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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대학의 정신과 신앙

대학의 정신과 신앙


노승수 목사


우리가 흔히 접하는 한자말 중에<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다. 이는 대학의 팔조목의 일부를 요약한 말이다. 주희(송나라, 주자: 1130~1200)는<예기>중의 일편인<대학>, 이른바<고본대학 古本大學>을 개정하여<대학장구>를 지었는데<고본대학>의 순서를 세 군데 이동하고 1자를 고치며 4자를 삭제하고 134자로 경(經) 1장과 전(傳) 10장으로 구성된<대학장구>를 만들었다. 주희는 사서 중에서 대학을 제일 중요한 핵심으로 보았다. 대학의 문장에 통달하게 되면 다른 경문들은<대학>을 기본으로 주해나 해설 정도로 여겼다.<대학>의 가르침의 핵심은 특히 전 5장의 격물(格物)과 치지(致知) 였다. 이는 예기의<고본대학>에는 없는 주희가 새로 넣어 보망장(補亡章)이라 칭하였는데, 그 이유는<고본대학>에는 격물치지 조목에 관한 해석문이 빠져 있는 것으로 가정하여 성즉리(性卽理)의 체계에 따라 그 해석문을 보충하였다. 격물치지 해석문의 보충, 즉 격물치지보전은<대학>원문 중 "그 뜻을 성실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아는 것을 극진히 해야 할 것이니 아는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에 있다"(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욕성기의자 선치기지 치지재격물)라는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사람의 의지와 생각 그 사람됨이 그의 지식에서부터 나옴을 이야기한 것이다. 
성경의 진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열심이나 열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지식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정의가 가능하다. 예수님께서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시면서 영생 곧 참된 구원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방향이 잘못되었는데, 열심을 내면 열심을 낼수록 그 길이 멀어진다. 중요한 것은 열심이 아니라 지식이다. 그리고 우리의 참된 감정도 바로 이 지식에서부터 나온다. 대학의 격물치지의 정신이 말해주듯이, 그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지식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서 신학은 신앙 이상으로 중요하다. 성경의 정신이 무엇인지 그 뜻대로 우리의 뜻을 세우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성경의 정신과 일관된 신학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을 그냥 읽어서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어렵거나 신비한 책은 아니다. 그 계시는 참으로 명증적이고 명료하여서 누구나 익히 이해할 수 있는 진리를 기록하고 있다. 그의 배움이 짧다고 해서 깨닫지 못하도록 어려운 이야기를 기록해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전체의 사상을 통일되게 한 사람이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아프리카 선교사가 한 부족에 갔더니 거기 부족의 아낙들은 굴뚝이 없는 부엌의 아궁이에서 매운 연기를 마시며 어렵사리 요리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딱하기도 하고 그들이 미련해 보이기도 해서 돕는다는 열의로 본국의 후원을 받아 집집마다 굴뚝을 놓아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한 동안 모든 아낙들이 이를 좋아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이 집들은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흙으로 지은 집 벽사이로 개미들이 집을 지어 구조가 헐거워져 무너져 내린 것이다. 어쩌면 굴뚝이 없는 아궁이에서 요리를 하는 것은 그 부족이 수천년을 이어내려온 그 삶의 터전에 적응하는 지혜였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사람의 터전에서 최선의 적응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전체에 대한 안목이나 관점이 없이 일부분을 보게 되면 문제를 왜곡하거나 바르게 분별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 자신이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으로 일을 하고(딤후 2:15) 교회에서 봉사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엡 4:12)은 먼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일(딤후 2:15)과 성도를 온전케 하는 가르침(엡 4:12)을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로부터(엡 4:11) 배워 지식에 이르러 분별한 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주님께서도 봉사에 분주한 마르다보다 주님 발 아래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더 칭찬하셨다. 
격물치지의 대학 경문이 의미하는 바 그 의지를 성실히 하고자 하는 자라는 표현은 어떤 일을 성실히 행하려 하는 마음과 열정을 의미하고 행동과 봉사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먼저 그 앎은 지극히 한 이후에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믿음은 앞서서 이야기 한 것처럼 덮어 놓고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특별히 그의 구원의 사역을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 믿음은 다르게 정의를 하자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긍정하는 일이다. 그것을 성경은 '자기 부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개 이 '자기 부인'에 대한 개념이 성경적이지 않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진 개념들을 성경에 덮어 씌우는 일들이 다반사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곧 자기 부인이란 '자기 의'를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는 많은 경우<자기 의>를 의지하여 산다. 우리 스스로는 구원을 얻기에 어떤 행위도 공로도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각성에 이르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인은 이런 개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을 부정한다든지 혹은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든지, 뭐 이런 개념들로 자기 부인을 생각한다. 이런 개념에는 최근에 베스트셀러가 된 경건서적이 한몫을 했다. 보시다시피 바른 신학에서 바른 신앙과 그에 따른 행위가 나온다. 
오직 성경이란 표현은 성경이면 다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최종적 권위를 갖는다는 뜻이다. 성경이면 다 된다는 순박한 생각은 지식과 신학의 빈곤을 가져왔다. 지금 한국교회의 천박함 또한 이것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종교개혁시대에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부들의 글과 헬라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라틴어에 능통했다. 이에 비해 중세 카톨릭의 신부들은 신학에 무지했다. 그런데 오늘날 전혀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욕을 먹는 것은 사실 여러 행실들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도덕성 회복 운동이니 사회봉사활동이니 이런 저런 대안들을 내어 놓지만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다. 성경이 아니더라도 공맹을 읊조리던 조선의 선비들도 다 아는 이 진리를 교회가 모른다. 우리 삶의 근간은 우리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괜히 사람이 그 마음에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눅 6:45). 
30만권을 소장한 도서관에 갔는데, 도서가 하나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찾고자 하는 책을 찾겠는가? 정보는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정리해두는 것이다. 파편적이고 부분적인 지식을 지혜롭게 정리해내는 것이 신학이다. 성경이 우리의 최종권위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쌓인 책더미가 정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분별하고 훈련되지 못한 지식은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지식을 지극히 한다는 것은 들어오고 나감을 알고 세상에 나서고 처사로서 학문의 정진을 힘써야 할 때를 아는 것과 같다. 태공망이 시간이 남아서 강변에서 바늘도 없는 낚시를 드린운 것이 아니다. 제갈공명이 유비의 삼고초려에야 겨우 나서는 것도 이 시대를 분별하는 정신 때문인 것이다. 주님께서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치 못하던 사람들을 책망하셨다(마 16:3). 신학이 결여된 신앙은 항상 분별력을 잃고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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