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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정치, 어떻게 볼 것인가?

교회와 정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사회와 교회의 현실 인식
얼마 전에 OOO님이 저희 연구회(카페) 게시판에 교회 지도자로서 정치적 색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궁금증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이방호님이 지적한대로 한미FTA 비준안 논의 과정에서 여야간에 끊임없는 정쟁과 갈등이 노출 되었고, 이 비준안이 통과되자 환영과 반대의 목소리가 뚜렷이 갈리면서 현 정치 세력에 대한 강한 불신과 함께 국민 사이에 반목과 갈등이 점점 커져 가고 있습니다. 
작금의 혼란한 한국 정치 지형과 극단적인 대치 상황을 내다 보노라면, 그렇잖아도 서민들은 날이 갈수록 팍팍해져가는 삶의 형편 때문에 시름만 깊어 가는데, 정치인들이 구호처럼 부르짖는 이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봄날은 도대체 언제쯤 올런지, 좀 편안하게 가족과 함께 TV 뉴스를 시청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언제나 경험해 볼 수 있을런지 참 요원하다 못해 절망의 깊이만 더해가는 요즘입니다. 
애초에 세속 정치인에게 그러한 기대를 갖는 것 자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치기어린 기대는 아니었는가 하는 자괴감마저 듭니다. 국민들이 낸 세비를 꼬박꼬박 받아 먹으면서 국민을 위한 정치는커녕 사회적 분란과 갈등만 양산하는 집권자들과 국회의원들을 보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통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좀 다릅니까? 이런 판국에 세상 사람들은 차치하고라도 믿는 성도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는가, 극도의 정치적 혼돈 상황 가운데 처해 있는 성도들이 믿고 따를만한 어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대안을 제공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되뇌어 봅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이역시도 긍정하기 힘든, 그래서 이 땅에서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그러하다보니 사회나 교회나 개인이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쉽고 빠르게 움직여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만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SNS 등의 발전된 매체를 통하여 소견의 파급 속도와 영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세상(사회)은 그렇다하더라도 진리의 견고한 터가 되어야 할 교회마저 바람 앞에 놓인 촛불같이 위태롭기 짝이 없는 현실이다보니, 큰 소동이 일어날 때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 이제는 신자들마저 교회에 대하여 특별한 신뢰나 기대를 갖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금의 한국 교회는 동네북 신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갖는다고, 무관심하면 나몰라한다고 비난을 받습니다. 관심을 갖는대로, 반대로 무관심해지는대로 어느 편도 모두를 감동시키거나 설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정치, 사회 참여에 관한 역사적 통찰과 성경적 근거
그렇다면 교회는 세속 정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사실 이러한 질문 자체를 진부한 물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어느 종교보다도 사회 참여에 활발하게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 참여를 복음주의적 유산으로 받아들이는 교회적 풍토는 나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멀게는 18세기의 웨슬리의 부흥운동으로부터 19세기에는 찰스 피니로 대표하는 2차 대각성 운동으로 소급하여 올라가야 합니다. 20세기 초반에는 복음주의와 대립한 자유주의 진영에서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라는 좀 더 급진적인 형태의 사회 참여 운동이 전개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2세계 대전 이후에 복음주의는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기독교 신앙과 사회 재건이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서 교회의 사회 참여와 적용에 관한 논의를 본격화하기 시작하는데, 그 정점에서 이루어진 회의가 바로 1974년 7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 국제회의’(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입니다. 150여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세계에 그리스도의 음성을’이라는 슬로건 아래 모인 약 2,7000여명의 참가자들은 회의를 마치면서 로잔 협약(Lausanne Covenant)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규약에 따르면 ‘복음전파와 사회적 책임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회의 이후로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더 나아가 ‘사회적 책임’만을 말하지 않고, ‘정치, 사회적 참여’를 교회의 의무 사항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강조하는 분위기는 칼빈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 대륙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 카이퍼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엽에 걸쳐 네델란드에서 가장 탁월하고도 유명한 신학자, 법학자, 교육자였으며 수상으로서 기독교 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뛰어난 정치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사상 중 하나인 ‘영역주권사상’(sounvereinteri t eigen kring)을 통하여 기독교의 현실 정치 참여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교회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 학문, 예술 등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게 됨으로써 기독교인은 자기가 속한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그 사명과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네델란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기독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교파를 떠나서, 심지어 칼빈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교회나 기독교 단체에서도 그의 주장을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주요 명분과 모델로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과연 옳은 것인지,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주장을 작금의 한국 교회적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과연 바른 일인지는 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만(이 점에 대해선 후반부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음), 이상의 아주 간단한 교회사적 고찰을 통해서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은 현대 교회는 교회의 정치, 사회 참여에 대하여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만한 명분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현대 복음주의의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죤 스타트는『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라는 책에서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매우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조직 신학적(교리적) 관점에서 관찰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다음의 다섯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1)보다 완전한 신론, (2)보다 완전한 인간론, (3)보다 완전한 기독론, (4)보다 완전한 구원론, (5)보다 완전한 교회론의 필요와 수립을 위하여서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으며, 결국에는 복음전파와 사회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와 정치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거나 ‘교회는 정치나 사회 참여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수구론자들의 딴지걸이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주의나 아브라함 카이퍼식의 신칼빈주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성도의 사회 생활이 정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 차원에서 이해되어 집니다. 기독교인인 동시에 개별적으로는 성실한 사회 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정치로 규정된 사회적 가치관과 규범을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회인으로서 투표에 참여하거나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공동의 의사 결정 과정이나 구제나 자선이나 교육 활동에 참여하거나 시위나 반론권 보장을 통하여 정당한 견해를 표출하거나 국가에서 인정하는 정당이나 사회 기관에 속하여 활동하는 경우의 일은 신자나 불신자와 관계없이 헌법에 보장된 자유로운 정치적 행위에 해당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제한이 없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교회와 성도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한, 비정치적일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관점
