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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인간론

M. Luther의 인간론

M. Luther의 인간론
박찬희 목사
들어가는 말
루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떠나서는 인간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던 시기에 성서적 인간론을 직시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행동 즉, 인간과의 관계의 역사 안에서 재발견했다. 헬라적 사유에서 성서적 사유로 넘어가는 신학방법론은 인간에 대한 인식을 독립적 인간의 '육' 혹은 '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관한 진술에 대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철학적 인간론은 인간의 구성 즉 '육'과 '영'이라는 존재론적 진술이라면 신학적 인간론은 그 지평을 하나님으로 넓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아래서 보며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다.
루터의 인간이해는 이런 면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염두에 둔다. 파울 알트하우스는 그의 책에서 인간을 '죄 중에 있는 인간',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는 인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 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알트하우스의 설명은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관계의 측면에서 보고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을 향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그늘 놓여 있다. 동시에 죄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이면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사이에서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는 사탄으로부터의 인간 탈취라는 면에서 그러하다.
본고는 알트하우스의 책이 진술하고 있는 루터의 인간이해를 중심으로 몇가지 문헌들을 참고하여 보충하는 방법으로 전개될 것이다. 가능하면 책의 설명보다는 각주에 기록된 루터 자신의 글에 비중을 두고자 했으나 이 또한 번역된 것이어서 원문을 함께 부기했다.
1.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
루터의 인간이해는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그 분이 내리신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 속에서 드러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의 표현은 계명이다. 즉 하나님의 뜻은 계명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데 이 계명은 구원에의 부름으로서 복음인 동시에 율법이다. 이 말은 복음이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계명의 형태로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인간은 계명, 특히 제1계명을 통하여 그 속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며 "그의 약속에서 그를 믿는 자, 오로지 그를 바라는 자는 이와 아울러 그의 신성과 그의 능하심 그리고 참됨과 선하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악한 영은 온 힘을 기울여 인간이 그 높은 위엄자에게 간구하기에 합당한 자인지를 의심케 하며 방해한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 우리의 행위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수평적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이런 수평적 관계에서의 이웃사랑 요구는 이미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드러났으며,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더 이상 요구하는 것이 없음을 말한다.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서 나의 신앙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또 필요로 하시지 않는 바와 같이, 나 또한 하나님께 직면하여, 내가 신앙 가운데 나의 구원인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구원받기에 필요한 것이 없다." 그렇지만 이 때에도 수평적 관계에서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웃사랑이다.
"참으로 너는, 구원과 죄사함을 받고 양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 이외에 더 많은 것을 행할 필요가 없다. 너는 너의 신앙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내 이웃은 아직 충분하지 않은데, 너는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네가 너의 삶과 함께 너와 같은 죄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네 이웃을 섬기라고...너를 살게 하시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아래 있는 인간에 대한 이런 이해는 루터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자신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의 이웃 안에서,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통하여 이웃 안에서 사는 것이다. 신앙을 통하여 그는 자신을 넘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며, 하나님으로부터 그는 다시 사랑을 통하여 자신 밑으로 나아가서 언제나 하나님 안에 그리고 신적인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 루터에게 있어서 이런 이웃 사랑의 원형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나와 만나는 것과 같이, 나의 이웃과 만나도록 요구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계명인 것이다.
2. 죄 중에 있는 인간
1) 인간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가?
