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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회개의 필요성

회개의 필요성 
A. W. 핑크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롬 3:20)이기 때문에 그 율법을 주시해 봄으로써 이 회개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사도 바울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롬 7:7)라고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강조하지도 않고 진술하지도 않은 곳에는 죄에 대하여 참되고 깊고 구원이 되는 지식이 있을 수 없다. 죄가 심히 죄 된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법의 빛을 우리의 양심과 마음에 비춰주실 때에만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면에 있어서 현저하게 불법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가 드러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법이 비웃음을 당하는 곳에서나, 수많은 설교자들이 이 은혜의 시대에는 율법이 필요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인간의 법을 존중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뿌렸던 것을 거두게 하신다. 즉 그들은 나쁜 짓을 함으로 해서 그 몇 배나 되는 화를 입게 된다. 과격론이나 무정부론은 십계명을 경멸하고 거절함으로 인해 회피할 수 없는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실천적 경건은 하나님의 법에 마음과 생활이 일치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진지하게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율법과 복음을 모두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을 때뿐이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는 한편에서의 일치와 또 한편에서의 순응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제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다음의 말씀 안에 요약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참조, 마 22:37). 여기에 나타나 있는 세 가지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첫째로, 의무로써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둘째로, 이러한 것에 대한 근거나 이유로는 그분이 우리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셋째로, 이 의무의 한계나 정도는 온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에 요구되는 것과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이다. 만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면 또한 그것이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어진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들의 공상에 따라 상상하게 된 그릇된 하나님의 형상밖에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을 참되게 앎으로 인하여(요 17:3; 요일 5:20) 우리는 그의 온전하심에 대한 정확한 이론적 관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즉, 그분만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마음으로부터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이 참으로 실재하는 곳에는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갖게 될(시 37:4) 것이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결심을 하게 되고 그것을 바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본래부터 자연적으로 자아를 찬미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참된 사랑은 먼저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로 향하게 하며 그분의 권익을 추구하게 한다. 
회개에 있어서 죄악은 뉘우쳐져야 할 일이며 또한 율법을 범하는 일이다(요일 3:4). 그런데 율법이 요구하는 크고 제일 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과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그 마음의 불만과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항은(롬 8:7) 우리의 지극히 큰 악이며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허물을 참으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 마음속에는 회개해야 할 것이 전혀 없을 것이다. 주로 우리를 책망하시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전에는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참으로 깨달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최고의 사랑과 온전한 순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초월성이며 그의 영광스러운 본성의 무한한 완전하심이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다고 우리를 주로 책망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처럼 지극히 사랑이 풍성하신 대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악 중에서도 죄악이다. 
죄란 무엇인가? 나는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부인한다. 나는 나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어떠한 계명을 부여하든지 어떻게 훈계하든지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그를 승인하는 것보다도 방종을 더 좋아한다. 나는 그가 나를 위하여 나에게 행했던 모든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그의 축복과 선물도 나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 되겠다’라고 죄는 말하고 있다. 죄는 천국의 권위에 대항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와는 참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생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나 우리가 그분께 마땅히 행해야 할 것에 대해서 참으로 무관심하다. 자연인은 죄의 사악함이 우리에게 지극히 해가 되고 있는 그 죄악의 존재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피조물은 절대로 의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만한 독립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죄악 중의 죄악이다. 무한히 영광스러우시며 영광과 사랑과 순종을 받으시기에 지극히 합당하신 하나님을 경멸한다는 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기보다 배반자들을 기쁘게 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극악한 배덕 행위이다. 독자들이여, 만일 당신이 죄의 사악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며 그의 뛰어난 사랑을 분별하지 못한 자이다. 즉, 당신은 죄의 어둡게 하는 세력 하에 눌려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영혼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지금 진술되고 있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는 “죄의 유혹”(히 3:13)이 당신이 처하고 있는 그 곤란한 상황에 대하여 눈을 감아 버리게 했을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당신은 지금 잘못을 기꺼이 깨닫고자 하는가? 참으로 당신은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이 점을 꼭 알아두라. 어떠한 죄인도 그가 회개하지 않는 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죄의 사악함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한 사람이 참으로 회개하였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죄인이 그가 대항하여 죄를 범했던 지극히 크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알게 되기까지는 결코 죄의 사악함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은 참으로 다른 이유들 때문에 죄를 유감스럽게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즉 당신이 사람들 앞에서 수치거리가 된다든지 당신의 명예가 훼손된다든지, 또는 당신의 신체나 현세의 일에 하나님의 징벌이 내려진다든지 하는 이유 때문에 죄를 유감스럽게 여겨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죄가 스스로 무한히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께 대항한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면 당신의 회개는 참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용서치 아니하신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나이다”(시 51:4). 죄의 사악함을 깨달음은 참된 회개의 필수요건이다. 우리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로 파악할 수 없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사물이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탁월한 점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핵심을 손대지 못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광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영광에 대하여 존경과 사랑을 표시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죄를 그토록 사악한 상태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되겠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죄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죄악이 지극한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마음의 괴로움 속에서 그것을 한탄하며 그것을 두려워하며 모든 악 중에서 가장 극악한 것으로서 경계할만한 대상이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춘다 할지라도 우리가 죄악의 참된 실상을 알게 되기까지는 우리는 죄악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지 못한다. 이와 같이 죄의 무한한 사악함에 대하여 깊이 깨닫는 것은 회개의 필수적 요소임이 분명하다. 그렇다, 바로 그것에서부터 곧 회개가 일어난다. 