개혁신학적 관점에서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은 교회와 국가를 본질상 성격이 다른 두 왕국으로 보았지만 그렇다고하여 교회나 성도의 정치성을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칼빈은 교회와 국가의 고유한 권위를 인정하였습니다. 법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집권자에 대하여 그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았으므로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심지어 칼빈은 세속 정치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대리인들’이라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칼빈은 국가의 정치제도나 정치 형태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상당히 유연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칼빈은 ‘민주주의에 가까운 귀족 정치’를 선호하였지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재가 받은 정부 형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받아들이기 힘든 군주제에 대해서도 완전한 긍정도, 부정하지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인 군주제보다는 복수 통치제를 지지하였습니다. 이러한 통치제도가 바르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일반인들의 자유로운 의사가 반영되는 보통 선거 체제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칼빈은 신자들이 세속 집권자를 선출하는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바람직한 정치적 행위로 보았습니다. 또한 신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집권자들이 세속의 칼(권력)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항상 감시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정치적 활동을 요구할 때에는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언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속 집권자에 대한 순종과 저항이라는 독특한 양상은 칼빈주의의 국가관 내지 정치관으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저항이란 정부나 정치에 대하여 물리적이거나 폭력적인 방식의 저항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은 철저하게 힘을 힘으로 대항하는 저항을 부정하였습니다. 신자로서 취할 수 있는 저항이란 첫째는 실정법 테두리에서 백성들이 뽑은 관원을 통하여 저항하는 것과, 둘째, 개인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반대한 집권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성도의 저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의 정신에 충실하되, 인내와 고난으로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저항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칼빈주의에서는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가진 것이라도 폭력이나 봉기나 혁명을 통한 저항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더 심각한 죄의 부패와 방종과 타락한 개인주의를 낳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정치 참여의 명분과 한계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에 대하여 지극히 부정적이며, 정치 현안에 대하여 개인적인 판단의 자유를 말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성경과 교회 역사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이 재세례파나 신령주의자들과 같이 극단적인 정교분리 정책을 고수한 이들을 경계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전히 교회에서 정교분리라는 원칙이 강조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모든 면에서 교회는 정치와 무관하다는 의미에서의 분리가 아니라, 교회는 국가 권력이나 세속 정치로부터의 지배나 간섭으로부터의 분리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지고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세상에 있으나 속하지는 않는 영적 기관으로서의 본질적이면서도 독특한 면모를 유지하며 계승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관해서 기독교인 개인이나 기독교와 관계된 (공공 혹은 이익)단체와 교회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리스도인 개인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립된 관련 단체의 정치적 사고와 활동은 각자의 지식과 양심에 따라서 사회적 법과 도덕과 윤리와 상식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다소 자유롭고 유연성있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한 지교회에 속해 있다고해서 모든 지체들이 동일한 정치 이념을 갖거나 같은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똑같은 정책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넌센스입니다. 최근의 한미 FTA 협상 같은 현실적인 정치 사안에 대해서도 성도 간에 이견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다른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는 그야말로 정치적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정치란 의견 차이에서 비롯되는 협상과 양보를 통해서 개인이나 단체가 더 많은 욕구를 해소하려는 본위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맞닥들이게 되는 정치적 사안들은 대개가 현재의 지배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모색한 인본주의적인 사상에 기초하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 활동은 말할 것도 없고 인권이나 복지나 정의를 추구하는 일도 기독교 복음과는 하등 상관없는 원리에서 비롯된 경우가 허다합니다. 심지어 현실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으로 보이는 정치적 사안들조차 성경 정신과는 동떨어진 보수적이며, 자유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거나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한 목적에서 고안해 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현실 정치를 폄하하거나 부정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집권자들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고백이 거의 없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말그래도 현실 정치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식과 양심에 따라서 세상의 집권자와 정치인에게 하나님께서 원래에 그들에게 주신 성스런 기능을 바르게 수행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를 실천에 옮길 것을 촉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모범적인 행동과 설득을 통하여 불신자들의 가치관에 도전을 주며, 만연해 가는 사회악과 부조리를 개선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가능하다면 이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인 식견과 탁월한 능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발굴하여 지원함으로서 세속 정치의 풍토가 기독교적인 정치 문화로 바뀌어가는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또한 기독교적인 원리에 충실한 입안은 아닐지라도 일반 은총적 관점에서 사회적 정의와 공평을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면 열린 자세로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고, 정책 연대를 통하여 보다 유익하고 건전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앞서 언급하였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정치적 시도와 결과물이 좋은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혁 신앙에 근거하여 정치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네델란드 최초로 개혁 신앙의 원리를 실천 이념으로 삼는 정당을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관점서 본다면,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재 이 정당에 속한 국회의원의 숫자는 미비할 뿐만 아니라 당원도 개혁교회 성도들뿐입니다. 