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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성찬과 복음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사도전승』에 남아 있는 성찬예전(아나포라)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
시작 기도(Preface)
제정사(Institution Narrative)
기억의 기도(Anamnesis)
성령 임재의 기도(Epiclesis)
영광송(Dox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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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ppolytus, 이형우 역, 『사도전승 교부문헌총서 6』 (왜관: 분도출판사, 1992),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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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칼뱅의 제네나 성찬 예전(Anaphora)을 보면 이렇습니다.

구제를 위한 헌금(봉헌)
중보기도
주기도문 해설
성물준비(사도신경을 노래함)
제정의 말씀
권면
성찬 기도(성령의 임재를 위한)_Epiclesis
성체분할(분병례)
분병분잔
성찬참여(시편 혹은 성경말씀 봉독)
성찬 후 기도
아론의 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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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배, 주승중 공저, 교회를 섬기는 청지기의 길 I,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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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은 그 저작연대를 3세기 초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전승>의 원본은 사라졌지만 라틴어 역본, 꼽트어 역본, 사히디꼬 방언 역본, 보하이리꼬 역본, 아랍어 역본, 에티오피아 역본의 인용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롬의 불가타역 이전에 이 문서가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사상이나 신학을 논리적으로 기술한 책이 아니라 교회 안의 제도와 생활 등을 수집해 정리한 것으로 초대교회 시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여기 기록된 성찬 예전인 아나포라는 2세기 이전까지로 소급할 수 있는 교회의 통상적인 예전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칼뱅은 이 시기의 신학을 복원하는데 주력한 것으로 보이며 성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칼뱅의 제네바 예전에서는 수르숨 코르다(sursum corda)는 등장하지 않고 성령 임재 기도(epiclesis)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 시기의 성찬 논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속성 교류에 대한 것이며 이는 칼케돈 이전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직접적 교류가 배제된 간접 교류에 관한 논쟁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직접 교류는 칼케돈에서 이미 정죄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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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루터파나 개혁파나 모두 위엄의 영역에서 나타난 속성 교류가 성찬에 나타나는 방식에 대한 논쟁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뱅의 성찬 교리인 영적 임재를 영적 상승이라고 하지 않고 영적 임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파의 통상적 예배의 부름(votum)에서 마음을 드 높이는 수르숨 코르다를 언급하면서 성찬에서는 수르숨 코르다를 언급하지 않고 에피클레시스(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만 둔 이유이기도 합니다.

즉 성찬에서 떡과 피 가운데 성자께서 어떤 식으로 임재하시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죠. 그리스도의 승천 후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장소적으로 있다고 믿는 개혁파는 위엄의 임재와 성령의 연합을 통해서 거기에 성령을 통한 상승을 믿는 것입니다. 즉, 속성 교류의 위엄의 영역으로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성찬에 임해 있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승천한 몸을 장소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비유적으로 이해한 루터는 위엄의 임재의 방식을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떡의 실체를 변화시키지 않고 거기 있다는 방식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루터파가 개혁파를 향해서 조롱처럼 이야기 하는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extra Calvinisticum)은 성육신하신 후에도 인간 본성과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루었으나 육체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교리를 일컫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밖에”(etiam extra carnem) 계신다는 것을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성찬에서 계신 그리스도가 육체 밖에 계신 그리스도임을 주장하는 개혁파적인 위엄의 임재를 루터파가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루터파는 개혁파의 육체 없이 위엄만 성찬에 임재해 있다는 해석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저 칼빈주의적인 이외”(illud extra Calvinisticum)라는 용어를 만들어 조롱 섞인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불링거가 말하는 육체적 먹음과 영적 먹음의 상징적 평행주의는 바로 이런 지점을 보여줍니다. 즉, 칼뱅주의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하늘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위엄으로서 완전하게 성찬 가운데 성령으로 임재해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칼뱅의 제네바 성찬 예전에 수르숨 코르다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죠. 칼뱅 성찬의 핵심은 "상승"에 있지 않고 "임재"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란 영혼의 입을 벌려 육체의 떡을 먹을 때, 성령께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한다는 교의인 것이죠.

그러므로 성찬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을 드높여서 하늘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지금 우리가 받은 이 표징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것으로 받을 때, 성령께서 우리를 그 실체에 연합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루터는 성찬에서 우리가 받는 이 떡과 포도주에 임재해 계신 그리스도의 위엄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완전한 성육신이라고 본 것이죠. 그래서 이를 신비로 규정해서 설명하면서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방식으로-점유하게 된다면 칼케돈 이전의 알렉산드리아의 직접 속성 교류로 가게 됨으로 이런 이해는 완전한 오해임- 떡의 실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거기에 위엄으로서 임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진 루터와 그 후예들의 눈에는 칼뱅의 하늘에 남아 있는 몸의 교리가 우습게 보였고 그것을 조롱하는 의미로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이라는 조어를 만든 것이죠. 이런 지점을 생각하면 칼뱅의 성찬 교리를 하늘로의 상승으로 이해하는 것은 미스이자 에러입니다.

물론 그런 국면이 칼뱅 신학에서 없지는 않지만 사도의 전통을 계승하려던 칼뱅이 초대교회의 아나포라에서 수르숨 코르다를 빼고 에피클레시스만 담아서 성찬 예전을 설명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약이 복음을 설명하는 표준 형식문처럼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이 성찬 자체에 담겨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은 그 자체가 보이는 말씀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표징인 떡에 육체를 넘어 계시는 제2위격이신 성자께서 위엄으로 임재해 계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낮아지심으로서 영적 임재를 말하는 것이 칼뱅 성찬론의 1차적인 본의입니다. 그 표징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하늘의 몸에 연합시킵니다. 그래서 수르숨 코르다는 없고 에피클레시스는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낮아지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 그와 함께 승귀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번에 상승에 이르는 것은 복음이 아니며 우리의 몫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일이십니다. 예배의 votum으로서 우리 마음을 드높이는 것역시 목사의 선언이지 신자의 고백이 아닙니다. 칼뱅의 성찬 교리를 "영적 상승"이라고 하지 않고 "영적 임재"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방점은 우리의 상승이 아니라 성찬 자체에 육체 밖에 계신 성자가 위엄으로 방식으로 임재해 계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