인간은 어떤 경우에서든 죄의 참된 본질과 그 깊이에 있어서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이 때로 "선천적으로 개별적인 죄들은 인식하나, '근본 죄, 큰 죄 그리고 참된 죽음의 죄', 원죄, 첫째 계명에 대한 죄는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은 또한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이 이러한 죄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말씀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을 통하여 인간은 그의 죄를 전적으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2) 시민적 의
루터에게도 인간의 도덕적 제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한정적이다. 인간 사이의 의, 즉 '도덕적', '시민적', '외적', '정치적' 의가 그것이다. 이런 것들은 시민법 혹은 도덕법의 성취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열방의 역사 및 현실에서 나타난다. 이런 의는 "열방에서 질서와 평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시민적 의'를 원하시며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이 평화와 질서 가운데 머물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도록 그 의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의를 그 영역에서 인정하시는데, 참으로 그는 세상에서 최고가는 보화로써 그 의를 보상하고 꾸미시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적 의에는 은밀한 곳이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리(시 51,6)가 없으며 이 의가 가지는 한계는 "하나님은 인간과 훨씬 다르게 판단하신다"는데 있다. 정치적 재판관 앞에서 나를 변명하는 그런 의가 또한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에 대한 찬탈행위로서의 죄
루터에게 있어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설명된다. 물론 원죄의 개념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적 측면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모든 죄의 시작은 '자기 사랑'이다. 이것은 "마음의 토대에 들어있는 불신앙"이다. 자기 사랑은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그 분께 속한 것을, 사람에게서 그에게 속한 것을 탈취하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이 갖고 있고 존재하고 좋아하는 것 중 무엇인가도 주지 않는다." 이것은 곧 불신앙이며 이런 불신앙은 자기 사랑, 자기 자신에의 만족, 자기 신뢰, 자신의 의에 대한 신뢰에 의존하게 하며, 끊임없이 첫째 계명을 범하고 그의 온 신뢰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루터는 죄 곧 악은 "인간이 악의 의향이나 성향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전적으로 악하다는 말이며 또한 인간은 평생동안 악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꿈꾸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인가? 루터는 그 이유를 인간 본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통하여 이해한다. 인간의 본성은 "모든 사물에서 자신만 보고 자신만 추구하고 경주하며 그 사이에 놓인 다른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결코 그것을 보지 아니한 것처럼, 넘어가서 완전히 자기 자신만 향한다."-"그것은 다른 모든 것의 자리에, 참으로 하나님 자신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두고 하나님께 속한 것은 추구하지 않고 자기의 것만 추구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중요한 우상이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도 타락되어 있기 때문에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광을 그 자신에게 돌리려고 한다. 인간의 본성이 잘못되어 있음은 알면서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다"
루터의 이러한 인간본성에 대한 간파는 인간이 "하나님이 그에게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유용할 경우에만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에 대한 지적을 이끌어 내는데, 이런 '자기사랑(amor sui)'은 인간이 "그의 행위에서 자기 자신을 즐기고 자신을 우상으로서 경배"하게 하며, 이런 교만(superbia)은 탐욕(concupiscentia)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찬탈행위로서의 죄는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시는 의에 대해서 자신을 닫는다는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대신 자신을 신뢰하는 이런 신성모독의 절정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세주로 주셨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곳 가장 꼭대기에서 일어난다."
4) 이웃에 대한 찬탈행위로서의 죄
루터는 제1계명으로부터 이웃에 대한 사랑을 추출한다. 그에 의하면 바리새인은 "형제에 대하여 자신을 의로운 자로 느끼고 즐기기 위하여 형제가 낙심하고 쓰러지는 것을 이용한다. 그리고 이 자기 의(義) 가운데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그는 사랑이 요구하고 있는 바 그들의 도덕적 곤경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 어두운 배경을 기뻐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이웃에 대한 봉사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 한다. 이런 superbia가 인간 내면으로부터 이웃에 대한 찬탈행위를 자아낸다. 물론 루터가 인간의 도덕적 의지의 능력을 전면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의지가 "마음의 토대'와 그의 비밀한 가정들과 생각 그리고 소원들까지는 이르진 못하여 마음으로 그것을 행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계명에 대하여 '의식적 의지'는 '예'(긍정)를 말하나 '마음의 토대'는 여전히 '아니오'(부정)를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할지라도, 동시에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육'이기 때문"이다.
