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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인간론

그레샴 메이첸의 기독교 인간관

그레샴 메이첸의 기독교 인간관
인간에 대한 2분설과 3분설에 대한 성경적 증거
그레샴 메이첸의<기독교 인간관>의 목차
1.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2. 하나님의 작정
3.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
4. 예정이란 무엇인가?
5. 성경은 예정론을 가르치고 있는가?
6. 예정에 대한 반대
7.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섭리 사역
8. 하나님의 섭리 사역
9. 기적
10.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11,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12.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바 된 인간
13. 생명의 언약
14. 인간의 타락
15. 죄란 무엇인가?
16. 하나님의 율법의 엄위성
17. 인간은 죄 가운데 잃어버린 바 되었는가?
18. 인간 타락의 결과
19. 원죄란 무엇인가?
20.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죄인
성경의 교리에 목숨을 거는 진짜 이유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10:27).
“이 교리면 누구에게나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그 연사는 말했다.
물론, 그것은 전혀 교리가 아니라 명령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누구에게나 충분할 정도로 그 사상이 원대하다는 연사의 주장은 옳았다. 그런데 만일 이 구절이 누구에게나 충분할 정도로 그 사상이 원대하다는 그의 주장이 옳다면,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 이외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관한 교리를 포함하여 광대한 교리들을 주장하는가? 왜 우리는 단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만족하지 않는가? 이 말씀은 참으로 누구에게나 충분할 정도로 그 사상이 원대하지 않은가?
이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으로부터의 대답은 무엇인가? 기독교적 관점으로 부터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렇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중대한 이중(二重) 명령은 확실히 누구에게나 충분할 정도로 그 사상이 아주 원대하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 구절의 사상이 진정코 너무도 원대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점에 모든 문제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인 이유이다. 예수님의 이 엄청난 명령은 그 사상이 너무 원대하다. 그것은 너무 원대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못하였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그 명령을 말씀하신 높은 의미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했다면 모든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잘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무 부족함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에게 어떠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교리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실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품격-두 개의 구별된 본성을 갖고 계시사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시지만 여우언히 한 분이신 분-에 관한 교리도 필요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의로웠을 것이며, 따라서 구주(救主)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죄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교사와 모범가, 율법 수여자 그이상인 분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믿지 않는 자들이 단순히 교리라 하여 경멸하지만 우리는 즐겨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숨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과 사역에 관한 중대한 성경 교리를 고수하는 이유이다.
내가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모범과 율법 수여자로만 들었다고 한다면, 그분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분이 산상보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다고 한다면, 나는 그분에게 무어라고 말씀을 해야 하겠는가?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전부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사랑하고 마음이 청결하다면 만사가 잘 될 것이며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글쎄, 나는 당신이 어떻게 말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예수님의 그러한 명령을 들은 후에 단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 나는 망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나는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 나는 죄인이다. 예수님, 당신의 높은 명령들 이외에 나에게 하실 다른 말씀은 없습니까?”
그리하여 내가 죄인으로서 예수님께로 가서, 내가 그분의 명령들을 불순종하였으며, 나는 그분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얷도 없는 전적으로 무가치하고 무익한 존재임을 고백할 때, 그분은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단지 “너는 나의 높은 명령들을 들었다. 그것은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이고,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복음 전부이며, 네가 소유할 수 있는 교리 전부이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시는가?
그렇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내가 지키지 않았으며, 또한 지킬 수도 없는 계명의 냉정한 위로가 그분이 나에게 주실 수 있는 전부가 아니다. 그분은 나에게 그분 자신을 주신다. 그분은 성경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나의 구주로서 자기 자신을 나에게 주신다. 그분은 그분의 품격과 사역에 관한 중대한 교리들 안에서 자신을 나에게 주신다. 만일 그분이 다른 어떤 분이시라면, 그분은 나를 구원하실 수 없으며, 나는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엇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실 수 있었으며 또한 구원하셨고,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그분과 연합되었다.
