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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원죄 교리를 부정하는 신학

원죄 교리를 부정하는 신학

ㅈㅇㅊ이 나를 이단이라 정죄하면서 #오염의_생식법에_의한_전달의_교리를정죄했다. 그러면서 영적 전가를 주장했다. 죄는 죄책과 오염으로 구성되어 있고 죄책은 행위 언약에 의해서 전가되며 오염은 생식법에 의해 전달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 교리를 정죄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신학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이 정죄의 함의는 원죄가 부모를 매개로 전달된다는 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며 동시에 그 결과는 전통적 원죄교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칭의는 법정적으로 우리 신분과 관계가 있는 반면 성화는 우리 자질과 존재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으며 죄된 본성에서 오염을 제거하는 것으로 성화를 말한다. 이처럼 원죄론과 구원론은 서로 거울을 맞보듯 치밀하고 정교하게 구조적으로 성경의 원리를 따라 짜여져 있다. 정통 교의에서 성화란 바로 이렇게 우리 몸과 영혼에 스며있는 죄의 실재적 세력을 제거로 설명하는데 ㅈㅇㅊ이 계속 성화가 자동으로 일어난다는 주장을 하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우리 몸에 실제적으로 배여 있는 원죄의 세력에 대한 기본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선포만으로 죄가 없어진다는 주장은 로마서 7:14이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우리 죄는 심대한 세력으로 우리 본성에서 유래하며 이 세력으로부터 자유한 적이 없는 사람은 사실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어도 분리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 구원이 법정적이기만 하지 않고 우리 삶에서 실제적인 죄의 세력을 소멸하는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점에서 이 자동 성화론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의 진술로 보건대, 원죄론의 헛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그의 눈에는 죄를 구성하는 죄책과 오염 중 부모를 매개로 생식법에 의해서 전달(propagation)되는 원죄 교리를 부정하고 이단이라고 정죄한 것이다. 이는 새관점 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http://repress.kr/2315/). 그런데 ㅈㅇㅊ의 신학은 이런 특징을 골고루 보여준다. 원죄교리의 부정, 행위 언약의 부정, 그리스도 능동적 순종의 전가 부정, 자동 성화론 등과 같은 그의 주장이 이런 방식으로 원죄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이해를 담고 있으며 그는 정통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묘하게 현대 새관점의 신학과 교집합이 많다. 차이점이 있다면 새관점주의자들은 윤리적 강조점을 강화하는 쪽으로 이동한 반면, ㅈㅇㅊ의 신학은 그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이는다는 점이다.

동시에 그가 칭의와 성화를 혼재해서 사용하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의가 율법의 순종, 곧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그리스도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적인 의라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그는 첫 기사에서 행위 언약에 의해 죄의 전가 교리를 주장하는 벌코프의 이해를 전면으로 논박한 바가 있다. 그는 아마 내가 벌코프와 같은 노선일 것이라 짐작치 못하고 그런 논박을 감행했겠으나 그는 이 번일로 역사적 장로교회의 신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논적이자 이단이었던 오시안더의 견해와 흡사하며 이런 그리스도와 우리를 동일 본질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다. 더 이상한 것은 전가된 의는 그리스도의 본질적 의로 보면서 조상으로부터 우리에게로 전가되는 죄는 본질적이 아니라 영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부패가 사실이 아니거나 허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기독교 2000년의 원죄 교리를 사실상 부정하는 현대 신학에 물든 특징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그의 이런 이해는 종교개혁이 #의의_주입을 거부한 것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으로서 중세적인 #의화_개념 혹은 칭의와 성화의 혼재를 보여준다. 종교개혁은 엄밀하게 칭의와 성화를 벼려내어 구분하되 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ㅈㅇㅊ의 신학에는 이런 혼재의 흔적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죄책의 행위 언약에 의한 직접적 전가와 오염의 생식법에 의한 전달이 생경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행위 언약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보지 않고 오직 십자가 대속으로만 보고 있다. 결국 그에게는 이 행위 언약이 지닌 개혁 신학 내에서의 연속성의 측면을 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두고 논쟁 중이지만 어쩌면 능동적 순종은 지엽적인 문제일지 모르겠다. ㅈㅇㅊ의 신학은 기독교 2000년 신학의 근간인 원죄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축소 및 왜곡하는 신학이 분명하다. 그것이 행위 언약에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도 도미노처럼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ㅂㄹ ㅁㄷ의 ㅈㅇㅊ의 사상은 기독교 신학으로 건전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