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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철학

호칭 프리미엄의 심리학

조선 시대에는 "선생"이 특별한 호칭이었다. 교수는 지금으로 치면 7급 공무원 쯤 되는 직책이었다면 선생은 퇴계나 송강 정도되어야 붙이던 호칭이다. 공자나 맹자처럼 문묘에 들어가는 인물인 이자 퇴계, 송자 우암을 비롯하여 그 외 이언적, 이이, 박세채, 김집이 문묘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정도며 이들을 포함하여 그 외 남명 정도에게나 "선생"이란 칭호를 썼다.

카페에 가보면 "커피 나오셨습니다"라고 안내하는 알바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존칭 인플레는 전형적인 형식주의에 주체성의 결여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당송팔대가에 이름을 올린 북송의 시인 소식(蘇軾)이 대나무그림으로 집을 꾸민 친구에게 써 준 묵군당기(墨君堂記)에 나오는 글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군거불의(群居不倚), 독립불구(獨立不懼). : 무리지어 있어도 남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서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결국 선생이란 호칭도 주체로 서 있지 못하고 갑을관계에 휘둘리던 소인배들이 갑을 높여 이르던 말이 보편화된 현상 중 하나다. 오늘날 "사장"처럼 말이다. 그 일이 얼마나 심화되었냐면 사물에도 존칭을 붙이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선비들은 10년 차이가 나도 동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지금처럼 1살 가지고 민증 까는 행태는 소위 일제의 잔재다. 호칭이 관계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타자 앞에 주체로 서는 우리 삶이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보면 아마 쌍놈이라고 혀를 찰 노릇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것을 고집하는 것을 신자의 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문서는 5계명을 결의론을 통해서 상하의 모든 관계로 확장한다. 이렇게 확장한 영국인들은 그렇게 윗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실례라고 생각하며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예절에 맞다고 여긴다.

서구의 영화를 봐도 왕 앞에서 정도나 머리를 숙일 뿐 상하관계라고 머리숙이고 들어가지 않는다. 오늘 한국사회의 모든 비뚤어진 갑을 관계들은 을사오적이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으면서 자신들을 꽁트(백작), 곧 꼰대로 여기며 법 위에 둔 데서 시작한다.

샤무엘 러더포드는 Lex Rex를 저술해 왕조차도 법 아래에 있다고 설파 했다. 진정한 법치와 민주적 질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지위를 권력으로 삼는 이 모든 일을 혁파하는 데서 출발한다.

생각해보라. 우리 사회에 어려움은 모두 이 시덥지 않은 갑을관계에서 출발했고 갑들은 자신의 법적 지위를 넘어서는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 자기 지위를 이해한 데서 출발했다. 이것은 을사오적의 꼰대적 잔재다.

송자나 이자 정도되는 학문과 인품이 아니면 스스로 선생됨을 취하지 않던 것이 조선의 선비였다. 성경도 많이 선생되지 말라 권한다. 모든 지상의 진리의 교사들의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하며 호칭이 진리를 세우는 게 아니라 성경과 법률이 제시하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 그것이 참된 권위며 이 권위가 서야 질서가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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