이제 알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관한 교리를 고수하는 이유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냉담한 이론적인 문제로서 취급하지 않고,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깊은 바다 가운데서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판자를 붙잡는 것처럼 그 교리를 취급한다.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이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교리들은 우리에게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며, 또한 학교나 교실에서만 취급되어질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치명적으로 중대한 문제이다. 그것은 생사(生死)가 걸려 있는 문제이다. 여기에 우리의 영원한 문제가 달려 있다.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안에만 우리의 소망이 있다. 기회가 있을 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p.22-25
하나님의 품성적 불능(不能)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性品)에 의해 제약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지혜가 무한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혜롭지 않은 일을 행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의(義)가 무한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의한 일을 행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선(善)이 무한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일을 행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진리가 무한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 p.29
사람의 선택과 자유 그리고 성품
사람의 선택들은 외적인 강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그렇지만 만일 그 자유가 그 사람 자신의 성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선택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p.30
예정 교리의 여러 오해들
나는 예정 교리가 의미하지 않는 바들에 관하여 여러분들에게 몇 마디 말하고자 한다. 예정 교리는 하나님께서 전횡적으로 또는 선하신 이유도 없이-비록 그 이유가 우리에게 신비로울지라도-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선택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죽음을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교리는 구원을 얻고자 하는 어떤 자들에게 구원의 문이 닫혀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이 교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 미치지 아니할 것임을 알고 자포자기하는 상태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이 다소의 공포심을 갖고 이 중대한 성경의 교리를 보는 것은 이 교리를 완전히 오해한 때문이다. p.76
첫째로, 이 예정의 교리는 어떤 사람들은 버림을 받는 한편,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도록 선택하신 것이 단지 우연이나 또는 자의적(恣意的)인 그 무엇에 기인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둘째로, 예정 교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죽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뚜렷이 그 반대로 말씀하고 있다. 에스겔서 33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구절들을 들어 보라. “주(主)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33:11).
디모데전서에서도 똑같은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그 곳에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하였다. 이 나중 구절은 결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의 행위에 의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결정하셨다는 의미일 수는 없다. 실제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셋째로, 예정 교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구원을 얻는 다거나, 또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정죄를 당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취급해 오고 있는 이 중대한 교리에 대한 참으로 근본적인 반감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오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예정 교리가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예정되었는지 아니면 멸망하도록 예정되었는지를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정 교리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나는 복음을 들었는데, 복음은 나의 마음을 꽤 감동시켰어. 어쩌면 나는 복음을 받아들일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구원을 얻을는지 아니면 버린 바 될지는 어쨌든 미리 다 정해저 있는데, 내가 믿기로 결정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더욱 심한 것은 역시 예정의 교리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그들이 상상하는 것이다. “나는 복음을 들었는데, 나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해.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구원을 얻도록 예정된 자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내가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한, 내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소망이 없어.”
또 하나의 예(例)를 든다면, 예정 교리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그들은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함을 받은 자며, 나는 선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을 경멸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선택함을 받은 자로서 궁극적으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될 것임과 내가 죽을 때 영원한 복에 들어갈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어.”
