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직신학/인간론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관계(1)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관계(1)
놀만 그럽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무기력하고 분리된 죽은 생활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는 육비 속에 쓰여진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올바른 생활을 해야 할 것은 알고 있으나 실천해 옮길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대표가 되셔서 자기 몸으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범한 모든 율법에 대한 형벌을 우리 대신 받으셨고, 이로써 주님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케 하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거기서 끝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외적으로 나타난 법전들을 근원부터 없애 버리셨다.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 이유는 외형적인 법은 천성적으로 법을 지킬 수 없고 범법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은 오직 불법한 자를 위함이니"(딤전 1:9). 사람들이 내적인 본능으로 율법을 지키게 되면 외형적인 법은 필요 없게 된다(갈 5:23). 인류가 그들의 것짓 신을 좇아 생활했기 때문에 외형적인 율법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 거짓 신은 무법의 신이며, 독립된 자아의 신 곧, "악한 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과 내적으로 연합하여 예정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찰라, 외형적인 율법은 그를 위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해 놓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게 한 것이다(롬 7:4).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셔서 죄에 물든 사람처럼 죽으셨다. 그리고 그는 죄에 대하여 죽은 새 인류처럼 부활하셨으며, 이 새 인류는 주님을 영접한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살아 계신 주님께서 그들의 생명이 되시며, 그들을 위하여 법의 생활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서는 외형적인 율법이 장사된 것이나 다름없다. 바울이 로마서 7:1-6에서 대담하게 묘사한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옛 남편이 죽은 것인데 이는 우리가 다른 분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며, 거룩한 나라인, 믿는 사람들에게는 외형적인 율법에 호응해야 된다는 생각도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와 같은 의무적인 생활이나, 유치한 생활은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굴레에 갇혀 있었을 때와,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나기 전 자기 노력의 옛 생활을 했을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생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이 없는 기록된 율법의 공식들을 주셔서 우리가 마귀와 같이 고정되는 것을 방지하셨다. 물론 이것들을 지킬 수 없었으며 또 지키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다만 우리가 이것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죄가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었을 뿐이다(롬 3:19). 율법은 우리에게 초등 교육 시키는 것을 완료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율법의 학교에서 영원히 졸업하고 새 학교 곧 믿음의 학교에 입학 것이다. "정죄의 직분"으로 우레에게 제시되었던 모세의 율법의 한 부분은 이제 완성된 율법이 되었다. 그리고 율법의 창시자와 율법을 주시는 분과, 율법을 지키기는 분이 되신 주님께서 친히 "육을 좇아 행하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롬 7:4) 우리 속에서 율법의 의를 완성하시었다. 마치 포도나무에서 가지가 나듯이 믿는 사람을 통하여 성령으로 맺어진 성령의 멸매들은 우리 속에서 지켜진 율법을 말하며, "이와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거하시므로 말미암아, 곧 자기 속에 살아 있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깨뜨린 모든 율법의 대가를 지불하셨으며, 이제는 우리 안에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친히 율법을 우리 안에서 지켜주고 계신다. 외형적인 율법이 이제는 더 이상 믿는 자들에게 요구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림자 진 땅을 밟고 있는 동안만 필요했던 것이고, 진정한 법의 모형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실물이 나타났다. 그것은 우리 속에 계신 진정한 법 그 자체이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배워야 될 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외형적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이제는 우리가 내적인 법인 그리스도 자신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외형적인 율법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율법 가운데서 율법에 둘러 쌓여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심판 아래 있고 율법 아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은 이 세상을 보존하고 정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의 요구에 호응하기는 너무나 쉬운 일이며,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기 노력으로 사는 생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중생하지 못했을 때에는 항상 자기 노력으로써 우리 생활을 영유해 왔기 때문에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그 생활에 젖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믿는 사람을 위하여 율법이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그처럼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로마서 7장이 로마서 6장 다음에 나오는 사실을 보고 의아해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순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있다. 