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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구원론적 관점에서 본 박윤선 박사의 개혁신학 -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하여

구원론적 관점에서 본 박윤선 박사의 개혁신학 -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하여
김병훈 교수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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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2. 칼빈과 개혁신학에서의 믿음과 행함
3. 믿음과 행함에 관한 박윤선 박사의 복음이해 
4. 믿음과 행함에 관한 박윤선 박사의 주석적 설명에 대한 정훈택 교수의 비판
5. 믿음과 행함에 관한 칼빈과 박윤선 박사의 성경이해 : 정훈택에 대한 비판
6.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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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 교회에 복음이 들어온 해가 1884년이므로 올해로 복음의 빛이 이 땅에 비췬 지가 어언 127년이 된다. 특별히 한국 교회 전체의 75%에 해당하는 장로교회는 내년인 2012년이면 장로교 총회가 구성이 된지 100년을 맞이한다. 평가를 받기에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지나온 한국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가? 빠른 성장으로 세계 선교역사에 특별한 인상을 주었던 한국교회는 이제 그 교세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까닭은 1970년대의 부흥회를 통한 급격한 양적 팽창과 더불어 교회 일반이 질적으로 하락한 데에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복음에 대해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이 세상에 의해 질타와 비웃음을 받는 빌미를 교회 스스로가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수축이 되어가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다음 세대의 신앙과 복음전도의 활성화를 위한 변화의 필요성이 이의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기에 부흥의 전기를 다시금 맞이하기를 바라던 한국교회는 2007년에 ‘어게인 1907년’을 표어로 내걸며 부흥의 열기를 북돋기에 힘을 쏟았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대각성 운동은 회개의 불길을 일으켰으며, 한국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음을 증거하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부흥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변화를 통한 부흥의 재도약을 간절히 바라던 한국교회는 2007년을 맞이하면서 교회의 윤리적 문제들을 언급하며 회개를 강조하는 다양한 형태의 발언들을 하였다. 장로교 교단별로, 또 초교파적으로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신학논문들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누구나 예외없이 회개와 변화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회개의 외침은 상당한 사람들이 이미 예상한대로 한국교회의 변화를 전혀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저 일과성에 그치는 구호와 행사들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우려가 되었던 바대로 그렇게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결과는 아마도 한국교회의 행사들의 초점이 회개보다는 부흥에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만일 정녕 ‘어게인 1907’을 통해 한국교회가 바라던 것이 회개의 변화였다면, 2007년의 많은 행사들 이 후에도 여전히 뚜렷한 변화의 열매를 보이지 않는 현재의 모습을 보며, 장로교 총회 100년을 한 해 앞두고 있는 지금 더욱 더 뜨겁고 깊은 회개의 촉구와 간구가 일어나야 할 터인데, 2007년에 비해 회개와 변화를 외치는 행사의 움직임이 별로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황은 ‘어게인 1907’을 통해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은 회개의 대각성이 아니라 오직 성장에 대한 갈망이었을 뿐이라는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표면으로는 회개를 강조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수적 부흥에 대한 열망에서 1907년의 대각성 운동을 회고하며 기념행사들을 한 것이라면 그 모든 행사들은 자기모순적이며 외식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2007년 한국교회의 회개의 외침은 물량적이며 외형적 성장주의의 욕망에 기초하여 성경의 교훈에 일치된 신앙을 가르치고 배우며 실천하는 일에 관심을 잃고 무력했던 모습들을 그 내용으로 삼았던 것인데, 오히려 회개와 부흥을 내세웠던 그 모든 행사들의 기초에 다시금 외적 성장으로 표현이 되는 부흥에 대한 바람이 동기로 자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스스로 극복하여할 대상으로 삼았던 물량적 성장주의의 욕망이 그 모든 행사들을 기획하고 시행하는 동기가 된 셈이니, 어떻게 회개의 변화가 나타날 수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보니 1912년 한국 장로교 총회의 설립의 사건이 1907년 대각성에 비해서 한국교회의 주목을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한국 장로교총회 설립의 사건에는 양적 부흥을 자극할만한 요소가 뚜렷이 없기 때문이다. 이해할 만한 일이겠지만 지금 한국교회에는 그나마 소리로라도 들렸던 회개의 외침이 점차 약하여지고 있다.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대하여 냉정하게 평가를 한 손봉호 교수의 말을 빌면 한국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심각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깊은 수렁으로 들어가고 있다. 올 가을에 들어 9월 22일과 26일에 각각 다른 모임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진단과 미래를 논하는 일이 있었다. 하나는 서울 YMCA가 ‘한국 기독교 희망이 있는가’라는 주제로 주최한 제 4회 ‘종로포럼’이며, 다른 하나는 청어람아카데미가 ‘한국교회가 선 자리’라는 주제로 주최한 대담회였다. 종로포럼의 주제와 관련하여 서울 YMCA는 “한국교회가 연일 부정적인 사건들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운데,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점과 대안이 무엇인지” 짚어보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손봉호 교수는 두 곳 모두에 초청을 받아 발제를 하고 대담을 나누었다. 한 곳에서 손봉호 교수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 개신교는 지금 사사 시대와 같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으면 다시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으면 다시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신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역사를 반복한다. 한국교회는 지금 돈, 권력, 명예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 이런 것들이 있어야만 하나님께서 복을 준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한국 교회가 회개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시궁창 밑까지 떨어져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물론 남아 있는 그루터기들이 있어야겠다. 
손봉호 교수의 말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돈, 권력, 명예라는 우상을 섬기는 죄 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회개의 가능성마저도 보이지 않을 만큼 타락해 있다. 마지막 바닥, 그것도 더럽고 썩어빠진 시궁창 밑까지 전락이 되는 수치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회개의 참된 눈물이 있게 될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손봉호 교수의 진단에 동의를 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한국교회가 개혁이 되어야 할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언제부터 한국교회가 이러한 부패와 타락의 수렁에 빠지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한국 교회사 연구의 영역이며 논문이 다룰 수 있는 주제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하지만 논문의 연구 범위 안에서도 현재 한국교회에 대한 부정적 진단과 동일한 각성의 소리가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정암 박윤선 박사의 외침이었다. 
선교 100주년을 맞이한 우리는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바이다. 한국 교회의 성장을 세계 교회가 바라보고 있고, 또 우리 주님께서 지켜 보신다. 그런데 이 땅에 심어진 개혁주의 교호(혹은 장로교회)가 근년에 이르러서 하나님 중심의 공화주의에서 인간의 교권주의로 바뀌어지는 현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 우리는 이러한 물결에 밀려 떠내려 가거나 허위적 거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각성하여 우리들 자신부터 과감히 개혁하는 바른 운동을 성취시켜야 하겠다. 이대로 살다가 훗날 어떻게 주님 앞에서 계산할 수 있겠는가? ... 그 뿐 아니라, 우리의 개혁운동은 바로 깨달은 성경과 교리에 근거하고 옛 것을 도로 찾는 데 있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 바른 증거와 성경에 입각한 올바른 교리 선포는 개혁주의 교회(장로교회)의 핵심이요 생명이다. 언제라도 성경의 진리 체계와 일치하지 않는 독단적인 그릇된 해석은 시정되어야 한다. 개혁주의는 계속 고칠 것을 과감하게 고치는 운동이기도 하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누구든지 역대의 모든 바른 해석을 무시하고 독단을 관철하려는 고집은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그 뿐 아니라, 근년에 이르러 물량주의가 팽창해 가면서 교회는 그 성결성(혹은 순결성) 교리를 지키지 않는 경향이 보인다. 성결성 교리는 교회의 5대 본질(단일성, 보편성, 성결성, 사도성, 불멸성) 가운데 하나로서 그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생활의 순결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가 바른 교리를 문서로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족한 것은 아니다. 교회가 그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하며, 또 교리를 거스리는 생활이나 행정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현하 개신교계는 은근히 가톨릭을 닮아가는 것 같은 형편이 아닌가? 교리의 순결보다 외부적인 교세 확장을 우선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회는 세력 단체가 아니요 증거 단체니만큼 양(量)보다 질(質)을 앞세워 신자들의 성화(聖化)를 중요시해야 한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은 건전하고 깊이 있는 신학운동과 집중적인 평신도 훈련 및 성경적인 권징시행(勸懲施行)이다.
박윤선 박사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에 물량주의로 인한 한국교회의 타락상을 지적하며 바른교리와 바른생활에 기초한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러한 상황인식은 구체적으로 합동신학교의 출범과 연관을 갖는다. 합동신학교는 한국교회의 개혁이 절실하다고 판단을 할 때, 이에 대한 대응책이며 또한 필요적 요청에 의하여 나타난 결과이었다. 따라서 1980년에 출발한 합동신학교는 학교의 설립과 관련하여 설립이념은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 등 3대 개혁이념의 구현을 통하여, 개혁신학을 재확인하고, 그리스도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교회를 세우며, 신앙과 윤리가 일치하는 경건 생활을 정착시키는 일”이라고 천명하였다. 
박윤선 박사와 함께 존재를 시작한 합동신학교는 한국교회의 개혁의 근간과 실현의 가능성을 바른신학을 통하여 바른교회를 세우고 이를 기초로 성경의 교훈에 합당한 바른생활을 실천하는 노력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출발인 성경에 입각한 교리의 선포는 다름 아닌 개혁신학에 있다고 믿었다. 박윤선 박사와 합동신학교에게 있어서 개혁신학을 따른다는 것은 성경에 입각한 올바른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에 기초하여 물량주의로 치달아 가며 교회의 성결성을 잃어버리는 일을 용납하지 않고, 신자들의 성화를 중요시하며, 물량에 기초한 세력단체가 아니라 성결에 근거한 증거단체로서의 교회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자 노력을 하는 것이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박윤선 박사와 합동신학교가 선택한 성경의 교훈에 따른 처방이었다. 
왜 박윤선 박사는 개혁신학에서 교회개혁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려고 했을까? 그것은 박윤선 박사의 신학사상에는 믿음과 행함에 대한 개혁신학의 원리적인 이해가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윤선 박사는 개혁신학은 성경적인 신학이며, 개혁신학을 충실히 배우고 따를 때, 올바른 믿음 생활이 가능하며 그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개혁신학은 한국 교회개혁의 요체이며 또한 가능성이었다. 요컨대 개혁신학은 성경에 입각한 교훈을 제시하는 바른 신학이며 바른 믿음을 낳고 그것은 또한 바른 생활을 이루는 바른 행함을 이끌어 내는 신학 원리이기 때문에, 박윤선 박사에게 있어서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따르지 않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개혁하기에 합당한 단 하나의 신학인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서론적 인식을 가지고 구원론적 관점에서 개혁신학과 박윤선 박사의 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각각의 신학에 있어서의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살핌으로써,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근거와 가능성을 개혁신학에서 찾으며 이를 바른신학으로 판단을 한 박윤선 박사 자신의 신학이 개혁신학에 충실한 신학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의 개혁이 절실한 이 때에 다시 박윤선 박사를 듣고 읽음으로써 교회개혁을 위한 신학의 방향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개혁신학자로서의 박윤선 박사에 대한 강조는 일각에서 박윤선 박사에 대한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도 요구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정훈택 교수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보는 부정적인 현상에 대한 책임에 있어서 박윤선 박사가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오히려 주된 책임이 박윤선 박사에게 있다고 비판을 한다. 이에 논문은 박윤선 박사와 개혁신학을 말하면서 또한 정훈택 교수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문제가 복음에 있어서의 행함의 원리를 바르게 알지 못한 까닭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 답으로 ‘바울에 있어서의 새 관점’ 신학을 제시하는 신학적 노력이 점점 확장되어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아울러 개신교의 루터파 일부와 감리교 등이 천주교회와 의롭다함의 교리에 있어서의 연합선언을 함으로써 구원에 있어서의 행위의 의미,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종교개혁의 신학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논문의 이러한 시도는 부가적인 의의를 갖는다고 판단을 한다. 