3. 육적 인간과 영적 인간
"사람은 영적이며 육체적인, 이중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영혼이라고 표시하는 영적인 본성에 의하면 그는 영적, 내적, 혹은 새사람이라고 불리운다. 사람들이 육이라고 표시하는 육체적인 본성에 의하면 그는 현세적, 외적 혹은 옛사람이라고 불리우는데 … 이러한 인간 본성의 다양성 때문에 성서는 동일한 사람에 대하여 대립되는 점을 주장한다. 그것은 동일한 사람 안에서 이 두 사람이 서로 배치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superbia, 곧 인간을 진정한 인간 사랑이나 하나님 사랑으로 이끌지 못하는 자아(Ich-Wille)는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약함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에 있는데, 인격과 본성과 전 본질은 우리 안에서 아담의 타락을 통해서 부패"하였고 인간은 행위로 그 죄있음을 인식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성은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에 이미 선행"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생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기 전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 그것이 죄 전체이다." 이런 본성적인 죄는 인격이 있는 곳에서 그리고 인격이 있는 한 그곳에 죄가 있다. 오직 하나님만 그 죄를 살피신다.
루터는 '육'을 이해함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육"은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영 바깥에" 있는 모든 것, 신앙에서 나오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다. 루터의 전인적 이해에 의하면 인간은 육적이면서 또한 영적이다. "인간의 자기 만족성, 자부, 뻔뻔함, 그의 불신앙,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를 가지고 가려는 시도, 이 모든 것은 영적인 것이나, 바로 이 때문에 그리고 바로 이 속에서 인간은 "육"(종교적인간<HOMO religiosus>으로서의 육)이다. 모든 철학과 신학 모든 인간의 지혜가 신앙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육적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인간은 그가 하나님이 율법을 사랑하는 한에 있어서, '영', '영적'이다." 루터에게 자연적 인간은 전적으로 "육"이지만 "육"이 완전히 악한 일에만 치우치는 것도 아니다. 선과 악은 평생 모든 행위에 뒤섞여 있으며 인간은 "경미한 움직임"을 가지고 선을 원하기도 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을 이런 "모순 속에 있는 인간"으로 보았고, 그리스도 없는 인간은 그러한 "경미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탐욕으로 가득찬 전인(全人)이라고 하였다.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루터가 말하는 '육'에 대한 설명은 좀더 구체적이다. '영'과 '육'의 구분에 있어서 육적인 요소는 동물 일반의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동물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하고 동물과 다른 특이한 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더 나아가 '육'을 바울이 이해한 성적 욕망이나 동물적 정욕, 감각적 기호 등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전체적으로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루터는 인간이 육체성 그 자체인 것처럼 인간은 육이라고 말한다. 그 까닭은 "인간이 육에 속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소망하며 사실상 그외 다른 아무 것도 소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육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도 없고,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루터에게는 "믿음을 통해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육적인 인간"일 뿐이다. 루터는 이러한 육적인 인간이 갖는 한계를 탁상담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 부패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인 것과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 욕망도 가지지 않는다"
반면에, 영적인 인간은 말씀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죄악된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다. 인간은 이것을 통해 영적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역사함으로 인간은 사망과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언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세우신 법에 따라서 아직까지도 불결한 짐승을 정결하다고 선포하신 것처럼 지금도 이방인들과 우리 모두가 그 동물들이 불결한 것처럼 죄인이지만 의롭다고 선포"하신다.
1) 종속의지
신앙으로 말미암은 중생이 없는 인간의 의지는 종속된 의지(Servum arbitrium)이다. 인간은 그가 존재하고 행하는 바 그 모든 것과 더불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 존재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책임성과 죄책을 덜해주지는 않는다. 인간은 그의 깊숙한 의지에 반하여 죄를 짓도록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에 있어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한다. "아담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죄를 지었고 그로부터 죄를 짓는 의지가 우리와 함께 생겨난 것인데, 그와 같이 우리는 의지에 반하여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더불어 죄를 짓는다. 확실히 이것이 우리의 악이다."