물론 그렇지 않다. 로마서 3장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율법에 대한 교육을 시키는 것이라면, 로마서 7장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거기서는 그의 죄를 노출시키고 있고, 여기서는 그의 무력함을 나타내고 있다. 거기서는 옛 사람의 죄에 대한 심판을 선고하고 있고, 여기서는 새 사람 속에서 간교하게 역사하는 죄를 노출시키고 있다. 로마서 7장이 로마서 6장 뒤에 나오는 이유는 그것이 옛사람에 대하여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만 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런 사실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로마서 6장은 우리의 옛 사람이 축출되는 장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지배했던 거짓된 이기주의적인 영으로부터 단절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다. 우리의 대표로 돌아가신 똑같은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다. 우리 때문에 지셔야 했던 무서운 죄와 분리된 채 아버지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사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 부활하신 분이시다. 이와 똑같이 우리도 불순종의 옛 영으로부터는 분리되었고, 그 대신 그 거룩하신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되었으며, 주님 안에서 새 사람들이 된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새 관계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그것을 믿음으로써 쟁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자와 같이 자신들을 주님께 연결시켰다. 이와 같은 믿음의 중대국면에서 우리는 이제 로마서 7,8장의 믿음의 생활과 싸움으로 넘어가게 되면 계속해서 마지막 장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시발점은 우리 교육의 다음 단계인 로마서 7장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자기 노력으로 살지 않음으로 더 이상 죄의 영역 아래 있지 않다. 그러나 새 사람에게는 이제 자기 노력 가운데 빠질 위험성이 많은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으며, 하나님의 율례와 생활규범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따라 사는 것처럼 자연스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찾아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무기력함을 알아야한다. 새로운 자아는 옛 자아와 똑같이 무기력하다! 그것은 원래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옛 자아는 이기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새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롬 7:22). 그러나 새 자아도 별 수 없으며 그런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래서 새 자아는 지혜롭지 못하게 함정에 빠져 버리게 되며, 그런 교훈을 어려운 방법으로 배우게 된다. 로마서 7:7-13에서 바울은 이런 교훈을 배웠다고 말해주고 있고, 또 그것을 어떻게 배웠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로마서 7:14-24에서는 새 자아가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이탈해서 스스로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려고 들 때 새로운 굴레 가운데 갇히게 됨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때 또 다른 원리 곧 율법이 무섭게 자기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 노력은 죄이다. 그것은 자아가 자기 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시 노력은 즉시 옥심적적이고 정욕적인 자아의 욕구와 본능이 왕노릇하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는 무기력하기 때문에 이를 저항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이류 때문에 우리는 자아 의식과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자아, 혼과 영 사이에서 진동하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해답은, 율법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관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제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이후에도 새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계속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는 아직도 그는 결국 그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심청 사나운 육신의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울이 외친 것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외칠 때까지 그런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새 생명의 기본적인 문제는 죄가 아니라 율법이다. 어떻게 그가 자기 앞에 놓여있는 이와 같은 절대적인 기준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것을 회피 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그의 눈은 뜨이게 된다.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이다. 이것은 그로부터 영원토록 요구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부과 된" 첫째 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 법은 은혜의 법(원리)이다. 그것은 그가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란, 내주하시는 율법을 주시는 분과 율법을 지키시는 분이 스스로 믿는 사람 속에서 자기의 온전한 율법을 지키시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의문은 풀렸고 모든 질문은 응답되었다. 외형적인 율법은 자아에 대한 요구를 가지고 믿는 사람들을 무기력한 자아를 인식하는데까지 데리고 왔다. 
