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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설교

성신의 역사를 생각할 때 주의할 점들

성신의 역사를 생각할 때 주의할 점들


그러면 성신께서 주동이 되셔서 역사해 나가실 때 발생하는 결과는 어떠한가 할 때 여기에서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신을 강조하는 일이 많이 있고 교회 안에서 그런 설교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성신 강조가 잘못되면 강조해야 할 데를 강조하지 않고 다른 부분에서 이야기를 해서 마치 성신의 능력의 충만한 역사라는 것이 사람이 입신의 상태에 빠져 들어가는 것같이 생각하기도 쉽고 또 그로 말미암아 초연한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 것같이 오해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성신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충만히 역사하신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자신 이상의 초연한 능력을 늘 발휘하고 산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기적을 행한다 할 때 기적도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 하에서 역사상 어떤 시기 동안에 그것이 의미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계시 시대에는 기적이 많이 필요했지만, 시대가 지나서 많은 역사적 사실이 증거로 서서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오늘날에는 기적을 특별히 요구할 것이 아닙니다. 또 기적에 의해서 비로소 어떤 사실을 믿는다든지 어떤 것을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은 신앙의 정도가 유치할 때에는 필요한 것이지만, 많은 역사적 증거 하에서 깊은 사상 가운데 들어갔을 때에는 기적이 사람의 사상을 심오하게 하거나 인격을 고상하게 하는 데 중요한 효과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기적이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물리적 효과만 내고 끝나는 수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누가 기도해서 어떤 사람의 병을 낫게 했다면 제일 중요한 의미는 그 사람이 나았다는 점에 있는 것이지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마음 가운데 깊은 사상을 얻는다든지 하는 것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初代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 가지 모로 역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적이 여러 가지 모로 역사했던 사실은 벌써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풍부히 그 내용을 우리에게 보여 준 까닭에 오늘날은 기적을 보는 것보다 오히려 말씀을 봄으로써 거기에서 깊은 사상의 내용과 깊은 가르침을 더 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런 의미에서 성신님의 충만한 역사가 이 사람들에게 임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기상천외의 능력이 뒤따라 다닌다든지 그들에게는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능력이 언제든지 구비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이런 성신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라도, 베드로가 됐든지, 혹은 거기에 있는 제자들 가운데 누가 됐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기적을 행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무슨 기이한 일을 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성신 충만이 그런 데에 목표를 둔 것이 아닌 사실을 우리가 중요히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는 성신 충만이 사람의 도덕적인 의지라든지 사상적인 내용을 하루아침에 전부 바꿔 버려서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더니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깨닫는 그런 기이한 위치로 금방 들어가는 것같이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신의 충만한 역사가 그들에게 있었을지라도 오순절 이후에라도 답답한 사람은 여전히 답답하고 사상적으로 이른바 “유대주의”라는 것을 그냥 보유하고 있던 사람은 그냥 그것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금방 다 부서져서 새로운 사랑으로 환치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신 충만의 본질을 이해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충만이라는 것은 이런 그릇이 있을 때 그릇에 물을 부어 넘치는 정도가 되면 그것이 충만입니다. 물론 그릇에 물이 반절도 못 되면 그런 것은 참 공허한 것입니다. 만일 그릇이 작다면 물을 한 잔 이상 더 부을 재주가 없습니다. 성신께서 그 작은 그릇에서 암만 충만해 봐도 작은 그릇이 가지고 있는 양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유대주의라는 사상 가운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든지, 혹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 1:6) 하는 그런 천국관이나 그런 메시야 왕국관을 가진 사람들이 성신 충만을 받았다고 해 금방 다 뒤집어져서 어디에서 배운 것도 없이 새로운 사상의 큰 내용을 그냥 다 알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것은 또 자연스런 과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신 충만이 사람들의 부족이라든지 결핍에 대해 전연 무관계한 것은 아닙니다. 성신이 충만하면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을 깨달아서 알아 갈 때에는 자연의 과정을 겪어서 일보 일보씩 자꾸 장성하듯이 알아 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무불통지無不通知로 다 알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신 충만의 역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신 충만의 역사는 언제든지 필요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그 인간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내신 거룩한 법칙 하에서 세움을 받고 장성해 나가는 것이고, 점점 고침을 받고 점점 의미 있게 돼 나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저절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이날 이때 이렇게 성신 충만을 받은 120 명의 문도가 나가서 열렬히 활동을 했지만, 그렇다고 기상천외의 무불통지의, 無所不能의 일을 다 하고 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부터는 역사를 착실하게 건설하되 방향도 발랐고 역사의 성격도 발랐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가 건설돼 나갈 때에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성격이 착실하고 순결하게 돼야 합니다. 그들은 타협을 하거나 거기에 다른 사상을 넣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성신 충만으로써 일어난 큰 사실은 신통력이 발휘되는 듯한 그런 기적적인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서 그들의 사상이 순결한 데로 향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가 그들을 지배해서 그들이 만난萬難을 배제排除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전진해 나갔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성신 충만으로써 분명하게 나타난 사실은 그 사람들 개인 개인이 자기를 생각지 않고, 세상을 생각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랑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전에 비겁했던 것이나 전에 부족했던 것도 다 뒤로 돌리고 주님께서 자기네를 쓰시는 대로 그릇의 장성의 분량에 따라서 쓰임을 받으면서 자기 스스로가 장성해 간 것입니다. 사상적으로 빈곤할 때에는 풍성하게 하고, 도덕적인 의지가 빈약한 것은 더욱 강하게 만들고, 이렇게 해서 거룩한 사상과 거룩한 정신과 거룩한 사랑을 품어서 그들의 전체 움직임 가운데 각각 자기가 맡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자태를 부분적으로 증명해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후의 사도행전 역사를 볼 때에 성신님께서 이때 맨 처음에 교회가 시작될 때에 충만히 역사하시더니 계속해서 교회가 어떻게 움직여 나갔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과연 성신님께서 주동이 되셔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우리가 여기에서 곡해하지 않고 바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심벌symbol이라든지 사인sign이라든지 하는 것에 拘礙되고 거기에 붙들려 매달리고 그것이 큰 것인 것같이 생각해서 그것만을 구하면서도 실질상 그것이 표시하고 있는 능력은 결핍돼 있다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지속적이라야 하고 끊임없이 그렇게 나가야 하는 것이지, 한때의 종교 감정을 가지고서는 만세를 부르고 기쁘다고 하고 찬송을 하고 야단 내고 성신 충만을 받은 것같이 표시를 하다가 얼마 안 가서는 다 시들어져 버리고 만 채, 중요한 시험이 그에게 닥치고 이 세상이 그를 덮치면 어느 정도 세속적이고 속되고 의미 없고 너절한 인품을 드러낸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것은 소용없는 것입니다.
여기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이 성신 충만에서는 그런 것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성신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다 같이 착실하게 역사하신 결과로 그 사람들 일생 동안 언제든지 주를 첫째로 사랑하고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쳤다는 이 사실이 명백한 역사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스스로 이기려고 하지 않고 성신께 다 맡겨서 성신님께서 완전히 극복하고 승리하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반드시 죄와 불의와는 등지고 성신께 의지하는 방향으로 딱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여기 이 오순절에 발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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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전 [사도행전 강해 1: 내 증인이 되리라](서울: 성약출판사, 2005) 334쪽~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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