2. 개혁신학에 있어서의 믿음과 행함
개혁신학에 있어서의 믿음과 행함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론의 중심인 칭의론과 성화론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개신교 칭의론이며, 그러한 은혜를 받은 자가 또한 행함의 열매를 맺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 성화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칭의론과 성화론의 구별은 종교개혁 신학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특별히 종교개혁 당시에 -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지만 - 천주교회는 후기 중세 스콜라 신학의 전통을 따라 칭의론과 성화론을 동일시하여 하나의 주제로 다루어 왔기 때문이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
개신교회가 칭의론과 성화론을 구별한 것과는 다르게, 천주교회는 의롭게 됨과 거룩하게 됨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소위 의화론(義化論)이라는 주제 하에 관련된 논의를 행한다. 이러한 흐름은 세미-펠라기우스적인(semi-Pelagian) 프란시스칸 교단이 16세기 천주교회의 신학의 주류를 형성한데서도 나타나지만, 어거스틴의 은혜에 대한 이해와 강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도미니칸 교단에서도 여전히 나타나는 천주교회 신학의 중심 원리이었다. 어거스틴이 비록 종교개혁자들에게 “오직 은혜”의 신학적 영향력을 강하게 준 것은 사실이지만, 어거스틴에게서도 “의롭게 함(iustificare)”은 신자가 전 생애에 걸쳐서 믿음과 사랑으로 의롭게 변하여 가는 것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의롭게 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의의 시작이라는 사건과 그것이 완전함으로 이어져 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 결과 후에 종교개혁 신학에서 ‘성화’의 개념이 되었던 것이 의롭게 함이라는 교리 안에 수용이 되는 효과를 낳게 되었다 ... 어거스틴에 따르면 의롭게 함이란 근본적으로 ‘의롭게 만들어짐’이라는 것에 관계가 된다.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은 어거스틴의 ‘은혜론’을 따르는 자들이나, ‘세미-펠라기우스적’인 견해를 따르는 자들이나 모두 의롭게 됨과 거룩하게 됨을 동일한 실재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천주교회는 트렌트회의(1545-63)에서 행함의 순종이 없이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개신교의 신학을 저주받을 이단적 가르침으로 정죄를 하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성령님께서 사람의 심령에 부으시고 또한 내재케 하시는 은혜와 사랑을 배제한 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거나, 죄의 용서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거나, 혹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은혜는 단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일 뿐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트렌트회의, ‘칭의에 관련한 법령’ 11항)
트렌트 종교회의가 이처럼 종교개혁 신학을 비판하는 까닭은 의롭게 됨이란 단순히 죄를 사면을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새롭게 되어 불의한 자가 의로운 자로 참된 변화를 이루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가 없이는 영생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천주교회의 이러한 주장은 종교개혁 신학의 구원론에 대한 세밀한 거부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살피는 개혁신학이 칭의와 성화를 어떻게 구별하고 있는지를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가르치는 칭의와 성화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으며 우리에게 전가된 오직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가 보시기에 의로운 자들로 받아주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사역이다.(문답 33항) 
성화는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되며, 죄에 대하여서는 더욱 더 죽은 자가 되고, 의에 대하여는 더욱 더 산자가 되도록 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사역이다.(문답 35항)
개혁신학은 칭의란 소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죄사함을 받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받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성화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되는 전인격적인 변화의 은혜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이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의롭게 됨이란 죄사함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은혜을 받아 속사람이 거룩해지고 새롭게 되는 것이라는 천주교회의 주장과 근본적이 차이를 보인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란 무엇인가? 
결국 논쟁의 초점은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에 있다. 개혁신학은 성경에서 말하는 의롭다 함의 교훈은 성화론과는 별개의 것이며 단지 칭의론만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천주교회는 성경에서 말하는 의롭다함은 결코 개신교회가 말하는 칭의론이 아니며 성화론을 포괄하는 의화론으로 풀이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천주교회의 의화론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주입된 의’(iustitia infusa)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는 반면에, 개혁신학의 칭의론은 그것은 ‘전가된 의’(iustitia imputata)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주교회는 트렌트회의 제 6차 속회를 열어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 대해 비판을 하며 의롭게 함에 관련한 자신들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의롭게 됨의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목적에 관한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며; 작용에 관한 원인으로 말한다면 ... 하나님의 긍휼이며; 공로와 관련한 원인은 지극히 사랑하시는 독생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 도구적 원인은, 역시, 믿음의 성사인 세례 성사이며 ... 마지막으로, 오직 하나뿐인 형상적 원인(formalis causa)은 하나님의 의이다. 이것은 ...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이다. 그 의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영에 있어서 새롭게 되며, 단지 의롭다고 간주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각이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시는 분량에 따라서, 그리고 각각 자신의 성정과 협동에 따라서 그 의를 우리 안에 받아들임으로 참으로 의롭다고 불리며 또한 의롭다 ... 왜냐하면 누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공로가 전달되지 않고서는 의롭게 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경건한 자가 의롭게 됨에 있어, 그의 지극히 거룩한 수난의 공로에 의하여 거룩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의롭게 되는 자의 심령에 부어지고, 그들에게 거하게 될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로써 죄의 사함과 더불어 의롭게 됨에 있어서 사람은 그가 접붙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러한 모든 주입된 것들, 믿음, 소망과 사랑을 동시에 함께 받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소망과 사랑이 그것에 더하여 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와 완전하게 연합시키지 못하며, 그의 몸의 살아있는 지체가 되게 하지를 못한다. 이러한 까닭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무익한 것이라는 매우 참된 말이다.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조금도 가치를 지니지 못하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참된 말이다 ... (트렌트회의 제 6차 속회, 칭의에 관한 교리 제 7장)
천주교회가 의롭게 함의 형상적 원인으로 지목한 하나님의 의는 죄인이 성령께서 의를 주실 때 그 의를 받아들이도록 협동하여 자신을 실재로 변화시키는 의이다. 따라서 누구도 실재로는 의롭지 않으면서 의롭다고 일컬음만 받게 되는 일은 없다. 그들의 생각에 의로움이라는 형상(form)은 의로움의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지 단지 명목상의 이름 뿐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실재적인 의로움의 내용은 없고 다만 형식적으로 의롭다는 이름만 가질 뿐인 자를 만드신다는 것이 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교훈에 어긋난다고 주장을 한다. 
천주교회의 이해에 따르면 성경에서 말하는 의롭다함이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모두 나타나는 변화를 가리켜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일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심령에 주입이 된 믿음, 소망, 사랑을 통하여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치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며 또한 예수 안에서 효력있는 믿음은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말한 성경의 교훈이라고 믿는다. 
이에 대하여 칼빈의 비판은 선명하다. 천주교회의 주장은 성경에서 말하는 의롭게 함이라는 교훈을 잘못 이해한 탓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빈은 트렌트회의의 교리선언 및 법령에 대해 비판서를 내면서, 의롭게 함에 대한 천주교회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들은(천주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오직 믿음에만 근거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많은 애를 쓴다 ... 그들은 그것이 죄사함 뿐임을 부정하고, 동시에 새롭게 됨과 거룩하게 됨이 포함되기를 원한다. 도대체 이것이 진실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로마서 4장에 있는 바울의 말씀은 이러하다: “하나님께서, 일을 한 것도 없으나 의를 전가해 주신 사람의 행복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의 불법함을 사함받은 자는 복되도다”(시 32:1; 롬 4:6). 만일 다윗의 이 진술에서 바울이 값없이 주시는 의에 대해 올바르게 정의를 이끌어 내고 있다면, 의롭게 됨이란 죄의 사함으로 여겨진다는 결론이 따른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전가하지 않고 의를 전가하신 자에게 다윗이 의롭다함을 일컫고 있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동일한 사도는, 다른 어떤 증언을 소환하지 않은 채,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죄를 사람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셨다”(고후 5:19)고 말한다. 이어서, 계속해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고 뒤에 덧붙인다. 우리의 죄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속죄가 되었고 우리를 더 이상 죄의 책임 아래에 붙잡아 두지를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그대는 이것보다 더 분명한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칼빈에 따르면 천주교회는 의롭게 함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잘못 해석함으로 인하여 칭의론과 성화론의 구별을 바르게 보지 못하였다. 칼빈은 의롭다함을 받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도 사람의 영적인 중생과 같은 변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성경의 교훈에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라고 비판을 한다. 칼빈이 볼 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란 그저 단순하게 오직 하나님께서 값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을 뿐이다.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달려나가는 것 이외에 천주교회가 주장하듯이 율법의 순종에 따른 행위의 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구절을 성경에서 단 한 구절이라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칼빈에게 있어 타협할 수 없는 결론이다. 
칼빈의 이러한 이해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도 잘 반영이 되고 있다.
질문: 칭의와 성화는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답변: 비록 성화와 칭의가 비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시는 반면에, 성화에 있어서는 그의 영으로 은혜를 주입하여 주시고 성화를 실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신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전자에 있어서는 죄가 용서함을 받으며, 후자에 있어서는 죄가 억제된다. 전자는 하나님의 복수하시는 진노로부터 모든 신자들을 똑 같이, 금생에서 완전하게, 그리고 다시는 정죄를 당하지 않도록 해방시킨다. 후자는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똑 같지 않으며, 누구에게 있어서도 금생에서 완전하지 않으나 완전함에 이르도록 자라난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7문답)
이처럼 종교개혁신학, 특별히 칼빈 이후의 개혁신학은 칭의와 성화를 확고히 구별한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죄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써 되는 일인 반면에 거룩함을 이루는 것은 죄를 억제하도록 주입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 일이다. 우리 편에서의 어떠한 변화로 - 비록 그것이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지라도 -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의롭다함을 받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도 결코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일 뿐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구별이라는 것이 개혁신학의 강한 확신이다. 
의롭다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음인가? 아니면 믿음과 더불어 행함으로 말미암음인가?
종교개혁자들은‘오직 은혜’(sola Gratia)에 덧붙여‘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하였다. 그 까닭은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의롭다함을 받는 신앙의 원리를 다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은 물론이거니와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일에 대한 설명은 그것이 오직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점에 더하여 또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일이 어떠한 방식을 따라 죄인에게 이루어지는가의 논의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일이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믿음에 더하여 행함이 있어야 이루어지는가의 문제이다. 칼빈은 간명하게 의롭다함을 받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지 결코 행함이 아니라고 단언을 한다. 
모세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하였다. 모세의 이 말로 아브람의 믿음을 높이 평가한다. 그것은 첫째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은 믿음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은 것, 그리고 그 의를 전가에 의하여 얻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바울은 이를 역으로 말해서 믿음이 의로 여겨진 자는 행위로 의롭다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는 이해를 이끌어 낸다.(롬 4:4)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의 공로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시니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로움을 구할 때에는 행위의 공로는 그치게 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의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이며, 그의 말씀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창세기 15:6절 주석에서)
칼빈은 그의 창세기 15장 6절에 대한 주석에서 바울이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하여 믿음으로 인한 의와 행위로 인한 의의 대조를 한 로마서 4장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근거로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원리적으로 충돌하며 서로 함께 갈 수 없음을 말한다. 또 빌립보서 3장 8,9절에서 바울이 “모든 것을 ...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쓴 것을 근거로 하여 칼빈은 그리스도의 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가야 함을 힘주어 말한다. 유대인들의 잘못은 바로 믿음으로 얻는 의를 버리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던 사실에 있던 것이다. 곧 믿음은 의롭게 함을 얻기 위하여 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함을 뜻하는 것이며 행위에 의한 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리스도 이외에 자신을 자랑할 이유가 남아 있는 것을 뜻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한다고 할 때 믿음 자체에 의롭게 하는 어떤 능력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칼빈은 믿음 그 자체는 의롭다할 능력이 없음을 강조한다. 만일 믿음에 의롭게 하는 어떤 능력이 있다면 믿음 그 자체가 불완전한 만큼 그것으로 인한 의롭게 됨도 불완전하게 될 것이 되고 만다는 설명으로 이 사실을 풀이한다. 즉 믿음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며 믿음은 오직 그 믿음의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그 가치를 얻을 뿐이다. 
우리가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할 만한 어떤 가치를 그 자체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얻는 도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도구일 뿐이며, 또는 일종의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표현 방식을 따르면 믿음은 의롭다함을 얻는 질료인(material cause)도 아니고 동력인(effcient cause)도 아니며 목적인(final cause)도 아니며, 다만 형상인(formal cause)일 뿐이다. 즉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질료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의일 뿐이며, 동력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 선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목적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선언을 받는 것이라면, 믿음은 이러한 일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어떠한 모양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를 소유한 자로 나타나는지를 물을 때, 이에 대한 대답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을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도구이며 형식이며 또한 그릇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때 칼빈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곧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도록 하는 방식일 뿐이며,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의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 칼빈의 의도이다. 
...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기 이전에는 우리는 어느 것에도 비할 데 없는 이 선(=그리스도의 의)을 가질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이 하나로 연합이 되는 일,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일, 요컨대 신비한 연합을 최고로 중요하게 여긴다. 그 결과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유가 된 후에야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에게 주어진 은사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멀리 떨어져 서서 우리 밖에 계신 분으로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옷입고 그의 몸에 접붙임을 받을 때에,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과 하나로 만드실 때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의롭다함과 관련한 믿음의 역할이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는 하나의 형식이며 그릇인 셈이다. 그 형식과 그릇에 채워지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의이며,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은택이다. 
‘칭의의 믿음’과 ‘성화의 행함’의 관계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 주입된 의로 인한 변화, 곧 의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정적 선언에 따라서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칭의를 말한다는 주장은 곧 바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칼빈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결국 선행을 폐지하거나 죄를 짓는 경향이 강한 사람들로 하여금 선행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비판에 대해서 단호하게 그러한 비판이 잘못된 것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칭의는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믿음과 선행은 굳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의롭다함의 은혜와 중생의 은혜는 구별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의와 거룩함은 구별이 되지만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을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원리를 들어 설명을 한다. 
