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와 사랑
노승수 목사
언젠가 추석 명절에 온 가족들이 모였는데, 가족이라 해봐야 우리 집 식구 4명, 여동생 가족 4명, 어머니 이렇게 조촐하게 9명이 전부였지만 즐거운 한 때를 보냈었다. 명절날 모이면 이런 저런,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피어나기 마련이다. 나눈 이야기 중에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매제는 모항공사 승무원인데 그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비행기를 타다 보니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유명인들도 있고,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도 다수 있다. 그런데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불평,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 그게 납득할 수준이면 이해할만한데 터무니없는 손님들도 많다고 했다. 그가 얼마 전에 겪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비행기로 100만킬로 이상을 탄 VIP 고객이었다고 한다. 이런 고객들은 특별관리를 해서 웬만한 것은 다 들어준다고 했다. 그런데, 이 고객이 아마도 늘 비상구 옆자리에 앉았는데,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날은 이 자리에 배정이 되지 않고 다른 자리에 배정이 되었고, 그런데 막무가내로 그 자리로 옮겨달라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다른 고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렇게 자리를 바꿔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매제가 가만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더라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독교계에서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가정, 상담사역을 하는 H기관의 S목사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리 뒤편으로 왔을 때, 매제가 “혹시 S목사님 아니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놀래면서 그 때부터 태도가 180도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는 특별히 분노가 많은 것 같다. 사람들이 분노하면 단순히 화를 내는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심리학적으로 보면, 다른 사람을 조정하려는 태도 역시 분노의 표현이다. 지배욕구 역시 분노의 표현이며, 원래 적개심은 지배나 조정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내가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상황, 그것이 당연한 권리일 때, 이 분노는 더 노골화된다. 왜냐하면 사회적 당위성을 부여받게 되고, 그래서 그 상황에서 적절한 표현보다 더 과격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비스 제공자의 인격권이 과도하게 침해되는 경우는 우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흔히 목격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불평을 합리화 하는 기대수준이다. 기대란 타인에 의존해서 나의 욕구를 채우려는 태도로서 기대를 말한다. 이 기대가 높을수록 쉽게 분노하고 빨리 분노하고 분노의 통제가 잘 안된다.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하다. 이제 곧 대통령선거가 있지만 각 당의 선거전을 보면 언제나 전략이 네거티브로 흐른다. 정책은 실종되고 인신공격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악플들은 우리 문화의 비난이 이미 병리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소수자의 의견이나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가 아니라 다수에 의한 전체주의적 폭력과 강자를 중심한 사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대의 구타가 사회적 이슈 중의 하나였고, 최근 모 시사 프로그램에 의하면, 심지어 직장에서도 상사에 의한 구타가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사회의 분노지수 곧 기대지수를 보여준다. 얼마 전 아프칸에서 한국인이 피랍되었을 때, 한국 사회가 보여준 태도와 4월 16일, 미국 버지니아텍에서 조승희 씨에 의한 무차별 총기 난사가 생겼을 때, 미국 사회가 보여준 태도 사이에서 우리는 현격한 차이를 목격할 수 있다. 조승희 씨의 행동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심각한 범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는 그것을 비난하고 미국 사회에서 소수인종인 한인들을 핍박하거나 매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사회가 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함으로 인해 생긴 이 재앙에 대해 애통해 하며 이 아픔을 치유하려 노력한다. 조승희 씨의 영정 앞에 놓인 그를 추모하는 글을 우리 문화에선 이상하게 보인다. 이에 반해, 아프칸 피랍의 이들은 사회봉사를 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서 나간 분들이었다. 국제사회 전체는 그들을 피랍한 텔레반을 비난하는데, 심지어 아프간 내국인들조차 텔레반을 비난하는 상황에서 한국사회는 피랍자들을 비난한다. 미국정신의학편람(DSM)에 까지 한국인의 홧병이 올라 있을 정도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것만이 폭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때론 우리와 함께 하는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의 황금률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6:31)는 것이다. 성경은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허물을 비난하기 앞서, 나의 정한 권리를 주장하기 앞서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내가 대접받고자하는 대로 그들을 대하는지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2010.02.0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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