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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교회사에서 살펴 본 신앙생활과 구원론에 대한 각 교파별 입장 :<구원의 확신>

교회사에서 살펴 본 신앙생활과 구원론에 대한 각 교파별 입장 :<구원의 확신>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9,10) 
오늘은 10월 31일입니다. 벌써 10월도 다 가고 추운 겨울이 서서히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또한 종교개혁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486년 전 오늘,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독일의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을 내걸었습니다. 당시의 부패한 가톨릭 교회에 대해 “나는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니 한번 토론해 봅시다” 하면서 95개 조항을 내걸었는데,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서 유럽 전역에서 종교개혁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운동의 결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 즉 개신교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0월 31일은 개신교의 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종교개혁 기념강좌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우리는 올바른 진리는 무엇인가? 올바른 신앙이란 무엇인가? 올바른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금년에는 그 첫 번째로 ‘구원론’에 초점을 맞추어서 진행하게 되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째 시간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몇 년 전에 “당신은 구원의 확신 있습니까?”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도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면서 ‘구원의 확신’을 위한 설교나 수련회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구원의 확신을 얻었는지 구체적인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몇 학년 때 수련회에 참석해서 성령을 체험하고 불을 받았다든지, 또는 부흥회에 참석해서 눈물 흘리고 회개했다는 식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회심의 시간과 장소를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 해 왔습니다. 주일학교를 거쳐 나중에 교회에서 교사로 봉사하고, 또 집사로 봉사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특별한 체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젊어서 방탕한 길에 빠졌다가 돌아온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데 비해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잘 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일까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에 대해 오늘 저녁에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 ‘확신’이란 무엇일까요? 확신(確信)이란 확실히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확실히 믿는다”고 말할 때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로, 정말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내가 확실히 믿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사실에 기초한 확신입니다. 참된 확신입니다. 둘째는 사실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내가 잘못 확신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사실에 기초한 거짓 확신입니다. 
그래서 확신이란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믿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객관적 사실이 확실함을 말할 때에는 ‘확실성(certainty)’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가 확실히 믿는 것을 ‘확신(assurance)’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실성’과 ‘확신’이라는 용어를 필요에 따라 둘 다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아주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제가 네덜란드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1990년 여름에 독일에 가서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강의 후 쉬는 시간에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이야기하는데, 가톨릭 교회에 다니는 남자분이 한 분 오셔서 강의를 듣고는 자꾸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떤 목사님이 그 사람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당신,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 있습니까?” 그러자 그 분은 “글쎄요. 지금 목사님(그 때 저는 강도사였음) 강의를 듣고 보니 지금 생각으로는 천국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고 일어나면 또 모르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웃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을 자기의 선행(善行)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가톨릭에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할 때는 천국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쁜 짓 좀 하고 나면 금방 지옥에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가톨릭입니다. 
이러한 가톨릭의 가르침에 의하면 도대체 ‘얼마나(how much)' 착한 일을 많이 해야 구원받을지가 늘 궁금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얼마나’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 즉, 구원의 ‘컷트라인’이 몇 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컷트라인이 몇 점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가르쳐 주지도 않고 또 가르쳐 줄 수도 없습니다. 대입시를 앞두고 있는 학생들은 자기가 지원하는 대학의 컷트라인이 얼마쯤 될까? 무척 궁금할 것입니다. 물론 최대한 공부를 잘해서 점수를 넉넉하게 따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각 과목마다 다 만점을 받으면 물론 좋지요.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만점 받는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합격의 컷트라인을 알면, 간신히 그 컷트라인을 넘길 만큼만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머지 시간에는 게임도 하고 인터넷도 하고 적당히 놀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X대학 Y학과에 진학하려면 수능 점수 350점이 필요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대략 360점 정도 될 만큼만 공부해 놓고서 남는 시간에는 놀고 싶은 것이 대부분의 학생들의 마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에는 항상 두 부류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적당하게 피상적인 종교생활에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한번씩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석하고, 신부가 넣어주는 성체를 받아먹고, 가끔 한번씩 고해성사하고, 그 다음에는 자유롭게 술과 담배를 하고 적당히 나쁜 짓을 하면서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런 피상적인 종교생활에는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고 늘 불안합니다. 자꾸만 연옥의 불길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런 평범한 신앙생활로는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서 결심하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엄격한 생활을 합니다.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며 절제하는 생활을 합니다. 늘 자신의 육체를 죽이고 엄격한 수도원적 규율을 따라 열심히 종교생활을 합니다. 이들은 자기의 행위로 구원받으려 노력합니다. 자기의 경건한 행동, 종교적인 생활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물론 이런 경건한 생활은 귀하고 우리가 칭찬해야 합니다만, 이들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참된 자유가 없고, 늘 불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나는 충분히 행하였는가?” “내가 또 무엇을 더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늘 사로잡혀 있습니다.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수도승에게도 늘 이런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불안과 긴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의 표정은 늘 어둡습니다. 그들의 찬송은 늘 애조를 띠고 구슬픕니다. 