우리는 의와 성화를 구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둘을 자신 안에 비분리적으로 포함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바라는가?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를 소유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의 거룩함에 참예함이 없이는 그를 소유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조각들로 나뉘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고전 1:13). 주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유익을 누리도록 하실 때에 자신을 주심으로써 하시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은 주지 않은 채 다른 한 쪽만 주시는 일이 없이 동시에 둘 모두를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가 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참으로 진리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의롭게 될 때, 그 참여 안에는 의와 마찬가지로 성화도 또한 포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함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됨으로써 의롭게 된다. 그 결과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나뉠 수가 없는 당연한 이치에 따라서 의롭게 됨과 거룩하게 됨은 영원히 분리될 수가 없는 끈으로 연결이 되어 있음을 가르친다. 그 누구도 거룩함을 받지 않은 채,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는 법이다. 
이러한 이치로 인하여 칼빈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 곧 칭의의 교리는 선행에 대한 의지와 열심을 억누른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일축을 한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을 하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는 마치 사람들이 공로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면 선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에 대하여 칼빈은 사람이 정녕 선행을 하도록 동기를 자극받을 필요가 있을 때, 구속과 부르심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들보다 더 크게 자극할만한 것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고 되묻는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어 구원을 받은 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이면 이미 선행을 행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의 교리는 선행을 권장할 근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 오류로 가득 찬 거짓말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칭의 교리는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더욱 짓도록 부추긴다는 주장도 지극히 잘못된 것임을 밝힌다. 우리 편에서는 죄 사함을 값없이 받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편에서는 자신의 거룩한 피를 흘려서 말할 수 없이 귀한 값을 치루고 죄 사함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이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은 한 번 깨끗함을 받은 후에 다시금 진흙탕에 뒹굴어 더럽히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연합의 이해는 믿음과 행함, 칭의와 성화의 비분리적 연결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본질적인 원리이다. 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 그와 연합을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의롭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나뉠 수가 없는 이치에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이루어 가게 된다. 따라서 거룩함에 합당한 선행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이라 할 수가 없다. 
칼빈은 이러한 이해를 따라서 천주교회가 믿음을 사랑을 행하는 형성된 믿음(fides formata)과 사랑의 행위가 없는 미형성된 믿음(fides informata)을 구별을 비판한다. 천주교는 이러한 구별을 기초로 개신교의 이신칭의의 믿음은 미형성된 믿음이라고 말하면서, 이신칭의는 행함이 없이도 의롭다고 주장을 하는 잘못된 교리라고 비판을 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믿음을 형성된 믿음과 미형성된 믿음으로 구별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천주교회의 비판에 반론을 전개한다. 칼빈에 따르면 의롭게 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받는 믿음에 사랑이 없는 믿음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개념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다. 그렇지만, 의롭게 된 자에게 있어서, 믿음은 단독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구원의 은혜들을 함께 수반하며, 결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다른 구원의 은택들과 함께 나오는 믿음이며 거룩한 삶과도 연결이 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사랑이 의롭다함을 가능케하는 칭의의 근거는 절대로 아니지만, 선행이나 사랑의 열매가 없이 믿음이 작용을 하는 경우는 없다. 믿음은 항상 다른 구원의 은혜를 수반한다. 하지만 구원받는 참 믿음이 사랑과 비분리적이라고 해서, 결국 믿음이 사랑이며 사랑이 믿음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사랑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이 되어 결국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그릇된 가르침으로 빠지게 된다.
칭의의 믿음이 성화의 거룩한 열매와 맺고 있는 유기적인 관계에 대해 초기 개혁신학의 신앙고백을 정립한 벨직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 안에 이루어진 참된 믿음이 그를 중생케 하며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며, 죄의 굴레에서 자유롭게 함을 믿는다. 그러므로 이 의롭게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경건하며 거룩한 삶에 태만하게 된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하며 단지 자신을 사랑하거나 정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하게 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믿음이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헛된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 명하신 일들을 스스로 행하도록 인도하는 믿음, 성경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 일컬은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들은 믿음이라는 좋은 뿌리에서 비롯되는 것들로 선하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성화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칭의와 관련하여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행을 행하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선한 것일 수가 없으니, 마치 나무가 처음부터 좋은 것이 아니라면 그 열매가 좋은 것일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칭의의 믿음은 사랑의 행함을 내용으로 갖는 형성된 믿음이 아니며 단지 아무런 변화를 수반하지 않은 단지 형식만 믿음일 뿐인 미형성된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천주교회의 비판은 개혁신학의 모든 신앙고백서에서 거부되고 있다. 개혁신학은 선행이 아니라 선행을 행하기 이전에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고백하면서도, 그 믿음은 경건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화의 은혜와 필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음을 강조하기를 잊지 않고 있다. 
의롭게 하는 믿음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정의하는 개혁신학은 어떤 이의 믿음이 성화에 따른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결코 참된 믿음이 아니면 다만 헛된 믿음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선행은 믿음의 증거이며 열매인 것이다. 성경이 의롭게 하는 믿음을 가리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뿌리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한 열매를 맺기 때문인 것이다. 믿음은 선행의 열매에 대하여 뿌리 또는 나무의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사상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옮긴 듯이 그대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이 선행들은 참되며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들이며 증거들이다. 이것들로 인하여 신자들은 그들의 감사를 표하며, 그들의 확신을 강화하며, 형제들의 덕을 세우고, 복음의 고백을 빛나게 하며, 대적자들의 입을 막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며,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음으로써 마지막, 곧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개혁신학은 죄인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 오직 믿음으로 나갈 뿐이며, 선행이나 사랑과 같은 행위를 통하여 나가는 것이 아님을 말하면서도, 선행들은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들이며 증거들임을 말한다. 이러한 믿음의 증거들로 인하여 구원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 그리고 선행의 연결은 영적 유기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목적성과도 관계가 되는 하나님의 사역이기도 한 것이다. 
나무로서의 칭의의 믿음과 열매로서의 성화의 열매가 필연적 관계를 가지는 배경에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은혜언약을 작정하시고 실행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다. 튜레틴(Francis Turretin)은 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아래와 같이 준다. 
은혜의 약속은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에게서 나온다. 각 위격의 하나님은 구속의 사역에 함께 하시면서도 각각에게 고유한 사역의 양식에 따른 특별한 관계를 지니신다. 첫째로,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으셔서 그의 가족으로 삼으시고, 둘째로, 구속주이시며 머리이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구속하셔서 자신과 연합하심으로 자신의 소유와 몸으로 삼으시며, 셋째로, 위로자이시며 성결케 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정결케 하시어 그가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으신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성령의 전으로서 가치 있게 살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며 순종을 해야할 필요성이 세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고 예배하기 위함이며(벧전 1:15,16; 말 1:6; 엡 5:1), 다른 하나는 온 영혼을 다해 구속주를 영화롭게 하며(고전 6:20) ‘선한 일들에 열심하는 친백성들로서’ 그를 섬기기 위함이며, 끝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열심을 다해 경배하며, 성령 안에 살면서 또한 성령 안에서 걸어가며(갈 5:25), 그의 전이 오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고전 6:15,19). 
튜레틴이 잘 설명하고 있듯이, 칭의의 믿음과 성화의 선행은 모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위하여 베푸시는 은혜의 결과이다. 성부하나님께서는 자녀로 선택한 자들을 성자 하나님께서는 구속하시고 또 자신과 연합을 하셔서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며,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과 연합이 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 안에 거하시며 이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따라서 택함을 받은 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시는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러한 은혜를 입은 자들은 또한 성령 하나님의 정결케 하시는 은혜를 받아 선한 일들에 열심하는 친 백성들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구속 사역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은 그 뜻과 능력과 목적 등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 칭의의 믿음은 성화의 선행과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다.
3. 믿음과 행함에 관한 박윤선 박사의 복음이해
박윤선 박사는 조직신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교리에 관한 여러 편의 글들을 썼으며, 그 가운데 중요한 것들이 모아져 한 권의 책으로 출판이 되어 있다. 또 그의 주석 안에도 필요에 따라 교리에 관한 그의 관심과 이해를 적어두었다. 그는 개혁신학에 충실한 성경신학자로서 개혁신학을 가르치고 강조하기에 힘을 썼으며, 한국교회에 개혁신학을 소개하고 전파하기에 힘을 다한 개혁신학자이었다. 이제 본 글의 관심인 믿음과 행함에 관하여 박윤선 박사는 어떠한 구원론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은 그가 소망하였던 바대로 성경에 일치하는 바른교리를 선포하고, 또한 교회의 성결성을 지키고, 신자들의 성화를 강화하여감으로, 성결에 근거한 복음의 증거단체로서의 바른교회를 세우기에 합당한 개혁신학의 이해를 어떻게 가지고 있었는지를, 특별히 믿음과 행함이라는 관점에서 알아보는 일이 되겠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
박윤선 박사는 천주교회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종교개혁의 신학을 분명하게 천명한다. 그는 천주교회가 트렌트 회의에서 인간의 공로에 구원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결정을 하였음을 비판한다.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만을 근거로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천주교회는 성화도 신자의 사죄받을 근거로 여겼으며 더욱이 그리스도의 공로마저도 칭의의 간접 근거라고 말하는 커다란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의 차이점을 제시한다.
성화와 구분되는 칭의의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칭의는 성화보다 논리적으로 우선한다. 
(2) 칭의는 객관적으로 죄인 밖에서 실현되지만 성화는 주관적으로 그의 실생활에서 성취된다. 
(3) 칭의는 하나님께서 선언하시고 성화는 성령께서 시행해 주신다. 
(4) 칭의는 단회적이지만 성화는 계속적이다. 
(5) 칭의는 하나님과의 관계 면에서 죄인이 받는 신분 변동이고, 성화는 그가 죄를 계속 버리며 하나님의 형상과 같이 새롭게 되어 가는 작업이다(롬 3:20-21; 갈 3:11-12). 
(6) 심리적으로 말하면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과 함께 느껴지는 사죄 받은 평안함이고, 성화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해지려는 소원과 행동의 계속이다 ...
박윤선 박사의 칭의와 성화의 구별은 개혁신학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칭의는 죄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는 신분의 변화를 가리키는 반면에,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되며, 계속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는 더욱 더 산 자가 되도록 하는 상태의 변화를 가리킨다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33항과 35항의 문답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란 무엇인가?
박윤선 박사는 “칭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칭의는 법정용어로서 범죄자가 법적 선언에 의하여 옳게 여김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대답을 준다. 즉 죄인이 자신에게 어떠한 의가 실제로 있지 않아도 옳게 여김을 받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과 관련하여 박윤선 박사는 천주교회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비판을 하며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 준다.
로마 가톨릭교의 트렌트 회의는 신자의 신망애(信望愛)가 생전에 온전해지는데 그것이 의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에게 전가(탓으로 돌려줌)됨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의를 성립시킨 그의 순종은 피동적인 것(passive obedience)과 능동적인 것(active obedience)이 있다고 한다. 피동적인 것은 그가 우리의 벌을 대신하여 죽으심이요(갈 2:21), 능동적인 것은 우리 대신 그가 율법을 완전히 복종하심이다(롬 5:19; 갈 4:4-5). 이 두 가지는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어 그와 연합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것(신자 자신의 소유)으로 인정받는다.
박윤선 박사는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 대립되는 이해를 소개한다. 하나는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주입된 의(iustitia infusa)로 인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천주교회의 견해이다. 그것은 박윤선 박사에 따르면 신자에게 있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 소망, 사랑이 더욱 더 온전해져가며 이러한 변화를 의로 여기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박윤선 박사는 이 견해를 부정하면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전가된 의(iustitia imputata)로 인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종교개혁신학의 견해를 소개한다. 이것에 대해 박윤선 박사는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으로 인한 형벌의 면제와 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으로 인한 율법의 완전한 의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자기의 것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혁신학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박윤선 박사에게 있어서 의롭게 됨의 근거는 죄인이 은혜로 전가를 받는 그리스도의 의외에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없다. 그는 말하기를 “칭의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확정된 그의 의(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피동적 순종으로 성립된 의로움)로만 성립된다.”고 하였다. 속죄에 대한 법적 선언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만 근거할 따름인 것이다. 
의롭다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음인가? 아니면 믿음과 더불어 행함으로 말미암음인가?
그러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기 위하여 죄인이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일이 어떠한 방식을 따라 죄인에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의 필요성은 오직 은혜의 구원이 참으로 은혜로 다가오기 위해서 죄인 편에서의 역할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는 이유에 있다.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의만이 객관적인 공로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 공로를 전가받기 위하여 어떤 행함이 요구되거나, 혹은 천주교회가 말하는 바처럼 일정한 수준의 주입된 의가 요구된다면, 그것은 은혜에 더하여 행함의 공로가 요구되는 것이 되어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기가 어렵게 된다. 박윤선 박사는 이 점에 있어서 의롭다함을 받는 방편은 오직 믿음뿐임을 강조한다.
