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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철학

구원의 경우들

1. WCF는 9장에 자유의지를 두고 우리가 자의로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유의지의 앞에 언약과 중보자 그리스도를 7-8장으로 두고 10장에 효력있는 부르심을 두었다.
2. 중보자가 앞에 온다는 점에서 이를 전택으로 읽을 수도 있다. 동시에 자유의지를 통해서 누구라도, 곧 택자든지 불택자든지 자의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가 없음을 설명했다.
3. 그리고 10장에서 효과적인 부르심을 두는데, 이 때 부르심은 "말씀과 함께(Cum Verbo)"이뤄진다. 이는 말씀과 성령의 있음과 없음으로 4개의 경우의 수를 만든다.
4.  WCF.10.1.처럼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는 통상적 경우가 있고 WCF.10.3.처럼 성령의 역사는 있으나 말씀이 없는 경우가 있고 WCF10.4.처럼 말씀의 역사는 있으나 성령이 없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말씀도 성령도 없는 불택자, 길가 밭은 효과적 부르심임으로 이 장에서는 논 외다.
5. 이것은 율법을 설명하는 WCF.19.6.의 율법의 기능에서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에 의해서 갈리게 된다. 여기서 WCF가 "택자"와 "불택자"라고 진술하지 않고 "참된 성도(true believers)"와 "다른 사람들(to others)"이라고 진술하는 이유가 있다. 번역에 따라 이를 "불신자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의역으로 WCF의 의도를 일부 훼손하는 것이다.
6. WCF.19.6.에서 "참된 성도' 외에 "다른 사람들"이라고 지칭한 이유는 이들 중에 구원얻는 성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율법은 참된 성도들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 이유는 이 법은 삶의 법칙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의무를 알려주며 그에 따라 그들을 지도하고 강제하며 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본성과 마음 및 삶이 죄악으로 오염되었음을 발견케 하며 그로 인해 율법에 의하여 자신을 점검케 하여 더욱 죄를 깨닫고, 죄로 인하여 겸손하게 되며 죄에 대하여 증오하게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와_그의_완전한_순종이 #그들(아직 불신자)에게 절실히 #필요하다는_것을_깨닫게 된다.
7. WCF.9.3에서 자유의지를 진술하면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회개하거나 회개를 위한 준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진술하는데 "준비조차"라는 표현은 이것이 자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있어야 하는 개념임을 시사한다. 이는 준비가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능력으로는 준비를 할 수 없다는 개념이며 다시 말해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8. 그리고 그 준비의 과정을 WCF.19.6.이 보여준다. 이 항의 전반부는 참된 성도가 아닌 자들의 준비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율법의 2용도를 설명하고 후반부는 참된 성도에게 작동하는 율법으로 율법의 3용도를 보여준다.
9. HC에서 십계명은 율법의 제3용도로 기술되어 있고 2용도는 앞 부분에서 비참을 깨달아야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방식으로 짧게 기술되어 있다.
10. WCF는 교회 현장에서 베풀어지는 설교와 성례들을 통해서 표현된 율법이 일반적인 은혜로 이들을 2용도에 접근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11.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를 루터와 칼뱅은 2용도로 지칭했고 이와 관련한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루터의 경우 3용도를 인정하기를 극히 꺼려 했으나 루터의 조력자였던 멜란히톤의 덕에 루터파의 영지에서 루터파와 칼뱅파가 모두 받을 수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되었다.
12.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굳고 확실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는 것으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진다.”(Inst. 3.2.7.)
13. 칼뱅은 마음(mens)에 계시로 지식(cognitio)을, 심장(cor, heart)에 확신을 연결시킨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기록 목적으로 말한바 "믿어 순종(1:5, 16:26)"케 하려는 의도와도 부합하는 것으로 믿음은 지적 변화와 의지의 변화를 불러온다.
14. 계시된 말씀은 우리의 지식의 변화를 부르고 그것을 궁극적으로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 확신은 성령이 우리 심령에 불어넣으시는 의지의 변화, 곧 습관으로써 믿음에 의해서 이뤄진다.
15.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서 믿음은 우리의 칭의와 연결이 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일은 우리의 성화와 연결된다.
16. 그런데 반율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믿음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율법주의자들과 신율주의자들은 순종을 믿음의 최종적 리트머스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17. 믿음의 두 가지 국면은 하나는 칭의와 관계하고 하나는 성화와 관계한다.
18. 칭의는 법정적이기에 최종 선언인 셈이다. “종말이 구원에 앞서는 것”이다. 칭의를 유보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행위가 들어오게 된다.
19. 칭의의 법정적 효력은 반드시 열매로서 “사랑”을 부른다. 이것을 성화라 하고 이 역시 믿음의 한 국면이다.
20. 그러나 겉옷을 입고 속옷을 입지 않듯이 바둑의 사활처럼 이 수순은 매우 중요하다. 칭의가 있고 그 열매로 성화의 순종이 따른다.

#그냥생각나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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