이 세 가지의 독단적인 예(例)들과 그밖에 이와 비슷한 많은 예들은 예정 교리가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들이다. p.80-85 (요약)
인간에 대한 2분설과 3분설
성경은 참으로 인간의 영이 그의 혼과 구별된다고 가르치는가, 아니면 성경은 인간의 혼과 인간의 영은 두 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질 뿐 정확히 동일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중요한 성경 구절 하나를 아주 명백히 이해함으로써 주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는데, 3장과 연결되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거듭하여 혼과 영을 구별하고 있으며, 또한 ‘혼’으로 특징 지워지는 사람이 ‘영’으로 특징 지워지는 사람과 구별됨을 말하고 있다. “‘혼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을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나는 방금 고린도전서 2장 14-15절을 인용하였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는 이 인용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다고 말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영어 성경에는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라나니”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이 원문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참으로 멋진 번역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서는 실제로 ‘자연인’ 대신에 ‘혼적인 사람’(soulish man)으로 되어 있다. 단지 ‘혼적인’(soulish) 이라는 말이 영어에는 없을 뿐이며, 따라서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흠정역(KJV)과 같이 번역할 때, 우리는 그 의미에 최대한 근접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성경이 ‘혼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이 구절에서 대조시키고 있다면, 이것은 인간의 본질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혼과 영으로 구분된다고 하는 3분설에 대한 아주 명백한 예(例)가 아닌가? 이 구절은 분명히 인간의 영과 인간의 혼을 구별하지 않는가?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정반대로 이 구절은 명백히 인간의 본질을 육체와 혼과 영으로 구분하는 3분설을 반대하고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하는 2분설을 지지한다. 명백한 사실은 “영에 속한 자”라는 어구에 사용된 형용사 “영에 속한”(신령한)에서 “영”이라는 말은 인간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 전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 구절에서보다 더 명백히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런 다음 그 구절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계심으로써 하나님의 일들을 깨닫는 자에 대하여 말씀한다.
그러면 “혼적인 사람”(육에 속한 사람)과 대조적인 “영적인 사람”(신령한 자)이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대낮같이 명백하다. “혼적인 사람”이란 인간의 영혼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영적인 사람”이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소유한 사람이다.
따라서 “영적인” 사람이란 ‘혼’과 대조하여 ‘영’이라고 불리우는 인간 본질의 더 높은 측면 또는 부분을 발달시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인가! “영적인” 사람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이시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변화되어진 사람이며, “혼적인 사람”이란 단지 자신의 영혼만을 가지고 있을 뿐, 이러한 변화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영적인”(신령한)이라는 형용사에 있어서 ‘영’이라는 말이 사람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 말의 첫 철자가 대문자로 씌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울 서신의 다른 구절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는 열쇠이다.
성경적 의미에 있어서 ‘영적인 사람’(신령한 사람)이란 거듭난 사람이며, 자기 본성의 일부가 아니라 본성의 전부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변화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본성을 육체와 혼, 그리고 영의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 있는 그 중요한 구절의 진정한 의미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3분설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구절들이 있지 아니한가? 3분설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구절을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독자들의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흠없이 부전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이 구절은 그 밖의 바울 서신과 그 밖의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뒤엎는 데에 적절히 사용될 수 없다. 단지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독자들의 전존재(全存在)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흠없이 설 수 있도록 보존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소원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표현 방법을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단지 이같은 생각을 나타내기 위하여 갖가지 말들을 열거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혼’과 ‘영’이라는 두 말 이외에도 그러한 생각을 나타낼 수 있는 또 다른 말들이 있었다면, 그는 그 다른 말들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성경에 의해 육체와 혼과 영으로 구분된다고 하는 견해를 아주 단호하게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이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 본성에 대한 3분설의 견해는 중대한 실수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 견해는 사실상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주장되어 온 실수이며, 또한 그것은 학구적으로 그리고 경건한 태도로써 옹호되어져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중대한 실수이다.
이 견해는 구속(救贖)함을 받은 자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빈 공간”의 견해-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는 하나의 빈 공간, 즉 하나님의 전(殿)이 되어야 할 공간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꽤 괜찮다고하는 생각-를 조장시킨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일어나는 일은 단지 인간 본성의 한 부분, 즉 “영적인” 부분이자 이전에는 방치되었던 부분이 발달되고 인간의 생명에 있어서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고하는 생각을 조장시킨다.
이와 같은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나타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인간 본성의 진정한 상태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 소멸되거나 또는 이지러진 성장만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전부가 부패해 버린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전에 빈 공간과 같았던 인간 본성의 일부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왕자에 앉으시는 것이 아니라, 전에 죄 때문에 부패하였던 전 인간(全人間)이 하나님의 영의 중생케 하시는 능력에 의하여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인간의 영과 인간의 혼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명백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두 말은 동일한 것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부르고 있는 것인데, 이 말들 사이의 차이를 조사해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것들이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말로 ‘인간의 혼’ 또는 ‘인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 두 개의 다른 말들일 뿐이다. 그리고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이제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영혼’이라고 부를 것이다. p.162-167
인간에게 죄는 본성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이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罪性)은 단순히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에게 속해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인간 본성 그 자체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최소한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명하신다(마 5:48).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예수께서는 그렇게 되라고 그들에게 명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 본성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다.