로마 가톨릭교는 칭의의 방편에 대하여 개혁자들과 달리 말한다. 트렌트 회의는 신앙이 칭의의 유일한 방편은 아니라고 하였다. 즉 신앙 외에 다른 것들(하나님을 두려워 함, 소망, 사랑, 회개, 성례받을 마음,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이 합하여 칭의의 방편을 이룬다고 하였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신앙만이 칭의의 방편이라고 하였다(갈 2:16).
박윤선 박사는 로마서 4장 4-5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이 칭의의 방편이 된다는 점을 확고히 밝힌다. 박윤선 박사의 생각에 성경 자체가 의롭다함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여기서 바울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일을 해주고 받는 삯이 아니라, 이것과는 정반대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 어떤 삯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는 불경건한 자라 할지라도 믿을 때에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은혜임을 말하고 있다고 풀이한다. 이어서 바울이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말할 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 사실이며, 이것이 바로 의의 전가를 뜻한다고 정리를 한다. 덧붙여 이러한 자신의 결론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60문답을 인용하여 확정을 짓는다.
(문) : “너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워지는가?”
(답) : “오직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크게 범했고 그 한가지도 지키지 못하였으며 아직도 모든 악을 행할 경향이 있어도, 하나님은 나의 공로 없이 다만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성결과 공의의 만족을 나에게 돌려주시되 내가 전혀 범죄한 일이 없는 것같이 간주해 주시며, 도리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내가 완전히 한 것처럼 보아 주신다. 내가 믿는 믿음으로 그런 유익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렇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워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하이델베르크의 답,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가 또한 박윤선 박사의 답이다. 여기서 박윤선 박사는 칼빈이 그러했듯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할 때, 이 말이 믿음 그 자체에 의롭게 하는 능력이나 근거가 있다는 뜻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이 말(=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믿음 그것이 영혼을 구원해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믿음 그 자체는 구원할 힘이 없다. 이것은, 그 믿음이 신뢰하는 그리스도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도구가 될 뿐이며, 그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칭의의 근거는 신자의 신앙도 아니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방편일 뿐(요 1:12) 공로가 아니다. 더욱이 신자의 어떤 선행도 칭의의 근거는 될 수 없다(롬 3:28; 갈 2:16; 3:11). 칭의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으심으로 확정된 그의 의(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피동적 순종으로 성립된 의로움)로만 성립된다.
만일 믿음 자체에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면 믿음이 불완전한 만큼 또한 의롭게 됨의 의도 불완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의롭게 하는 능력이나 근거가 믿음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 칼빈과 마찬가지로, 박윤선 박사는 신앙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지 결코 근거가 아니며 공로 또한 아님을 확고히 한다. 
‘칭의의 믿음’과 ‘성화의 행함’의 관계
죄인이 의롭게 되는 일이 믿음을 방편으로 된다면 굳이 의롭게 된 신자들이 선행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앞서 살핀 바처럼 칼빈은 죄인인 선행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하여 죄를 더욱 담대히 짓거나 선행을 행할 열심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 전혀 영적 이치를 알지 못하는 그릇된 것으로 비판을 한다. 이러한 생각은 죄인이 스스로 선행을 통해 공로를 이루어 의롭다함을 받고 또 선행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약속이 되어 있어야 선행을 한다는 잘못된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을 한다. 
칼빈은 ‘칭의의 믿음’은 ‘성화의 선행’을 필연적으로 낳으며, 믿음과 선행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면서 또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믿음과 행함의 이러한 관계의 원리를 칼빈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서 설명을 한다. 박윤선 또한 같은 설명을 우리에게 준다.
로마 가톨릭교는 일찍부터 성례에 과도한 뜻을 붙여 내려오다가 트렌트 회의에 이르러는 성례에서 모든 의가 시작되며 증가되며 회복된다고까지 말했으며, 그것을 받을 소원이 없이는 칭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 그러나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이 없이는 칭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며, 이 연합은 오직 신앙이 가져온다고 말하였다.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성례를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칭의를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개혁자들이 성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은혜의 방편으로 본다.
박윤선 박사는 죄인이 의롭다함의 은혜를 입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한 것이며 이 연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됨으로써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를 받게 되는 칭의의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로마서 6장의 강해 가운데에도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 확인이 된다. “이것은(=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고백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된 때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효와 및 그의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계약원리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고 이신칭의의 원리는 포도나무가지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더욱 심화되어 간다. 이 영적 사실에 대하여 박윤선 박사는 그의 주석에서 요한복음 15장을 강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핫지(Charles Hodge)를 인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그 연합(=포도나무 가지로 비유된 교회와 예수님의 연합)은 하나님의 단독적 역사를 기초로 함. 다시 말하면, 그 연합의 근원은, 신자들이 영원 전에 선택을 받아(16절) 신약 시대에 복음으로 칭의(偁義)된 사실이다(3절). ... 핫지(Charles Hodge)도 말하기를, “이 연합은 신비로우며 초자연적이고 대신 원리의 것이요 생명있는 것이다. 이 연합에 의하여 우리는 창세 전에 그의 안에 있었고(엡 1:4),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던 것처럼 그의 안에 있고(롬 5:12, 21; 고전 15:22), 우리와 그와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요(엡 1:23, 4:15; 고전 12:12, 27), 우리가 그에게 관계된 것이, 포도나무에게 대한 가지의 관계와 같다(요 15:1-12). 이 연합에 의하면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이 되어졌고(갈 2:20), 우리는 그와 함께 다시 살았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았다(엡 2:1-6). 이 연합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정도에서 그와 같아졌으며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의 하신 것이 우리의 것이 되었으니 만큼, 그의 의(義)가 우리의 것이며, 그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며, 그의 높아짐이 우리의 높아짐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Systematic Theology, III. 1985, p. 127).
여기서 박윤선 박사는 하나님의 영원 전의 선택과 복음으로 인한 칭의에 근원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 성경의 비유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계시되고 있음을 말하면서 이 연합으로 인하여 신자가 누리는 은택들을 열거한다. 박윤선 박사의 설명은 핫지의 것을 인용한 것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은택을 죽음과 생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것이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된 것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박윤선 박사는 거룩한 삶의 실행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까? 박윤선 박사는 성화론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바빙크(Herman Bavinck)를 인용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한다.
옛날부터 오늘까지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은 신자의 성화작업을 위해 역사하여 오셨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를 들면 ...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화됨. 
바빙크는 이 성화의 방법을 중요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수님은 성화 작업에 자기 자신을 주체로 하시고 자기와 신자들을 영적으로 또는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계신다. 신비적 연합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본질적 연합도 아니고 단지 심리적(감정, 의지, 목적) 일치도 아니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계심이며,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다. 그것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연합과 같고(요 15장), 머리와 지체들의 연합(롬 12:4; 고전 12:12; 엡 1:23; 4:15), 부부의 연합(고전 6:16-17; 엡 5:32), 모퉁이 돌과 건물의 연합(고전 3:11,16; 6:19; 엡 2:20-21; 벧전 2:4-5)과도 같은 것이다. 이 내용이 구원계약에서 성립되어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현이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하여 앞서 본 바와 같이 핫지를 인용하였던 박윤선 박사는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또한 바빙크를 인용하여 설명을 한다. 전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의 관계를 말하기 위한 것인 반면에, 후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화의 측면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바빙크를 인용하며 박윤선 박사는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마음 속에 계시며,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임을 말한다. 
결국 박윤선 박사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하며, 아울러 그러한 자는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로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며 신자의 거룩함을 이루어 간다고 말한다. 거룩함을 이루는 행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일과 함께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로 인한 것이며 따라서 믿음과 행함은 필연적으로 비분리적인 관계를 갖는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이해는 칼빈과 같으며, 또한 바빙크와 핫지 등과도 동일하다. 그는 역사적 개혁신학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거룩함의 행함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 칼빈을 비롯한 개혁신학의 이해이다. 결국 행함이라는 열매가 뒤따르지 아니하는 믿음이란 개혁신학에 있어서 처음부터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구원받기에 합당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를 맺는다. 구원받기에 합당한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며, 따라서 선행은 믿음의 증거이며 열매이다. 이와 관련한 박윤선 박사의 이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트렌트 회의는 지식적 승인(assensus)을 신앙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신앙을 가리켜 신뢰(fiducia)라고 하여 의지 행동으로 보았다(롬 4:20). 따라서 거기에는 실제적인 행위의 열매가 맺힐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의 트렌트 회의는 그런 실제적 열매가 없어도 신앙 그것이 존속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천주교회가 말하는 ‘사랑의 행위가 결핍된 미형성된 믿음(fides informata)’이란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박윤선 박사에게 있어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단순한 지식적 동의가 아니라 열매를 맺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주교회에서 말하는 바를 따르면 박윤선 박사가 생각하는 구원에 합당한 믿음은 형성된 믿음(fides formata)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천주교회가 이 말을 사랑이라는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말고 같은 의미로 사용을 한다는 점에 대해서 박윤선 박사는 단호히 거부를 한다. 박윤선 박사에게 있어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칭의의 믿음이 항상 다른 구원의 은혜들과 함께 역사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다음의 글을 보자.
이것은(=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신앙의 특징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진정한 신앙의 소유자는 사랑의 행위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사랑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신자가 그 신앙의 증표로 사랑을 지니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행위는 믿음이 내어주는 열매이니, 선한 행위가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약 2:21-26). 물론 사랑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는 아니지만 참 신앙은 그것을 지니고 있다. 신앙 그것도 구원의 공로는 아니다. 구원의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뿐이다. 이 보혈 공로를 받는데 있어서 믿음은 절대 필요한 것이다.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박윤선 박사는 사랑의 열매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믿음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그 강조를 잘못 이해하여 사랑의 행위가 구원을 이루기 위한 공로가 된다거나 혹은 사랑을 행하는 믿음이 구원의 공로가 된다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주의를 요청한다. 구원의 공로는 믿음 자체도 아니며 사랑은 더더구나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뿐임을 거듭 강조한다. 그러한 강조가 필요할 만큼 믿음은 분명하게 믿음의 증표로 사랑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사랑으로써 역사한다는 것은 믿음의 특징을 보여주는 말씀이지 사랑이 곧 믿음이라는 뜻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과 거룩함을 이루는 행함의 관계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표현을 통해 보는 것처럼 비분리적인 연결을 갖는다. 이것은 앞서 튜레틴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영적 특성과 더불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기원과 실행 그리고 목적성 등을 고려할 때 더욱 더 그러하다. 박윤선 박사는 이 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은혜언약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 이 계약(=은혜계약)은 은혜로운 것이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담보하시는 구주를 주시어 이 약속이 실현되게 하신 까닭이고, 또한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의 언약 관계의 책임을 실행케 하시는 까닭이다. 
(2) 이 계약은 삼위일체적이라고 함이 옳다. 그 이유는 이 계약 체제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시어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님께서는 그 이루신 구원을 각인에게 시행하시는 까닭이다(요 1:16; 엡 2:8; 벧전 1:2) ...
박윤선 박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은혜언약의 주체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은혜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루시고 의를 담보하여 주신다는 사실에 있으며, 또한 은혜언약 관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은혜의 근거를 각 사람에게 시행을 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자체가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신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또한 언약관계의 책임을 다하여 거룩한 삶의 순종을 하도록 실행을 하시는 분이시므로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거룩한 순종을 이루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 박윤선 박사의 이해이며, 또한 개혁신학의 이해이다.
4. 믿음과 행함에 관한 박윤선 박사의 주석적 설명에 대한 정훈택 교수의 비판
정훈택 교수는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의 제목을 달은 여섯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에서 그는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말과 행위에 어떤 구원론적 가치도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오랜 동안 삶의 문제, 윤리 문제를 기독교 진리의 핵심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을 한다. 한국교회는 신자들에게 “자신의 행동,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윤리적인 행위, 윤리 의식의 변화 없이도 기독교인으로 불리울 수 있었고, 참된 기독교인으로 천국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큰 잘못을 범해 왔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오류를 왜 범하게 되었으며, 그 책임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정훈택 교수는 이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찾아 한국교회의 변화와 개혁의 길을 도모하기를 원한다. 
정훈택 교수가 보여주는 이러한 문제의식과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본 논문과 동일한 출발선에 서 있다. 그런데 처방에 있어서는 완전히 대립하는 견해 차이를 보인다. 본 논문은 박윤선 박사를 배우는 것이 한 가지 답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에게 문제의 책임이 있으며 그를 극복하는 것이 답이라고 주장한다. 정훈택 교수는 비판하기를 박윤선 박사가 한국교회에 대해 그가 갖고는 신학적이며 목회적 영향력이 실로 심대한 만큼, 한국교회가 행위의 구원론적 가치를 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과오를 범한 것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책임 또한 실로 중대하다고 한다. 그러면 정훈택 교수가 박윤선 박사에 대해 말하는 비판이 어떠한지를 살피도록 한다. 
