공을 올려 테이블 위에 수십 개의 공을 올려 놓는 경우가 있다. 이러면 부부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하게 되고 정서적 별거 상태로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이 좋지 않은 부부가 서로 별거와 이혼의 수순을 밟는 대화법을 대부분 쓴다. 지나치게 자기애적이며 무례하고 타인을 존중할 줄 몰라서 그런다. 동아시아적인 온정의 가치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요즘은 그런 것도 기대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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