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섬과 물러섬
노승수 목사
공맹의 가르침을 전하는 유학의 경전<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흔히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 하지요.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는 자신을 다스림 곧 수기(修己)를 의미하고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는 선비가 출사(出師)하여서 뜻을 이룸을 의미합니다. 출사는 한문의 뜻 그대로 스승으로 세상에 나선다는 뜻이지요. 어떤 점에서 목사의 직임과 세상에 나서는 선비의 직임은 흡사합니다. 그 나섬은 가르침을 세상을 바꾸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선비가 세상에 출사(出師)한다는 것은 천하의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선비가 세상에 출사(出師)여서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처사(處士)로서 지내는 것을 덕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학을 따르는 선비의 도는<출처(出處)>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주(周) 무왕(武王)과 함께 세상을 도모했던 태공망(太公望) 강태공이 바늘이 없는 낚시로 세월을 낚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후에야 겨우 세상에 출사표(出師表)를 던졌던 제갈공명은 출사(出師)를 고민했습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세상에 출사(出師)했지만 그의 고민은 결국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그의 출사(出師)가 잘못된 출사(出師)라 여겼고, 그 자신도 평생을 처사(處士)로 자처하면서 관직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우리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운영하시는 경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선비가 세상에 나섬이 자신의 뜻을 이루려 함이 아니요. 하늘의 뜻을 이루려 함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선비들조차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고 나섬이 자신의 뜻을 이룸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이룸임을 알았습니다.
이런 분별함이 없을 때, 우리가 세상에 나섬은 우리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거나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오늘 새벽 열왕기상 10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들었던 질문은 우선 솔로몬은 무엇을 위해서 왕의 의자와 병거와 마병과 금방패를 만들었는가? 하는 질문이었고 그 다음으로 나는 무엇을 위해서 목회를 하는가? 입니다. 내가 읽기에 솔로몬의 풍요로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 풍요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도 그에게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왕상 3:13). 하나님이 그에게 그와 같이 큰 부를 맡기심은 20년간 노역을 한 이 백성을 돌아보도록 그들을 위해서 재물을 쓰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것을 자신의 치장을 위해서 세상에 자신의 세력을 드러내려는 용도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 결국은 내일 매일성경 본문에서 들어나겠지만 그런 허영은 여색을 탐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그것이 결국 그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함으로 바로 자기 자신을 좇는 삶을 사는 열매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럼 나는 어떤 마음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까요? 자신을 돌아봅니다. 사실 저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디모데전서에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면서,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선비의 도가 수신과 제가에 있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려면 먼저 자기를 돌아보며 분별하여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주신 지혜를 가졌던 솔로몬도 이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한국에 참 교회가 많습니다. 이렇게 십자가가 많은 이 도시 가운데 목회함은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려함이어야 겠지요. 그것이 아무리 명분이 있고 정당성을 갖는다고 해도 선비들이<출처(出處)>를 분별한 것처럼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때론 이름없는 목회자로 머무는 일이 내 영혼에 더 유익한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주님이 주신 사명을 그저 다 할 따름입니다. 주님이 맡기신다 할 그 때까지만... 누구나 다 아는 바이지만 누구나 다 실천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지요. 저는 실천하는 사람에 들기를 소망해봅니다.
세상에서 이름을 얻으려다 혹은 이름을 얻음으로 그것에 취해서 망해가는 솔로몬과 같은 어리석음을 변치 않아야 겠습니다. 솔로몬에게 어리석음이란 참 안 어울리는 단어이지만 세상은 그런 일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조선을 살던 선비들만큼도 못한 목사로서의 내 모습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의 정신과 신앙 (0) | 2018.03.03 |
---|---|
복수라는 것.... (0) | 2018.03.03 |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단상 (0) | 2018.03.03 |
마음에 무언가 남는다는 것... (0) | 2018.03.03 |
'임석하지 않은 사람의 말을 하지 말라' (0) | 2018.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