이신칭의에 치우친 성경 해석의 오류?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성경의 본문의 해석을 이신칭의라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몰아부친 오류를 범하였다고 강하게 비판을 한다. 그 비판은 박윤선 박사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성경해석의 방법론을 따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신학적 틀”을 성경에서 증명해 내고자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본문에 신학적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주관적 해석”이었다고 소리를 높였다. “성경을 더 이상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해석자의 해석과 그 해석의 배후에 있는 해석자의 신학사상을 의존하게 된 것, 이것이 박윤선 박사의 주석과 설교에서 발견되는 치명적인 약점이며 동시에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지적을 한다. 
정훈택 교수가 지적하는 박윤선 박사의 주석과 설교에서 나타나는 본문을 지배하는 신학사상은 바로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나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명제로 집중이 되는 구원론이다. 
율법의 완성, (구약)계명들의 유효성 및 영원성, 윤리적 규범, 인간의 행위 등이 언급되거나 강조된 듯이 보이는 구절들을 주석할 때, 그는 거의 항상 이신칭의나 이신득의의 관점에서 조화시키려 하고, 행위구원, 율법주의, 도덕주의를 비판하곤 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구원론을 계시하셨다는 전제 하에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말하는 부분을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란 명제와의 관련성 안에서 해명하기에 부단히 노력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직 믿음으로”란 명제가 삶을 인도하고 바른 행동을 명령하는 모든 구절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이처럼 행함이 강조되는 구절조차도 “거의 항상 이신칭의나 이신득의의 관점에서” 풀어가는 성경해석은 결과적으로 올바른 삶과 순종의 요구를 관심 밖으로 밀어내게 된다. 정훈택 교수는 그러한 예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박윤선 박사의 산상수훈 주석을 지목한다. 산상설교의 핵심은 행위와 삶의 강조에 있는데, 박윤선 박사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도 명백하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치셨다”고 결론을 짓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오류 때문에 “한국교회가 윤리적 과제와 책임, 목표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우왕좌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정훈택 교수의 판단이다. 아울러 이러한 경향은 칼빈주의와 루터주의의 혼동의 결과이며, 겉으로는 칼빈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사실은 지극히 루터주의적인 방식에 갇혀버린 한계성을 갖는다고 비판을 한다.
믿음과 행함에 관한 박윤석 주석들에 대한 비판
본문을 구체적으로 다루어가면서 정훈택 교수가 박윤선 박사를 비판한 내용을 따라가면 박윤선 박사는 본문이 명확하게 행위의 순종을 강조할 때에 그 본문을 순종해야할 직접적인 명령으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박윤선 박사는 이 명령의 참된 뜻은 순종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몽학선생의 기능을 하기 위한 것으로 축소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신칭의의 의미를 돋보이게는 하였지만 행함과 관련한 교훈의 무게는 경시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을 한 것이다. 정훈택 교수가 지적한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팔복에 대한 주석을 언급하면서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팔복의 윤리적 색채를 송두리째 날려버렸다”고 비판을 한다.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네 번째 복에서 칭의가 값없이 주어지는 법정적 선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다섯째 복부터가 의롭게 된 신자가 지켜야 할 윤리적 명령이라고 해석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박윤선 박사는 팔복이 사실상 윤리적 행동이나 삶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구원받은 자에게 해당하는 윤리적 명령으로 제한함으로써, “윤리적 행동이나 그러한 윤리적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일컬어질 위험을 미리 방지하였다”고 지적을 한다. 즉 박윤선 박사는 혹시라도 팔복의 교훈이 도덕의 행함을 공로로 하여 구원을 얻는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렇게 팔복을 두 구분으로 나누어 어떻게 신자가 되며 그 후에 어떻게 신자가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한다고 인위적인 해석을 했다는 것이다. 
빛과 소금의 비유(마 5:13-16)에서 박윤선 박사에서 빛과 소금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행할 책임”을 가리킨다고 말하면서도 그 책임을 윤리적이거나 사회적 책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책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축소했다는 책임을 추궁받는다. 아울러 박윤선 박사가 맛을 잃은 소금은 사람에게 버려져 밝힐 뿐임을 주석하면서 신자가 타락하면 모든 영적 도리와 도덕적 법칙을 확정적으로 떠난다고 하였는데, 이는 행위와 구원이 관계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앞에서 행위와 구원은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하였음으로 인해 신학적 난제에 직면케 되었다고 비판한다.
또한 박윤선 박사는 마태복음 5:17-7:27을 한 묶음으로 엮어 여기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해석하시고 도덕적 표준이 무엇인가를 보이셨지만, 그것은 이것들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실행이 얼마나 높고 어려운지를 깨달아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도록 하는 율법의 몽학선생의 기능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해석을 한 것으로 요약을 한 후에 정훈택 교수는 비판하기를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율법 아래 세워 놓고 그들의 더러움과 부패함, 무기력과 무능력을 깨닫게 하여”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목적 하에 “사람들이 전혀 지킬 수 없는 ‘불가능한 명령’을 제시하셨다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해석은 마치 예수님이 불가능한 명령인 줄을 아시면서도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신 것처럼 위장’을 하셨다는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한다.
정훈택 교수가 보는 박윤선 박사의 심각한 오류 가운데 하나는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나타난다. 20절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하여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에서 박윤선 박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와 “그리스도인의 의”를 질적으로 구분하여 전자는 인간 중심의 자기 의를 말하며 후자는 신 중심의 믿음의 의를 가리킨다고 하며, 사람의 의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는 거듭난 의를 행할 것을 교훈하는 것으로 풀이를 한다. 그런데 정훈택 교수는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께서 애초부터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 의를 비교하신 것이라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말한다. 정훈택에 보기에 20절은 예수님께서 “당시 표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것보다 제자들의 의는 더 나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시며 실제적인 의의 행함을 촉구하시는 말씀인 것뿐이다. 결국 박윤선 박사는 산상수훈이 직접적으로 말하고자 한 선한 삶과 선한 행동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인위적인 해석을 범한 것이 된다.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만들어 낸 인위적인 해석이 결국 기독교인의 삶을 파괴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길이 열린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설명을 이어 오는 동안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님이 그토록 선한 삶과 선한 행동을 강조하셨던 산상설교가 무색해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 박윤선 박사의 구원론적 산상설교 해석은 예수님의 설교와 교훈의 핵심, 행위와 삶에 대한 박차와 강요를 지워버리고 아무도 - 기독교인들 조차도 - 산상설교를 그대로 읽지 않고도 아무 문제없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그런 것이다.
박윤선 박사의 산상설교 해석이 이토록 가혹한 비판을 정훈택에게서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훈택 교수가 보기에 박윤선 박사는 바울서신을 해석학적 도구로 삼아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을 바울서신에 꿰맞추는 식의 해석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즉 바울서신의 이신칭의론에 따라 산상설교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를 구원론적 관점에서 해석을 하며 이것을 위하여 복음서를 희생하는데 방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 결과 행위를 강조하는 본문을 만나면 “행위구원과 믿음구원의 대립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둘의 조화란 관점에서” 본문을 파악했으며, “성경은 결코 행위구원을 말하지 않는다고 결론” 짓는다. “이 과정에서 행위에 대한 본문의 강조점은 점점 사라져 가고 모든 구절이 소위 바울식의 이신칭의 교리를 말하는 구절로 둔갑”하게 되버렸다는 것이 정훈택 교수의 비판의 요지이다.
행함과 믿음이 가장 뚜렷이 결합이 되어 나타나는 본문 가운데 하나가 야고보서 2장 21-24절의 맥락이다. 정훈택 교수의 생각에 야고보서의 논지는 “칭의와 순종의 행위를 결합하여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위가 함께 작동했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다.” 그런데 박윤선 박사는 아브라함에 대한 칭의 선언은 그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순종 사건이 있기 전에 벌써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칭의는 선한 행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며, 이삭을 바친 순종은 아브라함이 받은 칭의를 받은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 이러한 박윤선 박사의 해석에 대하여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이신칭의의 해석 방식에 매어서 이렇듯이 ‘행위’와 ‘칭의’의 결합이 뚜렷한 본문을 ‘행함-칭의’의 관계가 아니라 ‘칭의 - 행함’의 관계로 바꾸어 행함과 칭의의 명백한 관계를 약화시키는 잘못을 범하였다고 비판을 한다. 박윤선 박사의 설명은 야고보서의 주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다. 
계속된 비판에서 정훈택 교수는 22절에서 야고보는 행함과 칭의를 다시 한번 연결하지만 박윤선 박사의 아래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오히려 행함을 칭의와 격리시키고 믿음만을 연결한다고 지적을 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칭의가 그의 행실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믿음이 그의 행실로 완성되었다는 것뿐이다. 칭의는 미완성의 시기가 없다. 그것은 단번에 완성되며 믿음만을 근거하고 선언된다. 그러나 선한 행실을 씨앗과 같이 내포한 그 믿음은 그 선한 행실이 실현될 때에 완성된다.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위의 주석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행함과 칭의를 분리함으로써 24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를 정면으로 반박을 한다고 것이고, 둘째는 박윤선 박사가 말하듯이 믿음이 행실로 완성이 된다면 칭의는 선한 행실을 통해서 완성이 될 때까지는 적용이 될 수 없는 개념이거나, 아니면 칭의도 성화와 같이 믿음의 완성 정도에 따라 점진적으로 지속되는 개념이 되어야 하는 문제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결국 21절에 강조된 행함과 칭의의 결합을 애써 이신칭의로 환원하여 행함을 떼어 놓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설명하려고 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비판을 한다. 
예수님의 직접적인 순종의 교훈이 구원론의 맥락에서 완화되거나 축소되는 예와 관련하여 정훈택 교수는 누가복음 10장 25-37절의 예를 든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을 때, 주님께서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 기록된 바를 되묻고, 그의 대답에 따라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해석을 비판한다. 박윤선 박사는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라고 하신 것은 인간이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 원리를 말씀하신 것도 아니며, 또한 인간이 자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인간은 누구든지 율법을 행할 책임이 있음을 일깨워 그 결과 그로 하여금 자신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임을 절실히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죄책을 깨닫고 회개하여 주님을 신앙하여 영생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 정훈택 교수는 실제로 순종해야할 행위에 대한 강조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약화시키고 있음을 비판한다. 정훈택 교수의 주장은 율법사의 대답, 곧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율법의 대 강령이면서, 바울에 의하면 사랑의 계명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며 요한서신에서도 또한 사랑의 실천이 강조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율법사로 하여금 율법의 교훈에 따라 적극적으로 순종할 것을 교훈하는 바가 강조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듯이 보인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맥락에서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이신칭의의 해석의 틀로 인하여 모순된 해석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먼저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말한다고 해석을 한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는 요한복음을 해석하면서 믿음과 순종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초로 설명을 하기 때문에 이신칭의의 원리에 따른 로마서 6장의 그리스도와 연합의 교리와 통일성을 상실하는 해석을 하고 있다고 지적을 받는다.
그런데 포도나무 비유에는 2절과 6절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 버린다는 심판의 내용이 들어 있는데, 박윤선 박사에게는 이것은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이 확정된 자에게 다시 심판이 있다는 해석의 압박을 주는 부담이 큰 표현이 아닐 수 없다고 정훈택 스스로 풀이를 한다. 그리고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8절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를 주해하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나무와 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다”로 하여, 2절과 6절에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제해버림을 당하거나” 혹은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등의 심판을 당하여야 하지만, 신자의 경우는 다만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의 위협만을 더하고 있다고 지적을 한다. 그 결과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이 퇴색되고 말았다고 비판을 한다. 정훈택 교수가 보기에 박윤선 박사의 이러한 해석은 모순된 것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이신칭의의 해석 원리에 묶여 있는 탓에서 비롯된 것이다. 
믿음과 행위에 관련한 박윤서의 주석들에 대하여 비판을 한 정훈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요약한다. 첫째 박윤선 박사는 성경이 ‘행위’나 ‘삶’을 천국 또는 구원과 직접 연결시키고 있는 부분을 대할 때, 행위구원론에 대한 위기감 때문에 이러한 본문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왜 주님께서 ‘행위’와 ‘천국’을 간접적으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말씀하고 계신가”를 묻고, 성경의 교훈을 진실히 반영하도록 하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직접성을 간접성으로 바꾼 다음에야 겨우 행위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본문을 곡해했다는 비난을 결코 면하기 어렵다.” 둘째 박윤선 박사는 ‘나무-열매’의 관계는 인정하지만 ‘열매-나무’의 관계는 간과하거나 무시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물론 앞서며 인간의 책임과 행위가 하나님의 사역과 은혜를 뒤따른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차원을 넘어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제하여 버리거나 불에 태운다는 구원론적 차원이 누누이 강조되고 있음에도 박윤선 박사의 설명에는 이 부분의 연구와 고려가 결여되어 있다.