종교개혁은 바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갈구에서 탄생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처음에는 선행에서 구원의 확신을 찾았으나 실패했습니다. 수도원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엄격한 규칙을 따라 살았지만 끊임없이 죄의식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마귀가 와서 “마르틴. 너는 죄인이야. 너 또 죄 지었지?”라면서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부에게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저는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루터가 또 찾아왔습니다. “저는 또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잠시 후에 또 왔습니다. “또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이처럼 루터가 자꾸 찾아오자 그 신부가 화가 나서 “이제 제발 그만 찾아오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루터는 성경을 읽다가 크게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가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곧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읽다가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의(義)는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로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로구나. 따라서 의는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루터는 용감하게 일어서서 복음의 진리를 외쳤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을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인 1521년에 보름스(Worms)로 소환되어 갈 때 주위의 친구들이 말렸습니다. “당신이 이번에 거기에 가면 당신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가지 마시오.” 그러나 루터는 “저 지붕 위의 기왓장들만큼 마귀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용감하게 갔습니다. 그의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니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이렇게 믿고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이 확실성이 루터의 신앙의 특징이었으며 우리 개신교의 특징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믿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선물이요 은혜임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죄와 허물이 많지만, 값없이 구원을 얻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와서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은 차차 시들어 갔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발전했지만 신앙과 확실성은 시들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 ‘신앙고백’만 ‘믿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살아 있는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 그러한 신앙을 교리화 해놓은 ‘신앙고백’ 즉 ‘신조’만 믿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7세기의 ‘정통주의’는 차차 ‘합리주의’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종교는 한낱 이성(理性)의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성경은 그저 교리 증명 구절들을 모아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전능성을 증명하는 구절들, 하나님의 전지성을 증명하는 구절들, 하나님의 편재성을 증명하는 구절들 등을 뽑아내는 원천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18세기에 ‘경건주의’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체험’을 중요시했습니다. 이들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된 신앙은 체험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체험은 자기 스스로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구원에 이르는 일련의 체험들을 제시했습니다. 먼저 자신의 비참함을 느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죄를 깊이 깨닫고 슬퍼해야 하며, 율법의 정죄에 빠져 죽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복음에 의한 해방을 체험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경건주의자들은 ‘믿음’과 ‘확신’을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수년간의 탄식과 한숨으로 얼룩진 기간이며, 기도와 바람으로 보내는 세월입니다. 이에 반해 ‘확신’은 수년간의 체험 후에 갑자기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계시를 통해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고, 성경을 읽다가 어떤 구절을 통해 갑자기 깨달음이 올 수도 있고, 영혼에 밝은 빛이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기쁨으로 충만케 하실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 체험하는 특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건주의자들에 의하면 이 세상은 어둡고 비관적이었습니다. 고난과 슬픔에 찬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이 세상은 ‘광야’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소위 ‘교회 안의 교회’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경건주의자들의 한 부류로 모라비아 형제단의 진젠도르프(Zinzendorf) 백작이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의 헤른후트(Herrnhut)에서 모라비아 출신의 형제단 공동체를 인도했습니다. 그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의해, 시내산의 천둥이 아니라 골고다의 사랑스런 음성에 의해, 모세의 엄격한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근한 모습에 의해 영혼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는 경건주의자들의 소위 ‘영적 갈등(Busskampf)’이나 ‘갑작스런 체험(Durchbruch)’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 경건주의자들을 그는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탄식하며 불평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찬송하며 기뻐하는 기독교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랑의 구주’를 설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는 죄의식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그는 갑작스런 충격을 통해 거짓 평안에서 벗어나게 하며, 확신에 도달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믿음에 앞서 깊은 죄의식이 선행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열정적인 설교와 죽음과 지옥에 대한 무서운 묘사와 영혼을 감동시키는 설교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그리스도의 은혜와 구원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지옥을 향하던 영혼이 갑자기 천국을 향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의식할 수 있는 체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날짜와 시와 분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웨슬리가 회심한 것은 1783년 5월 24일 저녁 9시 15분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확신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위 두 운동은 기독교 역사상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은 잠자는 영혼을 깨웠으며, 전도와 선교에 불을 붙였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주일 학교와 여러 단체들을 설립했으며, 성경과 소책자를 배포하고 구제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등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운동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고 말았습니다. 균형을 잃고 말았습니다. 