죄와 죄책에 있어서 "인간은 그의 죄 가운데 죄책이 있고 또 그것으로 머문다. 그것은 율법이 그에게 수여되었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이 율법에서 그에게 자기의 선한 뜻을 알리신다. 죄인은 끊임없이 율법에 반하여 행동하므로 그의 행위는 악하며 죄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은총과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힐 때 "하나님에 의하여 방향을 돌릴 수 있으며 계속해서 이것을 할 능력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창조하고 규정하셨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존속하기 때문이다.
2) 원죄(Peccatum originale)
"이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의 원죄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천적인 것이며 개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천성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죄있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아담은 의롭고 경건하고 거룩하게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악에의 경향없이 오로지 선에의 경향만 있었다. 루터의 "인간에 관한 논제"(Disputatio de homine) 21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육체의 생령으로 구성되었으며, 태초에 죄없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자손을 번식하고 모든 것들을 다스리며 영생을 받도록 규정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담은 타락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인간은 사탄과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를 만들지 않으셨는데 아담은 왜 타락하게 되었는가? 루터의 대답은 명쾌하다. "하나님은 그 창시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명령하시지 않고 도리어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금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마와 우리의 의지가 죄의 원인이다."
그렇지만 비록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보존하실 수 있지만 허용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루터는 이것에 대하여 물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배드려야 하는 하나님의 "위엄의 비밀들"에 속하는 영역이다. 단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나의 아들을 준다고 하는 인생에 대한 나의 인자함이 알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라고 대답하실 것이다. "아담 안에서 인류의 타락이 없다면, 죄와 죄책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전체적인 것을 체험하지도 또 알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인간에 관한 논제"23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만일 그를 믿으면) 벗어날 수 있게 되며 영생을 선물받게 된다."
4. 죄인인 동시에 의인인 인간
루터의 인간 이해의 또 다른 일면은 인간을 변증법적 이해를 통해 보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1519)에서 '두 전인과 한 전인이 있다"(Sunt duo toti homo et unus totus homo)고 말한다.
두 종류의 전인, 즉 영적인 전인과 육적인 전인이 있지만 이것은 각기 한 사람의 전인을 의미한다. 현실인을 의인인 동시에 죄인으로 설명하는 신학형식에서 보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루터는 관계적 현실이해 안에 있는 인간을 염두에 두고 있다. 결과적으로 영과 육의 성경의 구분은 각자가 결코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닌, 하나님의 판단의 시각에서 본, 전인의 삶의 형식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철학적 인간론에 대한 루터의 결정적 거절이다.
1532년 시51편 2절에 대한 강의에서 루터는 "하나님과 인간을 인식하는 것은 신적인 지혜이며 본래적인 의미에서 볼 때 신학적이고, 게다가 그것은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학의 대상은 곧 죄인이며 잃어버린 인간인 동시에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였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기 인식이 있을 때에만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동시적(同時的) 이해는 언제나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전제로한 관계적 인식을 의미하며 인간이 하나님 앞에(coram Deo) 설 때에만 '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볼 때 죄인 안에 있는 이성은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는 '자기에게로 구부러진 인간'(incurvatus in se)이다. 이런 인간이 의지할 곳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뿐이다.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은총에 의하여 즉, 신적인 전가(傳價)에 의하여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철저히 '자기 밖에서' 의롭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고, 완전히 치유할 때까지 실제로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확실한 언약과 전가에 근거하여 의로운 것"(peccator re vera, Sed Iustus ex reputatione et promissione Dei certa)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simul peccator et iustus)이다.
5.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는 인간
루터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는 가운데 귀속되어 있는 권세를 나타내고자 할 때 '육'과 '세상'과 '악마'에 대해 거론한다. 이것들은 하나님께 반대하는 의지를 내포한 것들로서 인류 전체를 내포하는 어떤 인격적 의지의 영향인 동시에 그 영역이다.