5. 믿음과 행함에 관한 칼빈과 박윤선 박사의 성경이해: 정훈택에 대한 비판
박윤선 박사가 믿음과 행함의 성경적 원리에 있어서 성경의 교훈을 곡해하였다는 정훈택 교수의 비판은 정당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하는 한 가지 방식은 정훈택 교수가 성경을 곡해하였다는 성경 본문을 살펴서 어느 쪽이 잘못 이해를 하고 있는 지를 판단하는 성경 주석학적 노력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제 3자의 견해도 하나의 견해로 그칠 수 있어서 항상 만족스러운 결론을 내려주지는 못한다. 본 글에서는 정훈택 교수가 박윤선 박사를 비판한 성경 구절들에 대한 칼빈의 주석들을 살피면서 과연 박윤선 박사가 믿음과 행함에 관하여 이신칭의라는 구원론적 틀 속으로 성경본문의 의미를 무리하게 밀어 넣었는지를 판단하고자 한다. 만일 칼빈의 주석이 박윤선 박사의 것과 본질상 동일한 교훈을 주고 있다면, 정훈택 교수가 비판한 박윤선 박사의 문제는 박윤선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개혁신학 자체의 문제가 된다. 만일 그렇다면 정훈택 교수는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개혁신학과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는 셈이 된다. 정훈택 교수가 옳은지 아니면 개혁신학의 이해가 옳은지는 성경의 본문 연구를 통하여 판단될 문제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박윤선 박사를 가리켜 성경을 곡해하여 믿음과 행함에 관한 구원론적 교훈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정훈택 교수의 비판은 많은 지지를 확보하기가 어려울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팔복을 주석하면서 팔복을 임의로 전반부 네 구절과 후반부 네 구절로 나누고, 팔복으로 제시된 윤리적 행동이 구원받은 자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을 함으로써 그러한 윤리적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을 복되다 일컬을 수 없도록 하였다고 비판을 하였다. 비판의 초점은 팔복의 구분에 있기 보다는 팔복의 윤리적 행동을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증거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데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정훈택 교수의 이러한 비판이 성립되려면 팔복의 교훈은 팔복을 행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즉 팔복은 구원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어야 한다. 만일 그와는 달리 팔복의 교훈은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영적 열매나 증거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정훈택 교수의 비판은 의미를 갖는다. 칼빈은 박윤선 박사와 함께 팔복의 교훈은 팔복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수고의 보상으로 천국이 주어질 것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의 복은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다윗의 말을 우리에게 역설한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롬 4:7-8 참조). 만일 어떤 자가 마치 복이 행위 때문에 주어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많은 구절들을 제시한다고 해보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 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 14:21),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시 1:1), “시험을 참는 자”(약 1:12), “공의를 지키는 자들”(시 106:3),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시 119:1), “심령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마 5:3,5,7) 등. 하지만 이러한 말들은 바울이 말한 진리를 부인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어떤 칭찬받을 만한 특성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아 비참함에서 놓임을 받지 못한다면 항상 비참한 상태에 있게 된다. 성경에서 높이 칭찬하는 모든 복들도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복을 받기 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죄 용서를 받음으로 복을 얻은 후에야 다른 복들도 제 자리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죄 용서로 얻는 복이야말로 최고의 또 가장 중요한 복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복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팔복을 비롯하여 성경에 기록된 어떤 복도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있으며, 어떤 복도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에 부족하며, 따라서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 얻는 복이 가장 중요하며 으뜸이 되는 복이라는 칼빈의 설명은 산상수훈의 팔복 또한 죄 용서를 전제로 하여 누리는 복임을 말하여 준다. 정훈택 교수의 생각과는 달리 팔복은 구원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일 수가 없다. 
정훈택 교수는 빛과 소금의 비유에서 박윤선 박사가 빛과 소금이 가리키는 신자의 책임을 풀이함에 있어서 윤리적이며 사회적인 면을 축소시키고 단지 복음을 바르게 가르치고 전하는 책임에 국한하였다고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칼빈도 같은 취지의 말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세상의 소금”이라 부르시는 것은 세상에 소금을 쳐서 맛을 내는 것이 그들의 직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늘의 가르침이라는 소금으로 맛을 내지 않으면, 사람들 속에는 맛없고 무미건조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소금과 빛은 사도들에게 위탁되어진 복음의 말씀이다. 따라서 소금과 빛의 책무는 복음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는 박윤선 박사의 주석은 칼빈의 것과 일치한다. 맛을 잃은 소금은 부패하여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에 합당치 않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정훈택 교수는 맛을 잃은 소금을 가리켜 박윤선 박사가 신자가 타락하여 모든 영적 도리와 도덕적 법칙을 확정적으로 떠난다고 주석한 것은 행위 때문에 구원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뜻하므로 이신칭의를 말하며 행위가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말한 것과 모순이 된다고 비판을 한다. 하지만 신자가 타락하여 구원을 잃을 수가 있다고 하여 신자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은 각각 별개의 문제이다. 전자는 성도의 견인의 문제이며 후자는 이신칭의의 문제이다.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마태복음 5장 17절이하의 산상수훈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기를 율법의 바른 해석에 따른 도덕적 표준이 무엇인지를 보이면서 그 율법을 실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하여 결국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도록 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고 지적한다. 그의 생각에 그렇다면 박윤선 박사의 해설은 예수님이 사실상 불가능한 명령을 행하라고 주신 것이 되기 때문에 잘못된 해설이라고 비판을 하였다. 과연 그런가? 칼빈도 또한 박윤선 박사와 같이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거룩한 삶의 규범으로 제시하신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다만 우리가 연약함으로 율법의 표준에 이르지 못함을 말한다. 
거룩한 삶의 규범이라는 측면에서, 율법은 사람들을 의의 최종 목표 지점 또는 가장 높은 지점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이 그 자체로 “연약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롬 8:3).
칼빈은 율법이 가리키는 최종 목표 지점 또는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는 일은 연약한 육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임을 로마서 8장 3절을 들어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것의 답은 바로 다음 절에 이어져 나온다. 이것은 육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롬 8:4)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인식은 박윤선 박사가 말하기를 “이 율법 앞에서는 누구든지 제 힘을 믿을 수 없어 탄식하기를, ‘오- 그리스도여 나의 대신이 되소서 나는 주님만 의지하나이다’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고 한 것과 동일한 선상에 있는 것이다. 
정훈택 교수는 율법의 기능이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고 해서, 신자가 행하여야 할 거룩한 삶의 규범으로서 기능이 부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는 듯이 여겨진다. 박윤선 박사가나 칼빈이나 산상수훈에서 해설이 된 율법의 거룩한 삶의 규범이 육신이 연약한 죄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죄인됨을 자각케 하지만 또한 동시에 성도가 마땅히 살아야 할 표준적인 규범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박윤선 박사는 칼빈과 다를 바가 없다. 박윤선 박사는 산상수훈이 율법에 말하는 탁월한 도덕적 표준을 밝혀준다고 말하며 그 표준대로 힘써 행하여 할 것을 주석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강조한다. 박윤선 박사의 주석 속에는 산상수훈도덕적 표준이 너무 높으니 이는 지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고 해설한 구절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해석이 얼마나 잘못된 해석인가를 대조하여 밝혀주고 높은 도덕적 표준에 따라 순종해야할 의무와 적용적 교훈을 서술해주고 있다. 그러나 칼빈이나 박윤선 박사가나 산상수훈의 교훈이 그 교훈을 행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태복음 5장 20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에 있어서 박윤선 박사는 칼빈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해석을 취한다. 박윤선 박사에게 있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인본주의적이며 외식이며 실질에 있어서는 불의요 죄악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란 오직 율법의 외적인 의무에만 국한된 외식과 위선일 뿐이며 거짓 의기에 사악한 것이었다. 반면에 이것들보다 더 나은 의란 박윤선 박사에게 있어서는 서기관들의 의와는 본질상 다른 새로운 의이며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의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율법의 순수한 형태로 회복된 의이다. 즉 박윤선 박사와 칼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서로 다른 종류의 의인 것이지, 정훈택 교수가 생각하듯이 같은 종류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행한 것보다 더욱 더 많이 행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말함도 아니다.
야고보서 2장 21-24절의 박윤선 박사의 주석에 대한 정훈택 교수의 비판은 칼빈에 의해서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한다. 칼빈은 박윤선 박사가 그러한 것처럼 아브람이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시점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시점보다 훨씬 이전인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왜 야고보서는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하는가를 자문하고 칼빈은 답하기를 우선 이것은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믿음으로 인한 의의 전가를 받았다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참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순종과 선행으로 그 의를 증거함으로 그가 의로운 자임을 인정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행함의 증거를 통하여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임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따라서 칼빈과 박윤선 박사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믿음만이 아니라 이삭을 재물로 바친 것과 같은 행위가 함께 작용을 했다는 정훈택 교수의 주장은 전혀 동의를 받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야고보서는 칭의가 믿음과 더불어 행함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선한 행실을 낳는 믿음으로 칭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행함-칭의’를 ‘칭의-행함’으로 바꾸어행함과 칭의의 관계를 약화시켰다고 비판하지만, 칼빈과 박윤선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23절에 “아브라함이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믿음-칭의’가 전제되면서, 후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순종으로 인하여 ‘믿음-칭의-행함’의 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 박윤선 박사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순종을 통해서 믿음이 완성되었다는 말을 할 때 그것은 믿음이 순종을 통하여 인정을 받게 될만큼 성숙되었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며,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의 본질에 있어서는 여전히 동일한 한 가지 믿음일 뿐이다. 따라서 박윤선 박사를 비판하면서 말한 믿음에 의한 칭의도 결국 완성으로 나가는 점진성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믿음이 완성될 때까지는 칭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정훈택 교수의 주장은 칼빈이나 박윤선 박사에 의해 인정받기 어렵다. 
정훈택 교수는 누가복음 10장 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그 비유가 도입이 되는 첫 머리에 율법사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자 주님께서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심으로써 율법의 대 강령을 제시한 것으로 인해 박윤선 박사가 당황했을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단언한다. 정훈택 교수의 말대로라면 칼빈도 당황했을 것이다. 박윤선 박사의 인용에 담긴 해석은 칼빈의 해석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도 박윤선도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칼빈과 박윤선 박사를 각각 인용해 보기로 하자.
이 서기관은 그리스도에게서 자기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을 듣는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것과 다른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규범을 제시하신 것이 전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가장 온전한 의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에게 주어진 질문에 맞춰서 구원을 얻는 것에 관하여서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 율법에는 사람이 어떤 규범을 따라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지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율법은 오직 “정죄”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망의 가르침이라 불리고, 따라서 바울은 율법이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게”(롬 7:13)하는 역할만을 할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것들은 율법의 가르침 자체에 어떤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율법이 명하는 것을 우리가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일 뿐이다. ...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먼저 행위의 의를 요구하시고, 다음으로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의를 제시하시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정죄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 두 종류의 의를 우리 앞에 제시하고서, 우리 자신에게는 의가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의를 덧입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롬 10:5-6).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이 서기관들의 질문에 맞춰서 대답을 해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서기관은 어디에서 구원을 찾아야 하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들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야 하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칼빈의 요점은 이러하다: 주님께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서기관의 질문에 맞추어서 주신 답이다. 그 답은 실제로 율법에는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떠한 규범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율법은 우리의 무능력 때문에 오직 죄를 죄로 들어나게 하는 역할만을 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율법을 지켜 행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먼저 행위의 의가 제시되고 난 뒤에 다음으로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의가 제시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성은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가 정죄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님께서 “행하면 살리라”고 하신 것은 서기관들의 질문에 맞추어 답을 주신 것이다. 
이제 박윤선 박사의 해설을 인용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율법사는, 바리새교의 율법관에 기초한 영생의 도리를 물음에 있어서, 은혜로 되는 길을 알지도 못하였고, 다만 행위의 값으로 얻는 길을 물은 것이다. 이런 물음에 있어서 예수님도 행위의 길로써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율법관은 위에 말한 율법사의 그것과 다르다. 그가 율법의 원리대로 대답하심은, 인간이 율법을 행한 값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며, 혹은 인간이 자력으로 완전히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은 누구나 율법을 행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는 그 율법사더러 율법을 행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하여 책임감이 없는 자는 죄감이 없고, 죄감이 없으면 회개가 없고, 회개가 없으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사죄에 대한 신앙이 없다. 신앙이 없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만한 질문자인 율법사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할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율법을 못 지키는 죄인이라는 것을 또한 절실히 체험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그는 은혜로 받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더러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다.
