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그 이면....
노승수 목사
여러분은 실패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인생에 실패, 사업에 실패, 목회에 실패한 사람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들이 낙오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놀랍게도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은 명성교회를 개척하기 전 설교를 못한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3번이나 쫓겨 났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들은 너무나 많아서 여기에 거론하는 게 번거롭기까지 합니다. 실패가 나쁜 것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실패를 원할까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실패를 대하면 섣부른 결론과 추론을 합니다. "그가 게으른 탓이야!" "머리가 나쁜 탓이야!!" "운이 없었던거지!!" 등등 그러면서 그들과 모종의 심리적 거리를 둡니다. 그런데 과연 "실패"에는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일 외엔 없을까요?
저도 이제 목회 경력이 조금 되다 보니, 사역지를 몇 번 옮겨 다니면서, 여기 저기 이력서를 제출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은 어느 누구나 할 것없이 성공적 이력을 써 내고 어느 누구나 할 것없이 성공적으로 사역했던 사람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면, 그를 따르는 일에 실패자였던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 그것도 그냥 실패 정도가 아니라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번도 아닌 세번이나 한 사람,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 창피해 고향으로 낙향해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그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실패하라는 현상에 주목하기 보다 그가 가진 잠재력과 그가 가진 주님에 대한 사랑에 주목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실패에 대해 묻지 않으시고,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만 물으십니다. 오늘날은 교회도 세상을 닮아 가는 모양입니다. 성공에만 열광하고 집착하는 모습은 딱해 보이기 까지 합니다. 아니 오히려 어떤 점에선 세상에서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속담에 "홀아비 마음은 과부가 안다"고 했습니다. 진정 실패를 경험해본 사람은 인생의 경륜과 폭이 넓어집니다. 그래서 국가 경영자들이나 그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들이나 특히 목회자의 경우, 아픔과 상처를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픔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아픔을 이기고 극복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례를 몇가지 소개 해보고자 합니다.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사의 한 사업부는 일반 전구보다 수명이 50배나 긴 친환경 전구를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 소비자에게 외면당했는데, 전구 개발을 맡았던 팀원들은 낙담했고, 회사에서 쫓겨날까 봐 불안해했습니다. 그런데 회장은 예상을 깨고 그 팀 모두에게 두둑한 상여금과 함께 일주일 간의 휴가를 주었습니다. 새 상품이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일한 팀원들에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보상을 해 줘야 한다는 것이 회장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그들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수명이 긴 전구를 좀 더 값싸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매진했습니다. 만약 회장이 실패의 책임을 묻기만 했다면 수명이 긴 전구의 개발은 백지화되었을 것입니다. 그 회장은 바로 '직원에 대한 열정이 클수록, 그리고 사람을 아낄수록 성공하는 리더'라고 말한 잭 웰치입니다.
인터넷 소매업체 마더네이처사는 간부사원을 채용할 때 특이한 조건을 한 가지 내 걸었습니다. '지난번 직장에서 뼈아픈 실수를 경험한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한 아픔이 있는 사람만이 비슷한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며 매사에 심사숙고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를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실패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가장 먼저 압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힘든 사람 역시 실패한 당사자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매질이 아니라 격려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항상 우리의 생각보다 큽니다. 믿음이란 늘 알지 못하던 것에 대한 도전입니다. 어떤 점에서 진정한 실패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만 있으면 2등이나 하지"는 결코 2등이 아니라 실패라는 것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괜히 생긴 게 아닙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개발할 때, 일입니다. 2399번이 넘는 실험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실패에 팀원들은 낙심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것은 안됩니다. 우리는 이미 수백 번이나 실패했어요"라고 했습니다. 그 때, 에디슨은 "무슨 소리냐고 우리는 이렇게 하면 안되는 수백 가지 경우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 조금만 더하면 우리는 전구를 밝히는 지식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결국 2400번째 실험에서 불에 타지 않고 빛을 발하는 필라멘트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결혼 전문 기업인 "더 낫"의 공동설립자 칼리 로니는 리더십이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실패를 거쳐 성장하면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수없이 실패를 반복하고, 부모는 그들의 실패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들이 점차 자율성을 갖도록 도우는 것처럼 사회에서 기능적인 사람 역시 이러한 리더십에 의해 세워집니다. 저는 이런 걸 parrents leadership이라고 말하고 십습니다. 조직에서 실패는 사람을 어렵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조직이 성공적인 사람만 구한다면 도대체 이들은 어디에서 길러집니까? 가정이 그런 기능을 하듯이 이 사회는 곳곳에 이와 같은 리더쉽을 요구합니다. 이처럼 '실패에 대한 우대'는 우량 기업의 최고경영자라면 빼놓지 않고 말하는 성공 비결입니다. 실패란 자신의 능력의 한계까지 도전해 본 경험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 좌절을 맛보았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위험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 십대 때에 천재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십대에 음악 신동 소리를 듣거나 물리학 신동, 그림 신동, 수학 신동 소리를 듣는 경우를 우리는 신문 지상에서 종종 목격합니다. 그런데 십대 때에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분야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문학이라고 합니다. 문학이란 우리 삶의 이야기이고 삶의 역경과 고난,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을 겪어 본 사람에게서만 진정한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문학적 거장의 위대한 작품들도 그들의 실패의 산물인지 모르겠습니다.
잠언 24:16에는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의인의 특징이 넘어지지 않는 자가 아니라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일곱 번 넘어진 다는 것의 의미는 완전히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넘어지기는 매한가지 입니다. 그런데 의인은 일어선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들으면 제게는 떠오르는 한 가지 이미지가 있습니다. 바로 오뚜기 입니다. 오뚜기는 아무리 넘어뜨려도 일어납니다. 이유는 그 무게 중심이 훨씬 무겁기 때문입니다. 의인이란 이 무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실패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세상의 큰 시류를 거슬러 진정 창의적인 인재를 발굴하고 격려하고 그들로 하여금 놀라운 일들을 이루도록 자극하는 리더가 아닐까요? 그들은 결코 자신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이런 목사님, 장로님이 많이 필요하고 한국 사회에 이런 지도자들과 관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네요.
그런데 문제는 한국 사회는 실패를 수용하지 못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패한 재목들을 격려하고 세우기보다 처벌하고 비난하기에 급급합니다. 이런 구조는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말살하게 되고 어느 누구도 감히 도전을 하려 들지 않게 됩니다.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다르게 바꾸면 그 일이 그 일을 만들어 가는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경우에 사람은 소모품에 불과하게 됩니다. 얼마전 있었던 김포 외고의 입시 부정도 결국 실패를 두려워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나타난 사회 현상입니다. 중 3 아이들 조차 극한 "무한경쟁" 속에 내 몰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구조가 닫혀가고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10.02.0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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