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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오염은 그냥 제거되지 않는다.

중세 신학은 의의 주입 때문에 믿은 후 곧바로 원죄 문제가 다 해결되지만 종교개혁 전통은 원죄를 원죄책과 원오염으로 구분하고 이것을 칭의와 성화를 통해서 해결하는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즉, 법정적 칭의에 의해서 믿은 후 곧 바로,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행위언약을 따라 전가받은 벌책(형벌적 책임)과 우리 자범죄의 모든 벌책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조상을 따라서 생식법으로 부모로부터 유전한 오염, 곧 죄의 세력은 금방 해결되는 구조가 아닙니다. 일생, 점진적으로 죄의 오염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여서 우리 안에 은혜가 주입되므로 믿음의 습관이 장성하여짐으로 제거되는 점진적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은 후 원죄가 곧 바로 모두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런 이해는 가톨릭적인 이해입니다. 죄의 전이 중, 오염의 전달을 말하지 않고 원의의 부재를 타락으로 여기는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는 믿음 후 곧 바로 원의가 회복되므로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종교개혁의 이해는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고 혹시라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가톨릭적인 이해이니 당장 고치시기를 바랍니다.

칭의는 믿은 후 즉각적으로 이뤄지지만 성화는 믿은 후 점진적으로 이뤄지면 칭의는 우리의 벌책을 제거하며 성화는 우리의 오염을 제거합니다. 특히 이 오염의 세력은 심대해서 금방 제거되지 않으며 제거 된 듯이 보이더라도 부패로 참 신자라도 타락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삶에 심대한 세력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경건했더라도 밧세바 문제로 간음과 살인에 이르게 된 것처럼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줄어들거나 은혜의 주입이 약화되는 상황 곧 은혜의 수단을 덜 사용하게 되면 당연히 죄의 세력이 강성해져서 넘어지게 됩니다.

오염은 선포로 제거되는 것이었다면 오염이라 말하지 않았을 것이며 굳이 죄책과 오염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