박윤선 박사의 요점은 이러하다: 주님께서“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사가 행위의 값으로 얻는 길을 물은 질문에 맞추어 주신 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무능력 때문에 율법사가 율법을 행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율법을 지켜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을 주신 것은 율법에 대한 책임감을 각성케 하고, 그런 후에 죄감을 얻고, 그리고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사죄의 약속을 바라며 나오는 믿음을 권하시기 위함이다. 율법사는 먼저 자신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는 죄인임을 절실히 체험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은혜로 받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율법사의 바리새교 율법관에 맞추어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답을 주신 것이다. 
칼빈도 박윤선 박사도 둘 다 율법의 정죄 기능과 몽학선생의 기능을 본문에서 살피고 있으며 그것이 율법사에게 주신 주님의 대답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임을 밝히고 있다.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와도 어긋나며 또한 칼빈과도 어긋나고 있다. “행하면 살리라”는 박윤선 박사에게만 영생의 길이 아닌 것이 아니라 칼빈에게도 영생의 길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박윤선 박사가나 칼빈이나 본문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떤 전제조건으로서의 행함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한 가지 사례만 더 살피고 정훈택 교수의 비판에 대한 검토를 마치도록 하자. 정훈택 교수는 요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에 대한 주석에서 박윤선 박사는 신자는 열매를 맺지 못해도 찍힘을 받지는 않고 단지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만 있게 된다고만 말하였음을 지적하면서 비판을 한다. 포도나무 비유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면 나무에서 가지가 끊어진다는 심판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담고 있지만, 박윤선 박사는 포도나무 비유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여, 이들은 끊어지지 않는 것으로 해석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본래 하시고자 한 말씀이 퇴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훈택 교수가 인용한 박윤선 박사의 설명은 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녀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는 주석을 하면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나무와 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라” 했을 때,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는 신자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8절이 열매를 많이 맺는 자에 대해서 말하는 바에 비추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라는 표현으로 박윤선 박사가 뜻하고자 한 것은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는 신자”를 말함으로 보아야 한다. 즉 성령의 은혜로 행실의 열매를 풍성히 맺지 못하고 전도를 많이 하지 못하는 신자를 뜻하는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그리고 칼빈도 또한 2절과 6절에서 언급이 되고 있는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는 가지란 외식자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를 한다. 이들은 주 안에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밖에 있는 외식자들인 것이다. 따라서 정훈택 교수의 비판은 박윤선 박사의 논지를 바르게 반영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를 향한 자신의 비판이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된다고 밝혔다. 하나는 성경이 ‘행위’나 ‘삶’을 천국 또는 구원과 직접 연결이 되어 있을 때, 행위의 구원론적 가치를 바르게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경에 ‘나무-열매’의 관계뿐만 아니라 ‘열매-나무’의 도식이 구원론 차원에서 거론이 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훈택 교수의 박윤선 박사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박윤선 개인을 넘어 개혁신학 체계를 부정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미 살펴본 바처럼 믿음과 행함에 관하여 박윤선 박사는 칼빈과 본질상 이해를 같이 한다. 개혁신학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 원리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훈택 교수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행함의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를 주장한다. 그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기에 개혁신학에 충실하며 한국교회의 윤리적 미성숙과 부정적인 현상들에 대한 주된 책임의 소재를 박윤선 박사에게 돌리는 것일까? 
정훈택 교수의 신학적 이해: 행위의 구원론적 가치
정훈택 교수는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라고 논문의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라는 말로 그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정훈택 교수는 자신의 글 속에서 믿음을 말하면서 행위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 해석이나 설명을 만나면 ‘행위의 구원론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비판을 한다. 그러면서도 ‘행위의 구원론적 가치’라는 말로 자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거나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 또는 “행위의 구원론적 가치”라는 표현이 표현된 말로써도 이미 뜻이 자명하게 전달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 듯 싶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독자들은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며 그것도 해석을 통해서 나름대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부담을 준다.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 또는 가치”라는 말은 우선적으로 행위가 구원론의 맥락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을 전달한다. 그렇다면 행위가 구원론과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나 가치를 갖는다는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행위가 구원을 결정하는 근거나 공로가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행위가 구원을 받았음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증거나 표지가 된다는 말인가? 이 두 질문은 구원과 관련하여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지에 대한 교리사적 논의의 대립된 두 견해를 반영한다. 전자는 펠라기우스나 세미-펠라기우스적인 이해를 담고 있으며, 후자는 적어도 종교개혁신학의 이유를 말해 준다.
정훈택 교수는 종교개혁자들이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명제를 성경의 핵심사상으로 내세우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결코 행위를 부정하자는 의도를 지닌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예로 정훈택 교수는 개혁신학의 신앙문서들 가운데 제네바 요리문답 126번, 벨직 신앙고백서 24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4번,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2항, 13장 1항, 16장 2항 등을 인용을 하여 제시한다. 이러한 문서들이 성화와 선행에 대해서 밝히고 있는 바를 정리하면서 정훈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내용들을 제시한다. “선한 일들을 행함이 없이 의롭게 만드는 ... 믿음이 있을 수 없다.” “의롭다하는 믿음이 사람들을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 무관심하게 만들 것이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이식된 사람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죽은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역사한다.” “이런 성결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진 선행들은 생명있는 신앙의 열매요 또한 증표이다.”
이어서 정훈택 교수는 박형룡 박사의 글을 인용한다. 그 일부만 옮기면 이러하다. “진정한 신앙은 선행에서 그 자체를 나타낼 것이니 선행은 사람들 앞에서 이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의 의(생명의 의)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다.” “성화와 칭의는 분리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어서 둘은 다 같이 근본적이다.” “고의적으로 죄의 행습을 계속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선행은 칭의받는 신자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활에 성화의 과실로서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 아울러 장로교 헌법 “III 정치, 제 1장 원리, 제 4조 진리와 행위의 관계”를 인용하여 제시한다. 그 일부는 이러하다. “신앙과 행위는 연락하고 진리와 본분은 서로 결탁되어 나누지 못할 것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리를 연구하거나 선택할 필요가 없다.”
정훈택 교수는 개혁신학 신앙고백서와 한국 교회의 개혁신학자 박형룡 박사, 그리고 장로교 헌법이 성화와 선행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을 발췌하여 나열한 후에 말하기를 비록 “구원론적이라는 단어를 채용하지는 않았지만 행위(삶)의 구원론적 가치를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한국(보수주의)교회는 받아들인 신앙고백서와 신학이론을 통해 인간의 행위에 관한 깊은 기독교적 진리를 전수받아 소유하고 있었다. 이 행위에는 위에서 살펴본대로 중대한 구원론적인 의의와 가치가 있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즉 교회가 역사상의 한 시점에서 주어진 현실에 대응하며 교회로 존속하거나 기독교인이 사회에서 그 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이 교리를 제대로 설득하거나 소화하거나 발휘하지 못했다.
정훈택 교수가 이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 살펴본 것들은 개혁신앙 고백서, 박형룡 박사 등의 긍휼에 관한 글들이다. 정훈택 교수는 말하기를, 이러한 글들을 살필 때 개혁신학은 중대한 구원론적인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다만 한국교회가 “이 교리를 제대로 설득하거나 소화하거나 발휘하지 못했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정훈택 교수가 말하는 행위의 구원론적 의의나 가치는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바처럼 행위는 의롭게 만드는 믿음은 선행을 필연적으로 결과하며, 선행은 믿음의 필연적인 감사의 열매이며 또한 증표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고의적으로 죄의 행습을 계속하며 성화의 과실을 맺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강조를 더하고자 하는 듯이 여겨진다. 
만일 그렇다면 정훈택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박윤선 박사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를 비판할 아무런 신학적 이유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로 정훈택 교수가 박윤선 박사에 대해 계속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정훈택 교수는 자신이 요약한 개혁신학의 교훈, 또는 박윤선 박사의 이해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행위의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정훈택 교수는 행위가 구원을 결정하는 근거나 공로가 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정훈택 교수는 종교개혁신학의 이유를 포기하고자 하는 것인가?
정훈택 교수가 믿음과 행위에 관한 개혁신학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만일 믿음으로만 구원이 확정이 된다면 누구도 윤리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윤리적 범죄는 상급 없음 내지 현세적 심판, 부끄러운 구원으로 마감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천국에서의 큰 상급을 약속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선을 행함이나 악을 행함은 천국이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해야 한다. 천국행이 한 번 결정된 다음에는 그 무엇도 이 약속을 흔들지 못한다. 이러한 체계에서 누구도 윤리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한국교회사는 믿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동시에 주어지는 칭의의 의가 강조되면 강조될 수록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기독교적 삶을 위협하는 현실 앞에서 맥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음을 증거한다. ... 맥이 빠지고 약해지며 그럭저럭 살아가도 어떻게든 천국에는 이를 수 있다는 나약함과 나태함이 창조적이어야할 그들의 구속받은 삶을 지배했다. 더구나 행위의 강조점까지 이런 방식으로 “칭의”와의 관련성 속에서 설명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기독교인들의 바른 삶의 원동력을 되찾아 올 수 있겠는가?
정훈택 교수는 ‘칭의’의 의를 강조하며 천국행이 보장이 된다면 윤리적 순종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이 단지 상급의 크고 작음과 관계가 될 뿐이며, 그렇다면 아무도 윤리적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며, 기독교인들의 바른 삶의 원동력은 찾을 길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을 한다. 이와 같은 정훈택 교수의 생각은 너무가 강력하여 개혁신학이 그에게는 아무런 답이 되지를 못한다.
예를 들어 정훈택 교수는 신자들에게 윤리적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개혁신학의 설명의 한 예로 박윤선 박사를 언급하며 비판을 한다. 그는 박윤선 박사가 믿는 자들의 윤리적 원동력으로서 삶을 개혁하는 힘인 성령을 말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박윤선 박사의 답이 결코 문제해결의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단언을 한다. 
이 가능성(=윤리실행의 가능성)을 우리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선택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박윤선 박사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필연성의 것으로 본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행동으로서의 “의”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 반대개념인 범죄의 가능성도 인정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의의 가능성과 죄의 가능성이 동시에 다 열려 있다면 그리고 이것이 천국 안에서의 상급의 유무나 상급의 대소 문제로 귀착된다면 이 또한 기독교인의 삶을 침체의 늪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이것은 기독교적 새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되기는 커녕 바로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인의 게으름을 조장하는 원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필연적으로 의롤 행하고 죄를 피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앞에서 여러번 지적했던 것처럼 믿는 자들을 바르게 살도록 만드는 힘은 이런 해석에서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그리고 안일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정훈택 교수의 생각에 선행의 필연성이 단지 신자의 편에서 선택적인 문제가 될 때, 그리고 그 선택의 문제가 천국 안에서의 상급의 크고 작음 또는 상급의 유무를 결정하는 데에 관계가 될 따름이라면 결코 윤리적 삶의 원동력이 나오지를 못한다.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나태하며 수동적이며 피동적으로 안일하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원흉이 될 따름이다. 
그렇다면 정훈택 교수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행위가 구원의 결정에 어떠한 의미에서이건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윤리적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정훈택 교수는 스스로 자신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복음이나 십자가의 은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성경에서 강조하는 윤리적 삶의 실천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에 있다고 한다. 정훈택 자신이 제시하는 한 가지 해결 방안은 미래의 천국이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행위에 부여하는 것이다. 
미래의 천국과 관련하여 행위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구원의 선물을 의미하는 천국의 현재성과 관련하여 행위는 이미 얻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결과, 열매, 증거, 표식 혹은 하나님의 통치의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정훈택 교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이라는 구별된 두 개념에 있어서 행위의 의의와 가치를 각각 부여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관련하여서 행위는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결과인 “열매, 증거, 표식”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관련하여서 행위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관련하여 신자의 윤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통치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열매이므로 이때의 천국과 윤리는 뿌리와 열매, 혹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행위는 이미 받은 천국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즉 이미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며,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관련하여서는 사뭇 행위의 의의와 가치가 달라진다. 그것은 행위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구원론적 전제조건이라는 어마어마한 무게를 갖는다. 
아직도 천국의 완성이 남아 있는 현 시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보상, 영원한 축복의 역할을 한다.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행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반대로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행위에 대한 약속이며 보상이며 또한 축복이다. 말하자면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신자들은 이미 받은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결과로 행위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러한 행위들이 오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이 된다는 설명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의 전제 조건이며,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의 약속이며 보상이며 축복인 셈이다. 이러한 정훈택 교수의 설명은 그가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의 점진성에 따른다. 
