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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영성의 시대에 경건을 말하다...

영성의 시대에 경건을 말하다...
노승수 목사

요즘 사회 문화적 대표 코드를 말하라면, 영성이지 않을까 싶다. 미국의 대형 서점에 가장 큰 서가는 영성 서가라고 한다. 1998년 세계 보건 기구가 영적 안녕을 건강의 개념으로 받아 들였다. 더 이상 영성은 단순히 기독교적 개념이 아니라 종교다원적이며 사회 문화적 개념이 되었다. 마이클 호튼의 "Beyond Culture War" 에 보면, 우리가 성경 계시를 제거해 버리고나면, 우리가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지, 모든 것을 다 믿게 된다. 그래서 "신들이 비처럼 내리는 일"에 대한 니체의 예상이 실현되었다고 꼬집고 있다. 
크리스찬들도 영성을 별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니체의 표현처럼 이 시대는 최첨단의 과학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가 하늘에 비처럼 내리고 있다. 신문지상은 물론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중매체들에 -심지어 요즘은 공중파에서 조차- 점성술과 점괘로 가득하고, 그런 류의 선전물로 홍수를 이룬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이다. “과학과 기술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미신을 믿고 있다”고 독일의 여론 조사 기관인 알렌스바흐는 보도한다. 장기간의 연구 결과는 “길조나 흉조에 대한 비이성적 믿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사실상 25년 전보다도 지금 더 인기를 끌고 있음”을 밝혀 준다. 1970년대에는 유성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사람들이 22퍼센트였다. 하지만 현재는 40퍼센트나 된다. 로켓을 우주로 쏘아 올리면서, 돼지머리를 두고 고사를 지내고, 이 시대 지성의 대표인 대학교수가 차를 사서 삼거리 모퉁이에서 북어 놓고 고사를 지낸다. 이나라의 최고 지도자 중의 한 분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조상의 묘자리를 이전한다. 아이러니 한 점은 이런 사람들이 종교는 미신으로 치부한다는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이 물결에 그리스도인들도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혁교회 신앙의 핵심이자, 개신교 신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경건(piety)'은 진부한 개념이 되어 버렸다. 좀 한가락 한다는 사람치고 영성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 지적으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 기독교가 환호하는 영성이란 개념은 그 범위가 모호할 뿐 아니라 그 의미 역시 애매하다. 심지어 불교적 영성, 무속적 영성이라고도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모협회의 "우울증과 영성"이란 세미나에서 모 신학대학교수는 티벳 불교의 전형인 "마음 알아차리기"를 마치 기독교적 영성인 것처럼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선 수백명의 그리스도인들 중엔 아무도 이 사실을 이상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나만의 착각이길 바란다.) 오전 강의만 듣고 자리를 나왔지만 그곳에서 이야기되는 영성은 모두 한 개인의 내면에서의 주관적 경험에 대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 학회의 시도들은 모두 이 주관적 경험에 대해서 성경 계시가 지닌 객관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들이었다. 
이것이 현재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이다. 영성의 추구는 자기 중심성에서부터 나온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묻지 않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는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럼 성경이 정말 영성을 말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런 추구가 교회가 2000년간 믿어온 역사적 신앙의 바탕일까? 우리는 2000년간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도 모르는 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개혁교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경건에 대한 개념을 통해서 오늘 날 우리 신앙의 현주소와 영성 추구가 갖는 오류를 짚어 보고자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지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믿음이란 자기 확신이 아니라 계시 곧 성경에 대한 즉, 창조주와 구속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종교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이요, 이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데서 성립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지식이 목적하는 바가 바로 "경건"이다. 
칼빈은 1537년과 1538년 각기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출간한 그의 요리 문답에서 기독교 신앙과 생활에 대한 그의 전체적인 이해와 실천을 요약한 표상으로서 경건을 이렇게 정의한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두려움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은 회피할 수 없기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주로서 두려워하고 경외할 뿐 아니라, 그분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무서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라고 표현했다. 