그 다음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이신 내적 율법으로 대치시켰다. 그러므로 율법은 교육의 임무를 완수하였는데, 첫째는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에는 무기력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이 둘째 교훈 곧 외적인 율법의 요구에 대한 잘못된 자기 호응을 일체 거부하고 그 대신 그 때마다 내 속에 게신 율법을 주시는 분의 인도와 지배를 받아 늘 자유 가운데 거하는 것을 배울 때까지는 일상생활 중에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자기 의존, 자기 반응, 자기 노력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고 말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관계(2)
놀만 그럽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무법의 영역에서 벋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리하시는 초보적인 영역이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분리된 영역이었으며, 율법과 무법의 영역이었다. 우리는 이제 오직 선(善)만 있는 영역으로 은혜에 의하여 올라가게 되었으며, 그것은 예수님이 전부이시고, 모든 것 심지어는 악한 것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곳이다. 그곳에는 분리된 마음이 없다. 한편으로는 선을 사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악을 사랑하는 것이 없으며, 한 편은 율법, 다른 한 편으로는 무법이 되는 경우가 없다. 다만 옛 사람들처럼 온전한 심령으로 와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능력으로 그를 사랑하고, 살앙계신 율법이 자기 의를 우리 속에서 친히 이루시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이 로마서 7장의 갈등으로부터 해방되어 로마서 8장의 자유와 승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말하는 것 같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율법과 죄는 오직 독립적인 자아의 영역에서만 작용한다. 이는 독립적인 자아가 곧 원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독립적인 자기 활동의 생활 습성 가운데 젖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그 가운데로 다시 떨어지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 가운데라 함은 로마서 7장을 의한다. 우리는 조용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와 함께 생활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일에 대해 걱정하고, 가정과 사회와 교회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율법 가운데로 다시 떨어진 것이다. 우리는 사소한 문제나, 두려움이나, 잘못된 일이나, 우리를 거스리는 사람들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말아야 됨은 뻔히 알고 있고 또 노력도 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정죄하는 마음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리는 율법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율법 아래는 죄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했고, 율법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기 때문이다. 죄와 율법의 싸움에 있어서 죄는 백발백중 이긴다.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이는 죄가 독립적인 자아인 육신 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처소를 잊어버리고 나의 독립적인 자아의 상태로 되돌아감으로써 율법의 소용돌이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율법의 정반대되는 죄는 나의 육신을 통하여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다시 한 번 노예가 되고 만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정상적인 거처는 그곳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롬 8:9).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을 주시는 분과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서 자기의 사랑의 법을 성취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반복하겠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세상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을 수밖에 없고 율법 아래 있는 세상은 초보적인 단계에 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교적인 의무감이나, 예배나, 가정과 사회와 사업과 국가에 대한 일을 통하여, 혹은 일반적인 생활을 통한 유혹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영역 가운데로 떨어지기 쉽다. 그리고 우리가 율법 아래 있으면 다시 육신 가운데 있게 되고 로마서 7장 가운데로 돌아와서 헛된 갈등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율법은 오직 자기 스스로 있고, 그리스도 없이 활동하려는 사람만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되면 비록 순간적이나마 육신이 나타나게 되고 육신 가운데는 죄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명확히 이해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옛 자아는 없어졌다. 주님 안에서 구속된 자아는 원래 창조된 목적대로, 원하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태도로 자기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용기(그릇)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은혜와 몸의 부활로써 연합하게 될 마지막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자기의뢰의 세상과 섞여 살고 있다. 그리고 주님을 의뢰하는 새로운 자아는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자기 의뢰의 형태로 빗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또 다시 율법과 자아에 대한 율법의 요구의 해묵은 싸움 가운데 들어가게 되며, 율법에 대항하는 육신의 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는 또 한번 싸우고 갈등하고 실패하는 영역 가운데 처하게 된다. 그래서 새 사람을 좇아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새로운 "나"는 자기의 창조의 법칙에 따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완전히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을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나의 피난처되시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이탈하는 순간 완전한 패배를 맛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배우고 또 깊이 배워야 할 사실은, 새로운 "나" 곧, 선한 "나"도 옛날 "나"와 똑같이 무기력하여 자기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하려고 할 찰나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율법은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한다. 죄인들 속에 있는 죄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그가 죄인임을 선포한다(롬 3장). 또 성도들 가운데 작용하는 죄의 권능을 드러내 주고, 그가 무기력함을 나타내 준다(롬 7장).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왔으며, 죄인들과 성도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사역을 했고, "더 큰 영광"이 왔을 때에는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복음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율법을 왜 그처럼 강조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심판받을 죄인으로 우리를 몰아(롬 3:19)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를 씻게 한다. 그 다음은 실패하는 성도로 우리를 몰아(롬 7:18), 내주하시는 성령 가운데 사는 새로운 생활로 곤고함을 우리 속에서 몰아낸다(롬 7:24, 8:2-4). 그래서 우리도 역시 바울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므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관계(3)