첫째로 이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등한시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회개와 전도, 구주 예수님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전도가 거의 유일한 사명인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학문이나 예술, 문화와 정치, 사회와 가정이 등한시되었습니다. 즉, 문화활동이 등한시되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이들은 ‘감정’과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너무 감정적이 되고 감상주의(sentimentality)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모이면 울고 눈물 흘리고 하는 병적인 감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지나친 긴장과 비이성적인 열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 지성(知性)이 억압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정의의 균형이 깨어지고 지나치게 감정 쪽으로 치우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 세상에 대한 성도들의 주권, 이런 것들이 결핍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한 감사와 세상 직업에 성실히 종사하는 것 등이 결핍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에게는 신앙의 삶과 일상적인 삶이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정이나 체험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대부분은 체험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지창조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우리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출애굽을 체험할 수 없으며, 예수님의 성육신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도 체험할 수 없고 부활도 체험할 수 없으며 승천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 여기” 있는 것뿐입니다. 감정은 믿음 후에 뒤따르는 것이며, 믿음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을 얻는 올바른 방법은 ‘믿음’에 의한 방법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 즉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즉, ‘고백’과 ‘믿음’에 의해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방법은 ‘믿음’에 의한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 곧 양자 삼는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보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나요? 아닙니다. ‘아저씨’, ‘오빠’ 또는 ‘언니’라고 불러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녀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철학자들은 ‘신’, ‘절대자’, ‘제일원인’, ‘존재의 근본바탕’이라고는 불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만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닦고 수양을 닦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계명을 지키고 수년 동안 자지 않고 앉아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을 영접하면 곧 그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베드로도 이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1절에서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감사와 찬양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행합니다.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늘 불안합니다. 연옥의 불이 늘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선행을 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선행을 행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감사의 열매’이며 ‘믿음의 열매’입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특징은 ‘감사’와 ‘기쁨’입니다. 
여러분, 자고 일어나면 뭔가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습니까?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없나? 오늘 혹시 내가 하나님께 매를 맞지 않을까? 사고가 나지 않을까? 사업이 실패하지 않을까? 이런 막연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일 때가 없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확증하셨느니라’의 원어는 ‘확증하시느니라’로서 현재입니다. 즉,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내 컨디션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 몸이 찌푸덩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다든지, 내 기분이 좋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나의 상태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한번 세워진 십자가는 뽑혔다, 세워졌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세워진 그 십자가는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컨디션과는 관계없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시고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3-34절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8-39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주눅이 들거나 공연히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자기 아들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신 사랑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당하여도, 어떠한 환난을 당하여도 실망치 않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에 선한 일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기쁨으로 선한 일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찬송하면서 일하고, 또 일하면서 찬송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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