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는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는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아담이 실패한 행위 언약의 실천 조건을 획득하신 사망에서 건지심뿐만 아니라 생명을 얻는 언약의 성취로서 율법의 요구에 순종함으로 사망에서 건지시고 생명을 얻어 주시는 언약 성취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지막 아담으로 그리스도가 보이신 순종이며 중세처럼 그 순종을 우리 몫으로 돌리는 신학에 대한 명백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부정은 행위 언약의 부정, 원죄 교리의 해체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전의 고백 문서들과 달리 WCF는 행위언약 교리를 명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중세적 이해를 가진 신학자들이 있어서 통합을 위한 고백서로서 일부 명료하지 않은 표현을 썼지만 고백서 전체적 맥락에서 종교개혁의 이해인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분명히 표현 했습니다.

신학의 발전사를 다룰 때, 우리는 삼위일체나 1위2성 교리를 후대에 더해진 불필요한 교리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더 명확히 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상식적이며 자연스러은 이해입니다.

그 증거는 십여 년 어간에 등장한 사보이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능동적 순종을 반대하는 이들은 이 신앙고백을 빌미삼아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을 회중주의의 산물로 오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603년 사망한 명백한 장로교주의자인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책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고백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 교의가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적 구조물이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

토마스 카트라이트 (Thomas Cartwright, 1535-1603)

청교도 1세대

그는 Hertfordshire에서 태어나 캠브리지 St. John's College에서 공부했다. 1553년 피의 여왕 메리가 즉위하던 해, 카트라이트는 대학에서 추방되어 변호사들을 위한 서기자리를 얻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고 5년 후 다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 캠브리지 St. John's College의 교수로 그리고 그 후 Trinity College의 교수로도 임명되었다.

1564년 당시 신학자로 명성을 날리던 토마스 프레스톤(Thomas Preston, 1537-1598)과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논쟁을 통하여 청교도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특별히 Amagh의 대주교인 Adam Loftus와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 1569년 그는 영광스럽게도 캠브리지의 레이디 마가렛 신학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사도행전 강의를 통해 하나님의 법에 기초한 장로교적 교회체제를 제안하면서 각 교구 내 치리를 위한 장로의 선출, 회중에 의한 목사의 선택, 그리고 대주교좌나 부주교좌 등의 폐지와 성직의 동등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캠브리지의 대학 부총장으로 임명받은 John Whitgift(1530-1604)에 의해서 교수직에서 파면되었다.

그 결과 장로교 성향을 가졌던 카트라이트는 성직제도와 영국 국교회 제도에 대한 분명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Whitgift와의 첨예한 대립으로 결국 그는 목사직에서 파면되고 제네바로 건너가 베자를 만나게 되었다. 1572년 영국으로 돌아와서 캠브리지의 히브리어 교수로 복직하였다. 그는 "오직 주께서 친히 그의 말씀에서 명령하신 것들만을 교회 안에 있게 해달라"고 John Field ( - 1588), Thomas Wilcox(1549?-1608)와 함께 국회에 청원하였다. 그는 체포당하였으나 탈출하여 덴마크의 Antwerp와 네덜란드의 Middelburg에서 피난온 영국 회중들을 위한 목회를 하였다.

1576년 그는 프랑스 위그노를 위한 방문하여 장로교제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는 그들을 위한 신약성경을 출간하였고,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류 대학의 교수직을 정중히 사절하고 위그노들 위한 목회자가 되었다. 1585년 11년의 망명생활을 끝으로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체포당했으나 몇 명의 호의를 가진 사람들 덕분에 풀려나 워빅크 병원의 원장이 되었는데 그곳은 말하자면 영국 국교회의 관할에서 제외된 곳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면허없이 그의 목회사역을 성취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비교적 평화스러운 상태로 그의 삶의 마지막 몇 해를 보낼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