놀만 그럽
이 시점에서 우리는 율법이 우리를 계속 정죄하는 위험성에 대하여 명백히 하고 넘아가는 것이 좋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로마서 8:1에서도 경고하고 있다. 아마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행하게 하고 비효과적으로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이다. 칭의 평안을 통하여 무서운 율법의 천둥으로부터 피하게 되자 이제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부족한데를 율법이 손가락질함으로써 항상 우리를 괴롭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며, 그것도 매일 그러하니 말이다. 그럼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우리는 주님 안에 숨겨졌고 또 주님 안에 거하나, 사탄과 그의 악당들은 이 일그러진 세상이 주는 유혹과 방해공작을 통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의 욕심에 끌려 미혹"되고, 때때로 이에 순응하여 범죄하게 된다(약 1:14,15). 이것은 과거에 지었던 야단스런 죄나, 혹은 지속적으로 짓는 죄가 아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구원받은 것이 아닐 것이다(요일 3:9). 그러나 우리의 심령과 마음의 그릇된 자세나, 성급한 말이나, 자기 중심적인 것이나, 조급함이나, 안목의 죄나, 섬세한데까지 거룩하지 못함과 같은 죄가운데 빠지므로 우리는 애통해 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무감각하게 살 때에는 전혀 느끼지 못하던 죄들이다. 그리고 육신에 의하여 흠이 생기는 순간 그것을 곧 깨끗이 하지 않게 되면 율법이 즉시 작용하여 우리는 정죄함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시 한번 로마서 7장의 자아-율법-죄의 영역 가운데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데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으며, 신속하게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첫째로, 형제는 참소하는 자의 커다란 거짓말에 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우리의 우치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하며 우리 속에는 아직도 "옛 사람"이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말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용납하고, 이로써 그들 속에 아직도 분리된 자아와, 분리된 심령과, 분리된 성품을 갖고 있다는 그릇된 가정 아래서 이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갖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개념은 계속적인 투쟁이며, 옛 성품과 새로운 성품이 순번적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이 말씀은 믿는 사람 속에서 똑같은 두 개의 성품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한 번에 한 성품만을 소유할 수 있고, 그 성품이 곧 우리 자신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으나, 이제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중간점이 있을 수 없다. 옛 성품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새 성품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속에서 사시는 새 사람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 5:17의 육신과(구속받은 인간)의 싸움은 로마서 7장의 교훈을 몇 마디로 함축해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성령으로 살며, 생활하며, 인도함을 받는다(갈 5:25, 16, 18).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갈 5:24) 육신(독립적인 자아)를 좇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육신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율법이 오직 독립적인 자아에게만 자기 요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5:18). 율법이 우리에게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육체 가운데서의 죄의 작용)은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에 의하여 자극이 될 가능성도 없으며(육체의 소욕이 영을 거스리는 것), 우리의 무기력한 자아도 주관할 수 없게 된다(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동안 우리는 그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도 죽은 것이며, 그 죄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육체와 자기 노력 가운데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육체 가운데 있는 죄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새로 탄생할 때 해결지은 새 성품과 옛 성품의 문제가 아니다. 이 "육체와 영"의 문제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우리가 다시 육체 가운데로 돌아가 결국 죄와 율법과 정죄 가운데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육체 가운데 빠진다고 해서 옛 상태로 완전히 되돌아 간다는 마귀의 가짓말에 넘아거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두 인격체가 되어 우리 손에 선한 성품과 악한 성품이 서로 싸워 누가 이길른지 모르다는 그릇된 굴레 속에서 살아도 안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대개 이런 개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확신있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사탄이 우리를 붙들었을 때 비록 잠시나마 그의 정죄 가운데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란 가장 쉬운 일이며, 사실상 우리의 걱정은 자기 연민과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주님을 슬프게 해 드린 것 때문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실패한 것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다. 정죄를 용납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의(義)를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하면 속히 빛 가운데로 나와서 죄를 인식하고 자백하라고 하셨으며, 그렇게 할 때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정죄 가운데 계속 머문다는 것은 사실상 불순종하는 것이며 자학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 걸려서 넘어지게 되면 겸손하게 그것을 시인한다. 그리고 깨끗케 하는 보혈을 의지한다. 그 다음 기뻐하며 자기 길을 간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이런 단순한 경험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는 간증으로 사용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