여기서 루터가 논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큰 상대자로서의 악마이다. "악마는 하나님의 본원적이며 가장 강대한 적대자로서 범사에 하나님께 대항한다. 그는 하나님께 대항하여 죄와 불복종의 나라를 창건하였다. 그는 첫 인간들을 죄로 유혹하였고 아직도 계속하여 유혹하는 자요 충동하는 자이다. 그는 역사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진리와 복음에 대항하여 역사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의 공동체에서 그를 핍박한다." 악마의 일은 성서의 그릇된 해석과 가르침, 철학 뒤에 서있으며 신앙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변조한다. 인간을 강퍅하게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에 놀라지 않도록, 자신의 가련함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며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한 희망없는 절망을 가져오게 한다.
이러한 악마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와 대립하며 인간 곁에서 위협하고 유혹한다. 이런 악마와 하나님의 싸움은 인간, 인류에 대한 지배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없는 곳에는 악마의 나라가 있다. 그 사이에는 어떠한 중간적 나라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 있다. "인간은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사건 가운데, 그의 구원이나 멸망의 사건에 있어서 어떠한 자유도 없는데,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세력이나 사탄의 세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악마의 권세에서 인간을 탈취하신다. 인간은 세례 안에서 이 자유를 얻으며 이 자유는 악마와의 필생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삼을 때 유지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악마를 "죽이는 것을 가르쳐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는 여전히 세상과 역사에서 머물러 있기에 그리스도의 세계는, 다시 오실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악마를 궁극적으로 쳐부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루터의 악마에 대한 인식은 "악마 또한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으로 정향된 그의 의지와 역사에도 불구하고-필경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봉사한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봉사하게끔 하시고 자신의 행위를 위하여 그를 사용하신다. 그는 그를 무엇보다도 그의 진노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그의 진노에 있어서나 그의 은총에 있어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불행과 몸과 영혼의 고난과 죽음을 사용하시는데, 그것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겸손케 하고 그들을 모든 이 세상적인 것에 대한 신뢰로부터 오로지 그 분에 대한 신뢰로 이끌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치신다 할지라도, 언제나 자비로우신 그 동일하신 하나님과 언제나 관계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과만 관계한다. 사탄이나 율법은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과 사탄은 때로 동일한 일을 인간에게 행하지만 그 의도는 서로 다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으로 몰아 가지만 사탄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탈취하려 한다. 악마는 인간들의 죄사함에 대하여 절망하도록 이끌지만 그리스도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를 취하도록 하신다.
만일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도로 찾으시고 그 자신에게 불러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양심의 휴식과 평화를 가질 수 없으며 악마, 죽음 및 지옥을 피할 수도 없으며 우리 자신을 돕거나 권면할 수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오고 믿음 가운데 있을 때도 만일 그리스도 자신이 이 동일한 말씀과 그의 능력으로 부단히 우리를 높여 주시고 받쳐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음 가운데 보존하거나 지속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낯선 행위"(opus alienum)를 위하여 사탄을 사용하시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 그는 언제나 그의 "자신의 행위"(opus propurium)를 의도한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opus alienum은 도구와 통로에 불과하지만, 사탄에게 있어서 그것은 목표, 곧 삶의 파괴의 자기목적이다 ; 하나님은 사탄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동시에 사탄에 대항하여 그에게서 구원해 주신다.
6.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
하나님의 의는 죄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진노가 된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는 거룩한 질투심을 가지고 그의 유일한 신성의 영광을 살피신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이외에 다른 사람을 주님으로 받들고 자기 대신에 그리고 자기보다 더 많이 다른 무엇을 사랑하는 것-그러나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을 감내할 수도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다. 이 열성은 죄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진노가 된다. 그에게는 벌할 뜻과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현실이며,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며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하신 것처럼 그의 진노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그의 진노 가운데 참으로 '소멸하는 불'로서, 철두철미하게 멸망시키신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은 사랑이시며 진노는 본질상 그에게 낯선 행위(opus alienum)이다. 죄에 매여 있어 믿을 수 없는 죄진 인간은 그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를 체험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망상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의 예증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믿지 않는 사람 위에 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벗어난 인간은 진노 아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는 더 이상 진노가 없으며 낯선 행위는 사랑의 자기 행위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진노를 화해시키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opus alienum(낯선행위)과 opus proprium(자신의 행위)의 변증법,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가 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분명한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그의 사랑에 대한 신뢰로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신앙에게서 '엄격함의 진노'(ira severitatis)는 '선하심의 진노와 아버지의 채찍'(ira benignitatia et flagellum patris)으로 바뀐다. 진노는 그의 '자신의 행위', 곧 사랑을 의도로 한, 하나님의 '낯선 행위'로 이해된다. 진노는 사랑의 수단이며 아버지의 징계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사랑에 봉사하고 있음은 복음의 신앙 안에서 인식된다.
