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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자존심, 자존감, 그리고 칭의(2)

이 세 가지의 주제는 모두 한 가지 사실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당화된다면 어떤 방식인가 하는 문제를 담고 있다. 칭의는 우리 의의 근거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가 순종을 통해서 얻으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가 내 정당성의 근거라는 것이다. 이는 구조적으로 보면 앞선 글에서 자존심이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인정"에 둔다는 점에서 사실 칭의와 닮아 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자존심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타인의 인정이라면 칭의는 내 행위의 정당성을 나 자신의 행위에서 찾지 않고 "그리스도의 행위"에서 찾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당연히 "의롭게 된다"는 것은 단지 "난 잘 못이 없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를 "죄가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옳은 행위가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어서 미국에서 존 맥아더 목사로 말미암아 촉발되었던 주재권 논쟁이 생긴다. 미국의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단지 구주로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대해서 맥아더 목사는 구주뿐만 아니라 "주님"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주재권 논쟁의 핵심이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면 당연히 거기에는 "순종"의 문제가 따라 붙게 되고 단지 "구주"이시라면 나를 건져내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순종과는 전혀 무관하게 구원이 이뤄진다. 특히 이 부분 때문에 맥아더 목사는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다. 이것은 마치 우리 구원이 내 개인의 순종의 행위와 그 공로에 기초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나이브한 시선은 종교개혁 신학이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순종"이란 우리 자신의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는 행위가 우리 죄를 대신하는 형벌적인 대속을 성취하는 순종이라면 그가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그의 평생에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심으로 아담이 실패했던 율법의 요구에 대한 순종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를 이루신 이 순종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대속이다. 십자가의 대속은 죄의 책임을 형벌로 대신하는 순종이라면 전 생애에 걸친 율법의 요구에 대한 순종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의에 요구에 대한 순종이다. 아담과 모든 피조물은 "죄 없음"을 요구받을 뿐만 아니라 "의로움"을 요구받는다. 이 모든 의로운 행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자존심이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자기 옳음에서 찾고 그것을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구조라면 칭의는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나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에서 찾고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구조를 하고 있다. 이 때, 그리스도의 행위를 내 정당성의 근거로 가져올 수 있는 기제는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하는 기제며 그래서 마치 그리스도의 행위를 나의 행위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기제다. 물론 이 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주입되는 것은 아니다. 주입의 교리는 순종이 내가 해야 하는 공로의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전가"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전가를 위해서 믿음이 "주입"된다고 가르쳤다. 이 주입된 믿음은 일종의 습관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행위에 애착되는 심리적 습관을 일컫는다. 이 습관이 아이가 엄마를 애착하는 습관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이 습관은 자연 상태에서 습득 가능한 습관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습관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삼위하나님과의 교제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초대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타인의 인정을 자기 행위를 통해서 얻으려는 자존심의 방식은 칭의와 구조면에서는 같지만 자신이 행위를 하고 그 정당성을 온전한 타자로부터 얻으려고 하다보니 자기로부터의 소외를 불러온다. 앞선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이 때 타인은 밖에 있는 실제로서 타인이 아니라 자기가 내면에 만든 이상으로서의 타인이기 때문에 그 요구에 부응할 수가 없고 그 앞에서 초라하고 비참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은 우리가 율법을 대면해서 경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바울도 로마서에서 우리 양심이 율법처럼 기능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자존심은 비참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 센척 아닌척 잘난척을 하고 자기를 속이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바리새인의 방식을 닮아 있다는 점이다. 자존심은 이처럼 형식적 문제로부터 자기 소외를 불러온다.

 

거기에 비해 자존감은 동일시가 잘 이뤄진 심상을 의미하고 애착과 신뢰가 잘 발달해서 자기 내면과 동질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자존심과는 차이가 있다. 훨씬 사회적으로도 잘 기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유방암 환자들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불어넣는 것과 같아서 실제로 이런 긍정심리학이 유방암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유방암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실제로 더 오랜 기간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자기를 긍정하는 자존감은 근본적으로 자존심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 비참과 고통에 대해서 제대로 된 반응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기동일성이 높아서 높은 자존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이런 식으로 긍정으로 기울어진 방식은 실제 우리가 겪는 삶의 고통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칭의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동력은 바로 우리 비참에 대한 지식이다. 이 지식을 우리는 율법을 순종하려는 과정을 통해서 얻는다. 율법이 드러내 준 내 비참을 대면하고 직면하고 그리스께 긍휼을 구함으로 자신이 비참한 형편, 곧 "죄인되었을 때" 사랑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폭넓게 이해하고 용납하며 수용하는 것이 칭의를 받은 자의 태도다. 여기에는 자기가 참혹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인정과 그것이 수용받았다는 감격이 혼재한다. 그런데 자존감은 바로 이런 우리 리얼리티에 대한 이해가 낮다. 자기 구원을 위해서 상승의 힘이 작용하고 자기를 괜찮은 존재로 인식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런 태도는 회개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를 결여한다. 최근 심리학계에서도 이런 성찰이 있어서 부정적 정서를 단지 긍정적 정서로 덮는 방식으로 자존감의 고양하는 방식을 지양한다. 진정한 의미의 자존감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깊은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죄인인 자기 존재와의 동일시 그리고 그 비참에 대한 애통이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동일시로 이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덮으므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기정당성을 얻는다. 그것이 바로 칭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