경건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곧 Coram Deo로 정의한 셈이다. 따라서 참 경건한 신자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날마다 느끼는 사람이다. 주관적 감정의 경험이 아니라 성경 상의 임재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나타나는 신실한 감정이라 묘사했다. 즉, 경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반한 감정인 셈이다. 막연한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지식에 기반한 감정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그에 따른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의 역사적 오심으로 교회의 설립을 증언하고 있으며, 이 교회 가운데 성령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까지 떠나시지 않고 우리와 동행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참된 경건한 신자의 곁을 결코 떠나시지 않는다고 증언한다. 다만 문제는 우리의 신실치 못함과,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함으로 인한 죄와 부패의 문제가 있을 뿐 하나님 편에선 변함없이 동일하게 우리 곁에 계시며 이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요 진리의 지식인 믿음으로 말이맘아 나오는 실실한 감정이 곧 경건이다. 
조나단 에즈워즈도 그의 "신앙감정론"에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안에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거룩한 감정이란 바로 경건의 감정 곧 아버지에 대한 부성적 사랑과, 주님의 공의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참된 성령 내주의 적극적 표지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관이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 경건의 기초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믿음에 근거하고 있고 이것을 근거로 거룩한 감정 곧 경건에의 추구와 열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건주의자였던 필립 야콥 스페너도 "경건의 열망"이란 책을 써서 사실 우리 믿음의 선배들 특별히 개신교회는 경건이 신앙의 중심적 축이었음을 보여준다.
칼빈은 예레미야 주석(10:25)에서 경건의 출발점을 지식이라고 말한다. 경건의 출발점은 계시에 대한 지식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 셈이다. 시편 주석(119:78)에서는 "진정한 종교와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믿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으로 구분의 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다"고 말함으로 진정한 가르침이 없이는 경건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표현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실제 우리의 비참은 무지, 공허, 빈곤, 허약 등등의 정도가 아니라 타락과 부패의 문제라는 점이다. 부패도 그냥 부패가 아니라 전적인 부패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 신성을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지만, 그것을 타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소멸 되었다는 점이다. 즉, 성경이 아니고는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가 조명받지 아니하고는 구원의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티벳 불교의 마음알아차리기와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불교의 핵심은 우리의 마음의 각성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가능성이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아니로되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무능하게 된 상태, 곧 전적 타락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구속 계시로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보혜사라는 것과 그 구속 계시의 완성인 성경을 조명하시는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이 아니시고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고, 이 진리에 지식 곧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기반하여 그를 아버지로 경외하고, 주로 두려워 하여 그분의 뜻을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 싫어하는 언약에 신실한 감정이 경건이다. 
경건은 이런 점에서 객관적 계시인 성경의 지식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우리가 흔히 영성이라 할 때 간과하는 점도 바로 이점이다. 칼빈이 말하는 주관적 계시 곧 내면적 계시는 타락과 부패로 인해 완전히 소멸되어 창조주의 신성을 그릇 피조물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필두에서 영성이 자기중심성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주관주의는 필연 신비주의나 우상숭배로 귀결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신비주의를 거의 신경증적으로 싫어했다. 이 신비주의가 성경 계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주관주의의 주범이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신비주의와 자유주의는 맞닿아 있다. 데카르트가 제시한 cogito ego sum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부터 근대 이성주의와 계몽주의가 배태되었는데, 이 이성주의는 진리의 기초를 객관적 세계에 둘 수 없음으로 인해 인간 인식 안으로 후퇴를 한다. 그것이 진리의 기초를 놓는 '방법적 회의' 였고, 인간의 회의가 진리의 기초가 된 것이다. 그래서 보면, 신비적 영성을 추구하는 과목의 개설이 흔히 가장 이성을 중시한다는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진리의 기초 그것도 부패한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기초가 특별한 계시인 성경이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성경이 말하지 않는 어떤 내적 상태에 대해 말한다면 경계해야 한다. 바울도 자신의 삼층천 체험을 부득불 자랑할 뿐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성경 계시로 족하며 이 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난 하나님의 드러난 의지와 교훈적 의지들에 자신의 삶과 생활과 내면을 순복하는 신실한 감정인 경건이 이 시대에도 절실히 요구된다. 그리고 경건만이 우리 시대 교회와 우리 성도의 참된 내적 개혁의 준거이자 힘이요, 그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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