무엇보다도 화란의 개혁 교회들이 차츰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아 변질되어 감에 따라서 때로는 정당 이념에 반하는 정치적 현안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세속화된 사회에 기독교를 대표하는 기관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기독교의 본래적 가치를 부정적으로 여기게 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네델란드의 정치 환경은 우리나라와 매우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개혁 정당은 작지만 매우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제는 소수가 되어버렸지만 개혁교회와 개혁교회 성도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교회나 정치 현실과는 엄연한 차이점입니다. 역사적으로나 고백적으로 하나된 교회들과 성도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속 사회에서의 기독교 정당 활동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네델란드 교회나 아브라함 카이퍼의 예외적인 경우를 한국 교회나 사회에 무조건 적용하려는 시도는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관점에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특정한 정치적 사안이나 정책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특히나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이나 집단에 대하여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행동을 금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옳다고 여겨지는 사안과 정책일지라도 거기에다 자신의 신앙관을 투영하여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진 명백한 규정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인들에 의해 구상된 특정 정책이나 입장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마련된 내용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동의나 공감을 표현하는 선을 넘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빼앗거나 무시하는 명백한 종교적 월권행위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탁월한 개혁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마이클 호튼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책임있는 행동을 하도록 세상을 촉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 이름을 하나님 자신이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 않은 특정 정책들이나 입장들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세상의 포로된 교회』, p. 202) 
그러므로 목사나 교회 지도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용하여 특정한 정치적 사안을 홍보하거나 부정하거나 혹은 강요하거나 빈정대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일을 행할 때에 자신에게 마치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할 수 있는 특별한 영적 권한이 있는 것처럼 행사하려는 것은 아주 불친절할 뿐만 아니라 비신앙적인 태도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와 정치의 관계를 명확하게 풀어 설명하되 성도 개인의 정치적 판단에 대하여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특히나 그러한 사안이 일반 사회에서조차 관점에 따라서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는 문제라면 자신의 의견을 최종적인 판단의 기준인 것처럼 제시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정치 현안에 대한 성도 간에 이견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와 논쟁을 양산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계기로 유일하며 보편적인 진리의 본질과 가치를 더 풍성하게 드러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적 기관으로서의 교회적 사명
여기에서 우리는 정치적 사안이나 판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기독교 단체에 용인된 일과 교회에 주어진 일차적 사명에 대하여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세속 정치나 공공 정책의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주된 관심사는 그것을 입안하거나 또한 그것에 대하여 찬성 혹은 반대하는 의견이나 민의를 수렴하고 대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교회는 특정 정치 세력이나 어떤 정치적 상황에 편을 들거나 반대를 도모하는 기구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사회적 권력과 이익과 통제력을 쟁취하려고 세운 기관도 아닙니다. 사회 속에서 한 제도나 기관의 성격으로 존재하는 교회일지라도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세상의 어떤 개인이나 기구나 기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이며 엄위롭습니다. 
혹자들은 교회더러 항상 세속 정치에 민감하며, 공공정책에 호불호를 나타내며, 세상을 법리적으로 혹은 공리적으로 변화시켜 가는 일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심지어 국가를 기독교화하는 것이나 세상을 기독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교회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사명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구원과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교회에는 특별하고도 유일한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의 원의(原義)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공권력이며 권력의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집단에게도 제한되거나 침해 받을 수 없는 교회만이 지닌 고유하며 독보적인 특징입니다. 
교회의 설립과 목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교회가 이 세상 가운데 존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는 영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삼으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교회 가운데 허락하신 표지들과 은혜의 수단(말씀, 성례, 권징)을 통하여 지금도 전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이 세상과 사람들을 좀 더 나은 곳, 좀 더 잘사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목적들은 잃어버린 자들의 영혼을 깨움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과 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로 이끌어 주기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할 때, 세상속의 교회라할지라도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구원의 경륜적 기관으로서 소임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으로서의 기관인 교회에 구성원으로서, 또한 지체로서 머물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 시대적 상황이나 형편에 놓여 있든지간에 성도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성령과 말씀에 의해 지배받으며, 바른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와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함게 하는 참된 교회라면 이 세상에서 이미 실현되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살피는 모든 분들이 살아생전 이 같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기도하면서 글을 맺습니다.
김병혁 목사(SDG 개혁신앙연구회) 
교회와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