하나님은 천국을 단번에 이루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서서히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 점진적 발전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소유하게 하셨다. 인간의 삶은 - 그것이 윤리적인 성질의 것이라 하더라도 - 천국을 성장케 하는 도구 즉 천국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게 하는 하나님의 방편이 된다. 역사의 종국에 천국과 천국에 얽힌 하나님의 축복은 윤리적 삶을 제대로 산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윤리적 삶에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충분히 발휘한 사람에게 덧붙여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주어지는 현재의 하나님 나라와는 다르게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윤리적 삶을 제대로 산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믿음으로 현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이루는 방편으로써 윤리적 삶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을 때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보상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전제조건으로서의 윤리적 삶은 현재의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발전되어가는 과정 중에 누리는 은총에 대한 체험이며 소유이므로 결국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 속한 믿음의 사람들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행함의 사람들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정훈택 교수의 답이 긍정적이라면 그의 설명은 개혁신학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박윤선 박사에 대한 날선 비판도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부정적이라면 심각한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매우 위태롭게도 정훈택 교수의 답은 후자인 듯하다. 
미래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윤리의 목표로 제시되었다. 현재의 아들다운 행동과 미래의 하나님의 아들됨도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윤리가 하나님의 아들직,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종말론적 선물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 출발점, 원동력으로 제시되었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현재 윤리적 삶을 조건으로 하여 다시 주어진다고 약속되었다. ... 윤리의 이 양면성을 이해하는 열쇠는 첫째, 인간은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존재한다는 것, 둘째, 삶을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 과거는 다시는 고쳐질 수 없기에 회개와 감사는 회상으로 나타난다. 미래는 아직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도 실망이나 후회도 적용될 수 없다. 미래를 미리 감사하거나 미리 후회 혹은 회개하는 것은 인간의 종교적 자만을 낳거나 포기. 나태함 혹은 방종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를 창조적으로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 미래의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그것은 아직 죄도 의도 아니다. ... 미래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리에게는 아직 없는 것이다. ... 그것은 조건으로든 전제로든 삶의 영역에서는 현재의 것이 되기까지는 없는 것, 즉 허상이기 때문이다.
정훈택 교수가 말하는 바는 이렇게 이해된다. 첫째, 미래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에 하나님의 아들다운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원리는 필연적이다. 즉 현재의 선한 행위가 없이는 미래의 아들됨도 없다. 둘째, 현재의 선한 행동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져 있다. 셋째, 인간에게 있어서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기 때문에 이미 받은 현재의 은총을 기초로 미래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미리 감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훈택 교수의 이러한 판단은 두 가지 이해와 맞물려 있다. 하나는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산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란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해가는 과정으로 보는 이해이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에게 있어서 미래의 결과란 아직 주어진 것이 아니며 오직 현재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이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결과를 미리 확신하고 현재 나태하거나 방종하는 일을 행해서는 안 되다는 이유가 나타난다. 이것을 바르게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정훈택 자신의 고민, 곧 어떻게 하면 복음이나 십자가의 은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성경에서 강조하는 윤리적 삶의 실천을 도모할 수 있게 하겠는가에 대한 핵심적인 대답이 된다.
미래의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그것은 아직 죄도 의도 아니다. ... 미래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리에게는 아직 없는 것이다. ... 그것은 조건으로든 전제로든 삶의 영역에서는 현재의 것이 되기까지는 없는 것, 즉 허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허상인 조건과 목적, 원인과 결과란 도식은 우리의 삶이 현재를 거쳐 과거로 막 넘어가며 새로운 미래를 현재로 맞아들이려 할 때 가장 힘있고 날카롭게 우리의 삶을 자극할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을 목적으로 삼으면 아무도 나태할 수 없다. 우리의 순간의 선택이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생각하면 자만심에 빠질 수 없고 또 포기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축복을 손에 넣기 위해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현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윤리적 삶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며 또 확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십자가와 그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에게 확장, 고정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윤리적 명령과 이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도 계속 확장되어 간다. 윤리적 삶은 하나님의 통치의 방법이면서 동시에 그 목적이 된다.
정훈택 교수가 찾은 답은 이렇다. 현재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허상인 미래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축복을 받기 위하여서는 현재에도 항상 최선을 다해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한 자극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신칭의로 인한 윤리적 나태와 방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정훈택 교수의 판단이다. 하나님 나라란 본래 이러한 불확실한 미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현재의 윤리적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확장되어가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행위는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행위에 이러한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개혁신학과 근본적인 충돌을 일으킨다. 일찍이 칼빈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의를 얻지만 그 후에는 선행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천주교회의 주장을 거부하였다. 믿음은 의의 시초에 불과하며 그 이후에는 행위가 의를 준다는 생각은 성경의 교훈에 어긋난다. 이 사실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이 점에 대해서 그릇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과연 그들은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며,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가 오직 믿음만으로 받게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단지 순간의 시간에만 적용을 하여, 처음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자가 나중에는 선행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방식에 의하면, 믿음이란 한낱 의의 시작에 불과하며, 의로움 그 자체는 지속적으로 행위를 하느냐에 달려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은 정신이 나간 자이다. 그 많은 세월을 거쳐서 꾸준하게 신실히 준비를 갖춘 천사와 같이 고상한 아브라함조차도 의를 얻기 위하여는 믿음을 의지하러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을 진대 이 땅 가운데 어느 곳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고 인정을 하실 만한 완전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는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는 행함으로 들어간다는 식의 주장은 개혁신학에 의하여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는 것으로 강하게 부정이 되어 온 잘못된 견해이다. 정훈택 교수는 어느 새 슬며시 종교개혁의 신학에서 이탈을 하고 있다. 
물론 개혁신학에 있어서 신자의 윤리는 종말론적으로 천국에 이르기에 합당한 자임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즉 구원받는 참 믿음을 가진 자는 행함을 통하여 자신이 천국에 합당한 자녀임을 말하는 증거를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개혁신학에서도 역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윤리가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정훈택 교수가 말하는 행위에는 그 이상의 의의와 가치가 부여된다. 정훈택에 따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현재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된 신자가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자녀됨에 대해 미리 감사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하나님의 자녀는 불확실한 미래에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해야 할 뿐이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현재의 행함이 미래에 반드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윤리와 미래의 보상 사이의 필연성을 강조한다하더라도 여전히 현재의 행함의 동기는 미래의 결정을 위한 기반이며 근거가 된다. 
개혁신학은 정훈택 교수의 이러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거부를 한다. 무엇보다도 개혁신학에서는 현재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믿음에 합당한 행위의 열매를 맺는 동기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실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개혁신학에서는 현재나 미래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은혜로 인한 것이지, 어떤 의미에서도 보상을 받는 수고나 공로가 아니다. 개혁신학에서의 신자의 윤리는, 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곧 미래의 백성으로 이어져 가기 때문에, 현재나 미래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불러주신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 이외에 다른 어떤 동기나 자극이 갖지 아니한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나중에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음을 말하는 정훈택 교수의 주장은 중세 후기의 세미-펠라기우스적인 구원론에 매우 근접해 있다. 
6. 나가는 말
한국교회가 윤리적으로 좀 더 개혁이 될 수 있을까? 종교적 열심은 있지만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의 증거들은 미약한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곳곳에서 모이는 기관들과 집회 그리고 학회들에서는 회개를 통한 신앙의 질적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와 외침이 나오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경고의 소리는 한국교회가 중세 후기의 타락상에 못지 않게 타락하여, 돈, 권력, 명예, 그리고 차마 드러내 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간음의 죄악들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회개를 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과 더불어 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결국에 성장률의 감소, 더 나아가 절대 교인수마저도 감소하는 추세가 나타나자, 수 몇 년 동안에만도 회개를 외치는 얼마나 많은 집회들이 있었는가? 그러나 한국교회는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 듯하다. 목회자들과 관련한 여러 소식들은 여전히 사회윤리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개인도덕적인 면에서도 부끄럽기만한 일을 여전히 담고 있다.
신학의 문제인가? 아니면 신학을 배우지 못한 탓인가? 그것도 아니면 신학대로 신앙을 행하지 않는 문제인가? 박윤선 박사에게 있어서는 모두가 문제였다. 그는 선교 100주년을 바라보는 1984년에 마치 오늘의 교회를 미리 바라보듯이 교회개혁이라는 거룩한 과제와 올바른 교리의 선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박윤선 박사의 외침은 지금의 한국교회의 문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이 되어온 것임을 말해준다. 한국교회가 숫적 성장을 급격히 경험한 7,80년대에 이미 부패의 양상도 함께 확산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케 한다. 
박윤선 박사는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동력과 가능성을 개혁신학에서 찾았다. 그에게 있어서 개혁신학은 곧 바른신학이었다. 그리고 바른신학의 기초 위에서 바른교회를 이루고, 바른교회를 통해서 성경의 교훈에 합당한 삶을 이루어가는 바른생활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였다. 이 모든 일 가운데 중요한 신학의 원리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과 행함의 관계이며, 또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행함으로 거룩하다함을 이루는 것의 관계이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논문은 박윤선 박사가 과연 개혁신학을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박윤선 박사는 개혁신학에 매우 충실한 개혁신학의 선포자였다. 박윤선 박사의 신학은 개혁신학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지 않고 구별하며,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란 죄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한 의를 덧입는 일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굳건히 함으로써 복음이 전적인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명료하게 가르쳤다. 
그렇다면 박윤선 박사의 개혁신학이 오늘날 한국 교회들의 신앙 모습에 어떠한 변화를 줄 수 있을까? 박윤선 박사는 의롭게 하는 믿음이 거룩하게 하는 행함과 구별이 되지만 분리되는 것이 아니며, 칭의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낳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의롭다함을 받는 자는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거룩함을 이루어 감을 잘 드러냈으며 또한 충분히 강조를 하였다. 그 결과 개혁신학의 믿음이란 결코 입술로만 고백하는 믿음 또는 지식뿐인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결과로 반드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임을 가르쳤다. 
이로써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혁신학에 근거하여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의 세 가지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였던 박윤선 박사는 먼저 개혁신학을 자신의 신학으로 정립하였으며, 아울러 한국교회에 소개하며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충실한 개혁신학자로서의 사역을 이루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왜 박윤선 박사를 다시 읽어야 하며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논문은 박윤선 박사에 대하여 논문이 가지고 있는 판단과는 전혀 다른 비판적인 목소리가 이미 20년전에 있었던 까닭에 이 사실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한국교회에 믿음에 합당한 실천적 선행과 순종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 신학적 책임을 박윤선 박사에게서 찾은 정훈택 교수의 글이었다. 정훈택 교수는 한국교회가 윤리적인 성숙을 이루고 또한 거룩한 변화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신학적 이해는 잘 정립이 되어진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성경해석이 이신칭의에 따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에게 있어서는 행함이란 단지 상급을 위한 것이 되며,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무관하게 된다는 신학 인식에 갇혀서 성경에서 행함과 관련하여 종말론적 긴장이 나타나는 바를 충분히 드러내지도 못하였으며, 또는 본문을 곡해하기까지 하였다고 비판을 하였다. 하지만 논문은 이러한 정훈택 교수의 비판이 박윤선 개인의 신학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칼빈을 비롯한 개혁신학자들의 신학체계를 향한 비판이 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정훈택 교수가 비판한 박윤선 박사의 성경이해는 곧 바로 칼빈의 성경이해와 본질상 같음을 밝혔다.
믿음과 행함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혹은 칭의와 성화를 나무와 뿌리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하여 칭의는 또한 성화와 필연적으로 결합이 되는 이중 은총이라는 개혁신학의 설명도 정훈택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결국에 어떤 행함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후에 요청이 되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선행으로 이끌어갈 윤리적 동력이 약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훈택 교수는 행위에 구원론적 의의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고, 미래의 천국과 관련된 종말론적 의미를 행위에 부여하게 되었다. 그것은 현재의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주어지지만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윤리적 삶을 제대로 산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설명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하더라도 그것이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보장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현재에도 항상 최선을 다해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한 동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 정훈택 교수가 행위의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라는 말로 제안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훈택 교수의 노력은 새로운 시도가 아니었다. 종교개혁 당시에 이미 천주교회에서 초기에는 믿음으로, 나중에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주장을 하였고, 칼빈에 의하여 성경적으로 그릇된 견해인 것으로 결론이 내려진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각이었다. 정훈택 교수의 행위의 구원론적 가치와 의의라는 개념은 슬며시 종교개혁의 축에서 벗어나는 사상인 것이다. 
정훈택 교수의 박윤선 박사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처럼 잘못된 신학적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박윤선 박사가 믿음과 행함에 대한 성경적 고려를 충분히 그리고 진실하게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 또한 신학적으로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정훈택 교수가 옳으면 박윤선뿐만이 아니라 개혁신학이 잘못된 것이며, 반대로 박윤선 박사와 개혁신학이 옳으면 정훈택 교수는 개혁신학에서 이탈하여 틀린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박윤선 박사의 신학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절실히 필요한 신앙의 원리, 곧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믿음은 필연적으로 선행을 열매로 맺으며 칭의는 바로 성화로 연결이 된다는 신학적 기반을 충실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보배로운 영적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