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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마태복음강해

잃은 영혼을 구원하는 권세(마 18:11-20)

잃은 영혼을 구원하는 권세(마 18:11-20) 


노승수 목사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앞부분과 뒷부분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얻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원론적이고 정신적인 표현이 앞부분이라면 뒷부분의 권징에 관한 설명은 이것의 구체적 실천 방향을 설명한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기쁨과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지런히 잃은 영혼을 찾아서 구원하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복음의 문은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넓은 문이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당연 그 길은 좁은 문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자란 바로 주님의 길을 가는 주님의 택한 백성을 일컫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수난 고지를 통해서 말씀하신 바 대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기로 돌이키는 자를 일컫는 것이지요. 이런 자를 잃어버리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잃어버린 영혼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 실천 방향을 설명한 것이 15절 부터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이킴 곧 회심에 이르도록 형제들을 권면해야 합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하여 듣게 하는 것이 1차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이는 예수님께서 앞서 언급하신 잃어버린 자들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 잃어버린 까닭이 본문에서 바로 죄 때문이라고 명시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권면하여서 돌이키기를 촉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거든 2차로 두 세증인의 말마다 증참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3차로 교회에 말하고 교회에 말을 듣지 않거든 '출교'의 치리로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이런 출교의 치리도 바울이 여러 곳에서 설명하지만 그들의 구원을 위한 권면과 징계의 방편입니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또는 그들의 교회를 훼방치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1:20) 내일 본문에서 살피겠지만 베드로가 이 부분을 오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교회의 치리는 교회의 성결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회심의 표지가 있는 자를 바로 교회가 회원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에 16장에서와 같은 매고 푸는 권세가 나오는데요. 그래서 교회의 두 가지 권세와 천국 열쇠를 말할 때, 말씀의 해석권과 치리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권세는 잃은 양을 구원하기 위한 권세로 매고자 함이 아니라 풀고자 함이요 심판에 이르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고자 함이 그 주된 이유요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회심과 중생의 표지를 보이는 사람들과 적어도 그렇다고 스스로의 입술로 고백하는 자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9-20절은 기도에 관한 내용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 문맥은 교회의 치리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합심하여서 무엇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오길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20절은 죄에 대해 견책하고 그 견책을 통해 형제를 바로 잡는 일을 위해 교회에 세우신 기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이해할 수 있냐면 이미 앞서 17절에 교회에게 말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복음서에는 교회라는 용어를 찾아보기 드문데 명시적으로 교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교회는 단순히 회중을 의미하지 않고 교회의 치리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치리회의 결정이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것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보다 폭넓게 이것은 기도 전반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먼저 정확한 본문의 뜻과 그에 따른 적용이 먼저 있어야 겠지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