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징조(마 24:1-14)
노승수 목사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오늘 본문은 약간 어렵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성전의 무너짐에 대해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이 예언을 듣고 제자들이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언제 성전이 무너지겠는가? 둘째, 세상 끝 곧 종말의 징조는 무엇인가? 2010년을 사는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첫째, AD 70년 경에 예루살렘이 멸망했다는 사실, 둘째, 아직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지 않았고 세상의 끝도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대체로 학자들이 이 복음서의 작성시기를 AD 8-90년대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진 후에 그 무너진 성전의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오늘의 본문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는 어제 본문에서 이미 설명을 조금 드렸지만 이 예루살렘의 멸망은 바로 주님의 구속의 성취와 장래에 주님의 다시오심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몇 차례 신약 성경이 설명하는 구속사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는데요. 오순절 성령 강림 곧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이자 심판의 성취임을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을 보내시는 이 사건이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위에 성취된 사건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루어 졌습니다. 성령께서 역사 속에 오시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설립이 되고 이 교회를 통해 세상의 마지막 심판 전까지 하나님이 부르신 자를 건져내는 구원의 방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율법 속에 증거된 그리스도께서 이제 그 성전됨과 율법의 완성됨을 보여주셨기에 그림자인 성전이 더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와 같은 본문들을 들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을 오순절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보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그 이후의 모든 시대가 바로 종말의 시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여러 본문들을 통해 이런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최종 계시이며 최후의 속죄이며 더 이상의 다른 속죄도 우리 구원을 위한 다른 공로도 구원을 위한 다른 계시도 필요치 않으며 유일무이한 복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종말의 때에 증거들을 몇가지로 정리하셨습니다. 첫째 미혹이 일어날텐데, 내가 그리스도라며 미혹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 위장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할 것입니다.
난리와 전쟁이 일어나지만 이는 시작이며 징조일 뿐 아직 끝이 아닙니다. 이 재난이 시작되면 사람들이 환난에 그리스도인을 넘겨주며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서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랑받으려 애쓰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됩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라도 시험에 빠지고 잡아 주고 미워하며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그제야 끝이 오게 될 것입니다.
말세를 사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들입니다. 특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바른 복음 위에 서 있습니까? 특별히 구원은 인내의 결과라는 점을 오늘 말씀에서 주목하여 보셔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앙 고백 중에 돌트 신경의 5개 신조 중의 마지막이 바로 이 성도의 인내입니다. 누가복음의 천국 비유 중에 네 가지 밭에서 결실하는 밭을 일컬을 때,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인내로 지키어 결실하는 자라고 합니다. 믿음은 무엇으로 증명이 되는가? 내가 참된 믿음을 가진 것을 무엇으로알 수 있는가? 바로 이 인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인내하게 됩니다. 내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지껏 단 한 번의 인내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단 한 번의 죄로부터 혹은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인내의 승리의 열매를 먹어보지 못했다면 그는 제가 단언컨대, 신자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13장에서 살핀대로 돌짝밭과 가시밭 역시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의 살아 있음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내입니다.
오늘 말씀에 또 한 가지 주목해서 볼 만한 말씀은 '사랑이 식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바울 사도도 디모데후서 3장에서 여러 징조를 말하는데 이 징조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이기적이 되고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세대가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런 것들이 복음이란 이름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소개된다는 사실이겠지요. 신학에서 사랑의 성령의 사역의 결과입니다.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 성령의 역사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방언이나 기적이 그 증거가 아니라 바로 이 사랑이 그 증거입니다. 믿음도 역시 이 사랑이 있을 때, 비로서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에게 효력있는 것은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한 것(갈 5:6)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사랑함으로 역사하는 효력있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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