진노는 인간을 놓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식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체험하는 곳은 율법이며 그와 더불어 양심이다. 율법은 본래 하나님의 진노의 수단이 아니었다. 원 상태에서 인간은 그것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를 억눌렀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그것은 전적으로 다르게 되어버렸다. 인간은 율법을 더 이상 성취할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이전에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수단이었던 것이 이제부터는 그의 진노의 도구가 된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이 죄를 짓는 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에서이다. 하나는 인간이 율법을 결코 성취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기 만족과 율법성취에 대한 자기 자랑 곧 자기의 의를 세운다는데서 죄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를 알게 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하여 절망하는 것보다 큰 죄는 없다. 율법아래 있는 인간은 율법에 대한 방자함과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성취 불가능성을 통찰함으로 더욱 큰 죄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다. 그것은 바로 지옥이다. 지옥은 악한 양심의 형태로 인간을 내적으로 치는 하나님의 진노를 통하여 지옥이 된다. 이 지옥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체험하는 것처럼 현재적이며 실재적이다. "모든 사람은 그가 죽음의 단말마와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는 한, 자기가 존재하는 자기의 지옥을 자기와 더불어 갖고 있다." 이런 진노의 치명적 결과 아래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함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넘어설 수 있다. 죄인인 인간은 이것을 할 수 없다. 인간 그 자신은 진노아래 머물 뿐이다. 단지 하나님 자신만이, 만일 그가 복음과 더불어 인간과 만나시고 그의 영을 통하여 그의 마음을 신앙에로 여신다면, 이 감옥을 여실 수 있다.
나가는 말
루터로부터 비롯된 종교개혁은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재발견을 가능하게 하였다.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은 인간의 존엄과 하나님 앞에선 독립적 인격으로서, 제 1계명이 지시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양면의 책임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가 강조한 '만인제사장직'(die Allgemeine Priesterheit)은 안수받은 사제에 대한 불필요성을 지시하거나 인간의 가능성(능력) 혹은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을 향한 사랑과 봉사의 의무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루터는 결코 인간 각자가 성서를 주관적이고 독선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진리에 근거하여 겸손한 태도로 개인의 실존과 직접 관계된 뜻을 그 말씀 속에서 발견하려는데 본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실존을 올곧게 보는 영적인간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영적인간은 자신 스스로 제 운명의 지배자가 된다는 인간중심의 세계관이 아니라 '자기를 향해 구부러진' 인간을 끊임없이 사랑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은총 앞에서 그 사랑의 실체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뒤쫓는 사람이다. 그는 여전히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만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의 인내로 죄인조차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 아래 있는 것이다. 은총 아래 있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거스려질 수 없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을 죄인인 채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인간은 하나님으로 인해 존엄성을 갖는 존재이다. 그의 자기를 십자가에 내맡기는 철저한 자기 부인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열쇠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에 의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을 통하여서 의로우시며 그의 말씀과 우리 안에서 의로우시다.
각주
1) 파울 알트하우스, 「마르틴 루터의 신학」 구영철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94.
2) Ibid., 187.
3) Ibid., 188-189.
4) Ibid., 192.
5) 10 Ⅲ, 168, 19 : Ibid., 192-193.
6) 7,38,6: Ibid., 193-194.
7) Ibid., 203.
8) Ibid., 204.
9) Ibid., 206.
10) 39 Ⅰ,459,17 : Ibid. 207.
11) 39 Ⅰ,230,7 : Ibid.
12) 7,212,4 : Ibid., 208.
