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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마태복음강해

나는 선지자를 죽이지 아니하였다?(마 23:29-39)

나는 선지자를 죽이지 아니하였다?(마 23:29-39) 


노승수 목사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29-30절은 섬뜩하게 우리 마음을 찔러 오지 않습니까? 성경의 역사는 과거 미련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의 완악함이요 우리는 그와 같지 않다고 많이들 생각합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만일 조상 때 있었다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팔다가 망했다는 역사를 지켜보고도 교회의 역사를 통해 교회가 권력을 가지고 돈을 가지고 큰 건물을 가지면 망한다는 사실을 보고도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무엇이라고 증거하십니까? 그렇다면 너희가 바로 선지자들을 핍박하던 자의 자손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더 타락해갈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브레이크가 그 기능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이제 그 본질을 스스로 회복하기에는 이미 선을 넘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가 지금보다 더 부요해지고 넉넉해지고 잘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회칠한 무덤들이 본색을 드러낼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서로 분명한 색깔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또 마지막 청교도라 일컬어지는 스펄전 목사님의 시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대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 시대를 진단하기를 청교도의 경건과 영성이 저무는 시대 영적 하강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진단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악함이 소돔과 고모라 보다 악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와 같음을 인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시대가 그러하듯이 주의 선지자가 보냄을 받으면 악한 시대와 마귀의 역사는 선지자들을 핍박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마귀에게 속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떼를 알아보고 양은 그의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 법입니다. 참으로 진리에 서길 원한다면 이 시대 가운데 의롭게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각처에 미혹하는 이리들이 가득합니다. 쉬운 복음이 우리를 미혹하고, 번영주의 복음이 우리를 미혹합니다. 기복신앙이 우리를 미혹하고 각양 이단과 신비주의가 우리를 미혹합니다. 할 수 있으면 기적과 권능을 행하여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 합니다. 종교 다원주의가 우리를 미혹합니다. 타 종교와 잘 지내는 것을 빌미로 진리를 드러내는 일을 부끄러워 합니다. 모든 시대가 그렇지만 마지막 때가 역시 가까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실 때 보여주신 징조는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있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는 때라 오리라고 했는데 마치 지금이 그와 같은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깨어 기도할 뿐입니다. 


특별히 35절 이하는 구속사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본문입니다. 아벨로부터 스가랴가 흘린 피가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고 합니다. 이는 구약 전체의 순교자를 망라하는 표현인데 예루살렘의 멸망을 염두에 두신 표현입니다. 여러차례 이미 언급한 대로 이 구속사의 성취 곧 창세로부터 계시된 그리스도의 도래와 그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성취 곧 십자가와 부활의 성취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구원은 바로 이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취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약의 경륜 곧 율법과 신약의 경륜 곧 은혜가 서로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도래는 율법의 성취이자 율법의 마침이 됩니다. 구약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 주어졌지만 이제 구약의 그림자들 곧 율법 중의 성전과 제사, 안식일과 절기들이 그 성취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종언을 고할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미 여러차례 설명드린대로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심판의 완성인 것처럼 이 예루살렘의 멸망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최종적 완성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하냐면 성전의 제사와 절기들이 종언을 고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의 인하여 죄를 깨닫고 성전에 나오는 모든 백성에게 참으로 성전이 되어 주심으로 더이상 예루살렘이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묘하게도 이 예루사렘을 영적 애굽 곧 죄와 억압의 사슬에 묶인 애굽으로 그곳으로부터 출애굽(Exodus)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미 마태복음에서 살핀대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 내었다는 예언의 성취가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불러내신 것을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초두의 본문에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11:8에 의하면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하여서 예루살렘을 영적으로 애굽과 소돔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누가복음은 더 적극적으로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나누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별세'가 바로 '출애굽'을 의미하는 엑소더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위의 두 본문 곧, 계시록과 누가복음은 모두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언하는 두 선지자 곧 모세와 엘리야와 관련있는 본문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의 죽음은 마치 출애굽 사건과 같아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 출애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이 모든 선지자들을 죽인 모든 죄가 이 세대에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은 바로 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심판의 성취요 구약의 그리스도의 그림자들의 종언이요, 심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십자가 상에서만 완성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리고 그가 약속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그리고 예루살렘이 멸망함으로 이제 은혜의 복음이 천하만민에게 전파되게 하시는 경륜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38절에 이 예루살렘을 주님께서 이제 아주 버리심을 드러내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신 주님께서 '너희 집'이라고 하십니다. 그 도성이 버린 바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징조가 될 터인데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이일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39절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인용구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 대한 환호로서 시 118:26에서 인용해온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생애의 마감, 죽음과 십자가의 영광 그리고 그 영광 중에 다시 오심을 가리킵니다. 즉, 이 예루살렘이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그 영광을 회복하지 못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예루살렘은 계시록 21장에 가서야 그 영광의 광채를 드러냅니다. 이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 곧 교회이며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거기에는 다시 성전이 없는데 이유는 바로 주님이 함께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이 회복되기까지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의 증거이자 심판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우리는 선조들처럼 선지자들을 핍박지 않으리라면서 선지자의 무덤을 꾸미는 예수님 시대에 대해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받지 못하면 사람은 항상 같은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교회사를 배워야 하고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고 역사는 반복되고 반복되어 왔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선지자를 핍박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도록 내어준 것처럼 이 시대의 교회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치 암탉이 제 날개 아래고 그 새끼들을 모으려 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백성을 모으려 하였으나 이 백성들은 교만하고 완악하고 자신은 다를 것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부패와 비참한 처지를 각성하지 못한 채 동일한 범죄 가운데 빠졌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남녀노소 무론하고 부르시지만 여전히 이 악한 백성들은 대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택한 자녀들로 우리의 행함이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구원의 공로는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배우기를 거절하고 교회의 역사로부터 배우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선조들과 다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교만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애쓰시는 주님의 긍휼을 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음에도 롯의 아내처럼 세상의 것이 미련을 버리지 못해 소돔 땅을 되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와 같은 사람이 우리 가운데 나오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