둘째로, 예수님 자신이 죄 없는 사람-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전혀 죄가 없는 사람-의 실례(實例)를 나타내 보여주신다. 이것 역시 죄가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필연적으로 속해 있지 않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
예수께서 보여 주시는 죄 없는 사람의 실례란 그 자신의 예(例)이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죄의식의 흔적이 전혀 없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지만 그분 자신은 그러한 기도를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가’악한 자라도”(마 7:11)라고 말씀하셨지, “‘우리’악한 자라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고 하신 그 죄성(罪性) 속에 자기 자신은 포함시키지 않으셨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흐르고 있는 매우 이상한 사실의 한 예(例)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특히 죄에 있어서 예수께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청중들과의 사이에 언제나 유지하고 계시는 이상한 간격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을 하나로 묶으시면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께 말씀하지 않으시며, 그 어떠한 죄의 고백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을 하나로 묶지 않으신다. 우리는 때때로 이 엄청난 사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어느 다른 선생이 자신의 청중들에게 "너희 악한 자라도“라고 말한다고 상상해 보라! 예수님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이 말한다면 얼마나 혐오스럽겠는가! 그 외의 다른 종교적 선생이라면 ”우리가 다-여러분과 나-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악한 자라도“라고 말씀하신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죄악 된 인간성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신다.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 잃어버린 바 되었지만 그분 자신은 죄가 없음을 가르치고 계신다. 확실히 이것은 이상한 사실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이 아니셨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한 설명은 전혀 적합지 않다. 복음서 전체에 걸쳐서 예수께서는 참된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예수께서도 자신을 그렇게 묘사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가 없었던 인간을 보게 된다. 이것은 죄가 인간 본성(本性)의 필수적인 부분이 결코 아님을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죄는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p.243-245
인간의 죄성은 아담의 죄에서 기인한 것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현재 악한가? 선(善)으로부터 악(惡)으로의 이 엄청난 변화는 어떻게 하여 일어났는가? 앞서의 강연에서 이야기한 내용 가운데 우리는 최소한 올바른 대답에 대한 암시를 받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우리는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 왔는가를 살펴보았다. 죄는 아담의 죄를 통하여 들어왔다. 만일 통상적인 출생에 의해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면, 확실히 아담의 후손의 이 보편적인 죄성(罪性)은 아담의 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의 경우와는 달리 삶을 죄 없이 시작하지 않고 이 모양 혹은 저 모양으로 아담이 범한 죄에 오염된 상태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한결같은 결과는 단일한 원인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에 연루된 정확한 방식에 대해서 교회 안에 서로 다른 견해가 있어 왔다. 인간은 상당히 큰 통일체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아담이 행한 것을 모든 사람이 실제로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모두 아담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행동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이었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가 상식과 성경 모두에 모순됨은 아주 명백하다. 상식과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다수의 사람들이지 결코 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행한 것이 실제로 그의 후손 모두에 의해 행해졌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일생에 잘못된 일들을 많이 행했지만, 에덴 동산에서 금지된 실과를 먹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에 의해 행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즉 아담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아담의 최초의 죄에 연루되었는가?
나는 이 점에 대하여 소요리문답(제16문항)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인용한 다음,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여러분에게 묻고자 한다.
질문은 “모든 인간은 아담의 최초의 범죄 가운데 타락하였는가?”라고 되어 있다. 대답은 이렇다. “그 언약은 아담 자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후손을 위하여 아담과 맺은 언약이므로 통상적인 출생(보통 생육법)에 의해 그의 혈통을 이어받는 모든 사람은 그의 최초의 범죄 가운데 그 안에서 범죄하였으며, 그와 함께 타락하였다.”