13) 56,178,24 :179,13 quod facit ipsa complacentia(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이 이것을 행한다)
Ibid.
14) Luther, "On the Bondage of the Will", Luther and Erasmus:Free will and Salvation,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edit, trans. Rupp, E Gordon&. Watson, Philip S(Philadelphia:Westminster Press,
1969), 266.
15) 56,356,4,27 : 357,2 : 파울 알트하우스, op. cit., 210.
16) M. 루터, 탁상담화, 140. : M. 루터, 「탁상담화」 지원용 편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3), 64.
17) 7,800,24 : 파울 알트하우스, op. cit., 211.
18) Ibid.
19) Ibid., 214.
20) 39Ⅰ,233,2 : Ibid.
21) Ibid., 215.
22) 루터는 이웃사랑에 대하여 자신의 논문 "크리스챤의 자유"에서 그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 논문은 1997년에 컨콜디아사에서 지원용 편역으로 출간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에 번
역, 전재되어 있다.
23) 파울 알트하우스, 217.
24) Ibid., 218.
25) M. 루터, "크리스챤의 자유"「마틴루터의 종교개혁 3대논문」지원용 역,(서울:컨콜디아사, 1997),
295-296.
26) 10Ⅰ,1,508,6.-8,104,26 : 파울 알트하우스, op. cit., 219.
27) 40, Ⅱ322,20 : ...peccatum esse hoc totum, quod est natum ex patre et matre, antequam homo
possit per aetatem aliquid dicere, facere aut cogitare.
Ibid.
28) Ibid., 220.
29) 2,509,34 : Ibid., 221.
30) Ibid., 222-223.
6,275,22 : Sed inspice totum hominem plenum concupiscientiis(non obstante istomotu parvissimo)
31) Luther, Lecture's on Galatians(1531), trans and ed., Jaroslav Pelikan, Luther's works, Vol.26(St.
Louis:Concordia Publishing House, 1958), 216.
32) Luther, "On the Bondage of the Will", op. cit., 31.
33) Ibid.
34) M. 루터, 탁상담화 63. : M. 루터, 「탁상담화」 지원용 편역, 37.
35) Luther, "The Disputation Concerning Justification", Luther's Works, Vol.34(St. Louis:Concordia
Publishing House, 1958). 68.
36) ① 루터의 종속의지 혹은 노예의지론은 많은 점에서 해석이 난해하다. 이 책은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 책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과의 관계성 속에서 그리고 루터가 신적인 필연
성을 강제력(coactio)과 우리의 선택의 자유(liberum arbitrium)에 어떻게 연결시키고, 감추어진 하나님
(Deus absconditus)과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을 어떻게 관련시키는가에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루터교의 고백서들은 노예의지론에서 루터가 주장한 극단적인 주장들을 채택하지 않았다. 후기 작품들에
서 루터 자신도 예정론의 문제를 보통 기독론의 관점에서 논의하였다.
베른하르트 로제, 「루터 연구입문」 이형기 역(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186-187.
② 루터의<노예의지론>은 지원용 편집 「루터선집」 제6권 -교회의 개혁자Ⅱ(서울:컨콜디아사, 1982),
21-321에 번역 전재되어 있다.
③ 루터의 '감추어진 하나님'에 대한 연구는 전경연, "노예 의지론과 루터의 하나님 이해", 「루터연구」
제3호(서울:컨콜디아사, 1966),1-11을 참고할 것
37) 39 Ⅰ,378,27 : 파울 알트하우스, op. cit., 224.
38) 16,143,5 :Ille autem, qui facit (malum), malus est, quia legem habet(그러나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악하
다. 그것은 그에게 율법이 있기 때문이다)
Ibid.
39) 8,636,16 : Ibid., 225.
40) 39Ⅰ,84,16 Hoc est peccatum originale post lapsum Adae, nobis ingenitum et non tntum
personale, sed et naturale
Ibid., 226.
41) 40Ⅱ,323,10 Creavit deus hominem rectum(하나님은 인간을 의인으로 창조하셨다)
Ibid.