죄의 사악함은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다른 방법으로 행하게 될 때 발생하게 된다. 즉 무한히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하나 내가 이것을 명확히 깨닫지 못한다면 어떠한 깊은 회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일어날 수도 없다. 모든 죄인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대해서 개의치 않는다. 나는 나의 마음대로 나의 길을 갈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에 대해서 개의치 않는다. 나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위협하시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겁내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눈이 나를 감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속박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사랑하는 것과 그가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개의치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할 뿐이다”라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영혼에 빛을 비추시고 영혼을 책망하실 때에 그는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참된 회개는 성령께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 마음속에서 죄가 심히 죄 된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의 권위를 멸시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룩한 공포이며 죄에 대한 혐오이고 죄에 대한 깊은 후회이며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인하는 것이며 죄를 버리는 완전한 마음이다. 이러한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세와 선지자들에 의해서 또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서 명백하고 균일하게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속죄의 날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일을 행하기 시작하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희생의 제물이 그의 죄를 없애주지 않으며 도리어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다.”(레 23:29) 
이러한 말씀의 가르치심을 신중하게 생각하라. “저희가 사로잡혀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 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 기도하거든…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옵소서”(왕상 8:47-50).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품성에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의 요구는 언제나 꼭 같으시다. 
선지자들의 가르치심에 관해서는 시편 32:3-5, 잠언 28:13, 예레미야 4:4, 에스겔 18:30-32, 호세아 5:15, 요엘 2:12,13을 보라. 그리스도의 선구자였던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말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요한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것이 메시아의 왕국의 특성인데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왕국의 백성이 될 수 없고 왕국의 축복들을 받을 수 없다. 약속된 자가 그의 모습을 나타내기 직전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고 이와 같이 그분을 영접할 준비를 하라.” 요한이 이처럼 전파하니 많은 사람들이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눅 1:16,17). 
주 예수님께서도 그와 똑같은 진리를 가르치셨고 항상 창조하셨다. 그의 부르심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말씀이었다. 즉 진정한 회개가 있기 전에는 구원을 주는 복음을 믿을 수 없다. 씨앗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땅을 갈아야만 하는 것처럼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할 수 있게 되려면 먼저 마음이 녹아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말씀하셨으며 자기가 “상한 심령을 고치시려”(눅 4:18) 보냄을 받았다고 알려 주셨다. 그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눅 5:32) 이 땅에 오셨으며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5)고 강조하셨다. 그는 탕자의 비유로 이 진리의 말씀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탕자는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고 “먼 나라”를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그의 용서함을 얻었다(눅 15:17-20).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눅 24:47)고 위임하셨다. 그리고 사도행전 5:31의 말씀은 주님께서 바로 그 명령으로 이러한 축복들을 전달하시기 위하여, 즉 “[영적인]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와 같이 그의 명령을 실행하는 사도들을 볼 수 있다. 오순절 날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사역에만 의뢰하라고만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8)고 말했다. 사도행전 3:19에서도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고 하는 베드로의 말을 볼 수가 있다. 
바울이 회심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을 때 그것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한 것”(행 26:18)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곳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 하면서”(행 20:21),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고 선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눈이 감기며 귀가 막히고 마음이 완고한 자들에 대해서는 선지자들과(사 6:10) 그리스도와(마 13:15) 사도들의(행 28:27) 시대에 멸망토록 버려졌으며 이들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마가복음 4:12절과 비교하여 볼 때 이것은 “그들의 죄가 그들을 용서받지 못하게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성경의 이러한 명백하고 일관된 증거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하나님과 계약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사도행전 17:30과 26:20에서 이러한 잘못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회개하라’는 말을 요한복음 전체에서는 한 번도 발견해 볼 수 없으며 20:31을 볼 때 회개가 구원에 필요치 않는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구원받은 자들에 대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다(1:16을 보라).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그 아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복음이다. 요한복음 20:31은 이 복음이 믿는 자들의 신앙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쓰인 것이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으며, 요한 일서 5:13(구원받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자들에게 말한 것이다. 2:3을 보라)은 그 서신서의 목적이 확신을 깊게 하여 주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서신서들 속에 회개에 대하여 거의 언급되어지지 않고 있지만 그것들 역시 성도들에게 보내지는 것이라고 그릇된 단정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7:10, 디모데후서 2:25, 베드로후서 3:9에는 이 시대에 철저하게 회개가 요구된다는 사실이 명백히 확증되어 있다.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전 1:9)는 말씀과 같이, 오늘날 20세기의 어떠한 새로운 것일지라도 구원을 위한 회개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말에 대한 증거로 우리는 신앙지상주의자들의 말과 ‘세대주의적 진리’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살았던 자들의 말을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다. 그렇다, 그것은 새로이 가장한 사단의 낡은 책략일 뿐이다. 그러나 사단의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하나님께서 그의 요구를 꺾으시고 그를 대항하여 반역한 모든 자들의 회개를 요구하시지 않는다면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는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이 점을 명심하라. 회개하고 돌아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든지 둘 중 하나가 있을 뿐이다. 자기의 고집을 주장하며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는 당신의 길에서 돌아서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비를 구하면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려는 단호한 결심을 하고 돌아서라. 그렇지 않으면 낮이나 밤이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