여러분은 여기서 언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행위 언약 혹은 생명 언약인데, 우리는 그 조건이 매우 단순함을 살펴보았다. 그 언약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만일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킨다면 생명을 얻을 것이고, 불순종한다면 죽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언약은 아담 자신을 위하여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후손을 위하여 아담과 맺은 것이라고 소요리문답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가?
심지어 아담의 타락이 기술되어 있는 창세기도 소요리문답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아주 훌륭한 성경적 증거가 있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담은 범죄할 때 죽게 되어 있었다. 죽음이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 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범죄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오직 아담만이 죽었는가? 그의 후손들은 그가 시작했던 곳에서 시작하는가? 아담 앞에 놓여 있었던 죽음과 생명에 대한 양자택일이 그의 후손들 앞에 완전히 다시 놓여졌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 반대였음을 창세기는 아주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아담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전혀 아무 선택도 하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 임한 그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 창세기는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생명의 언약을 아담과 맺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혈통의 대표자로서 그와 맺은 것임을 의미한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한다면, 그의 후손들의 전(全) 혈통이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만일 그가 불순종한다면, 전(全) 혈통이 죽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 그것이 이 이외의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창세기에 전제되어 있는 그 문제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신약의 어떤 중요한 구절들에 있어서 더욱 명백해진다. 특히 로마서 5장 후반부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롬 5:18)라고 그는 거기서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롬 5:19)라고 그는 그 다음 절에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들 가운데서, 그리고 로마서 5장 후반부 전체를 통하여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혈통의 대표로서 범죄했다고 하는 중대한 교리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의 최초의 범죄 가운데 ‘그 안에서’ 범죄했으며 ‘그와 함께’타락하였다고 하는 것은 아주 타당하다. p.246-248
“정녕 죽으리라”에서의 ‘죽음의 의미’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만일 그가 불순종하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안에는 육체적인 죽음이 포함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안에는 또한 육체적인 죽음 훨씬 그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 안에는 영적인 죽음이 포함된다. 그 안에는 선한 것들에 대한 영혼의 죽음이 포함된다. 그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죽음이 포함된다. 그 아담의 죄에 대한 무서운 형벌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허물과 죄 가운데 죽게 된 것”이었다.
내가 이와 같이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앞선 죄 때문에 나오는 죄나 그 외의 어떤 다른 종류의 죄의 조성자이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담의 죄에 대한 마땅한 형벌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총을 거두셨음과 또한 모든 인간의 영혼이 영적으로 죽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영적인 죽음에 대하여는 소요리문답 가운데 우리가 애써 설명해 온 “아담의 최초의 범죄에 대한 죄책”이라는 말 다음에 기술되어 있다. “사람이 타락한 지위에서 죄되는 것은 아담의 최초의 범죄에 대한 죄책과 원시의(原始義)가 없는 것과 온 성품이 부패한 것인데, 이것은 보통 원죄라 하는 것이요, 아울러 이 죄로 말미암아 나오는 모든 죄이다”라고 소요리문답에서 말하고 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원시의(原始義)가 없고 온 성품이 부패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적인 죽음이다.
원시의(原始義)의 결여, 온 성품의 부패, 영적인 죽음은 그 자체가 죄이다. 그것은 단순히 죄의 기초나 죄의 토대나 죄의 근원만은 아니다. 물론 이것도 모두 사실이다. 실제적인 범죄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죄의 기초나 토대 이상이다. 그것은 자체가 죄이다. 영적으로 죽은 영혼, 그 무서운 부패로써 부패한 영혼은 더 이상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전가됨으로써만 죄악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의 죄악됨으로써 죄악되다. 그것은 단지 아담의 죄책 때문에만 유죄한 것이 아니라 또한 그 자체의 죄 때문에 유죄하다. 그것은 이제 그 자체가 죄악되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p.253-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