42) 인용한 루터의 "인간에 대한 논제"는 정흥열, "루터의 인간론에서 전인개념 : 루터의 "인간에 관한 논
제"(1536)를 중심으로"「기독교사상」통권 478호,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8. 10.에 번역 첨부된 자료이
다.
루터의 이 논제는 지원용이 편집, 1982년에 컨콜디아사에서 발행한 「루터선집」제6권 -교회의 개혁자Ⅱ
의 359-366쪽에도 "인간에 관한 토론문"이란 제목으로 논쟁이 첨가되어 번역 소개되어 있다.
43) 루터, "인간에 관한 논제" 22 ;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은 사탄의 권세 아래로, 즉 죄와 죽음
이라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영원한 두 개의 악의 권세로 떨어지게 되었다."
44) 39Ⅰ,379,4 : Deus non est autor, quia ipse non jussit, sed prohibuit magis, ne peccemus. Sed
diabolus et voluntas nostra sunt causa peccati.
파울 알트하우스, op. cit., 226.
45) 18,712,29 : Ibid.
46) 18,712,25,29 : Ibid., 228.
47) Ti 5071. : Ibid., 229.
48) 정흥열, op. cit., 54.
49) B. Lohse, Luthers Theologie in ihrer historischen Entwicklung und in ihrem systematischen
Zusammenhang, Goetingen, 1995.(이하 Lohse, Luthers Theologie로 표기함) 미간행 정병식 역 중 "하나
님과 인간의 인식" 중에서
50) B. Lohse, Luthers theologie, 미간행 정병식 역 중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 중에서
51) 파울 알트하우스, op. cit., 231.
52) Ibid., 232-233.
53) 18,743,32 :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이 사탄의 나
라와 영 아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그것은 상호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싸운다-사이에는 중간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Ibid., 234.
54) Ibid.
55) Ibid., 235.
56) 40Ⅲ,519,13 : Ibid., 236.
57) 40Ⅲ,517,4 : Ibid., 238.
58) 40Ⅱ,417,5 : Ibid.
59) 40Ⅱ,417,30 : Ibid.
60) Ibid., 239-240.
61) M. 루터, 탁상담화, 110. M. 루터, 「탁상담화」 지원용 편역, 52.
62) 파울 알트하우스, op. cit., 240-241.
63) Ibid., 243-244.
64) 28,557,8;558,4;559,5;581,13 : Ibid., 244.
65) 40Ⅱ,343,3 : Ibid., 246.
66) 28117,30 : Ibid.
67) Ibid.
68) Ibid., 247.
69) 3,69,24 : Ibid., 248.
70) Ibid.
71) Ti 5554a;6670;1179 : Ibid., 249.
72) 19,210,7;226,12 : Ibid., 250.
73) 39Ⅰ,364,10 : Ibid.
74) Ibid.
75) 5,557,4 : Ideo statunt suam justitiam, arbitrantes pro caecitate sua, se legem implevisse.
(그러므로 그들은, 눈이 먼 관계로 자기들이 율법을 성취하였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의를 세운다.)
Ibid., 251.
76) 5,557,10 -39Ⅰ,50,26 :Ubi vero coeperit homo arguente spiritu hanc vim (legis) sentire et
intelligere(그러나 거기서 인간은 영의 표명 가운데서 이 (율법의) 능력을 느끼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Ibid.
77) 19,225,28 : Ibid., 255.
78) 19,222,11,16 : Ibid., 256.
79) Ibid., 257.
80) 지원용, 「루터와 종교개혁」 (서울:컨콜디아사, 1988), 159.
81) Iustitia passiva : Lohse, Luther's Theologie, 정병식 미간행 역본, "죄의 개념" 중에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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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흥열, "루터의 인간론에서 전인개념 : 루터의 "인간에 관한 논제"(1536)를 중심으로"「기독교사상」통권
478호,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8. 10
이승호, "칸트와 루터의 인간이해와 구원", 장로회신학대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