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단어가 있습니다. "눈치"죠 눈치란 주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때론 주는 사람이 없어도 대상을 배려하는 태도를 일컫습니다.
우리한테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잘 의식을 하지 못하지만 왜 상대가 요구하지 않은 배려를 우리는 할까요? 이 태도에는 타인이 외부적 존재로서 타인뿐만 아니라 이미 한 개인 안에 내면화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심리적 타인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테면, 타인의 전형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전형이 요구할 것 같거나 혹은 원할 거 같은 것에 대해서 배려하고 살피는 힘을 눈치라고 합니다.
홍유니라고 한국인으로 예일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눈치의 힘(The Power of Nunchi)"이란 책을 써서 이름을 알린 분이 계십니다. 그녀는 한 출간 인터뷰에서 "눈치는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눈치는 아이 때부터 그들이 세상에 사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동시에 타인에 대한 배려로서 곧 그들의 생존을 뜻하기도 하죠."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눈치와 배려는 타인의 욕구에 대한 배려이자 눈치이지만 동시에 이 타인의 욕구는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상담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돌봄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늘 사람들을 돌봅니다. "이해를 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늘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격려 받기 원하는 사람"은 늘 주변 사람을 그렇게 격려하려고 애씁니다.
과거 우리 공동체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동화처럼 서로의 삶을 돌보고 챙기므로 공동체 안에서 갈등을 예방했습니다. 적은 먹거리로 자기 것만 챙기게 될 때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것이죠.
자기 욕구라는 것은 이런 분위기에서 정당화되기가 힘듭니다.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칠 수 있으니까요. 따라서 타인을 배려함으로 그들로부터 동일한 것을 끌어내는 기술이 바로 "눈치"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내재적 심상이 있는데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과 관련된 "자기 심상"이 있고 눈치보고 배려하는 것과 관련된 "타자 심상"이 있습니다.
이 두 심상은 적당한 거리에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거래나 심리적 주고받음 속에서는 잘 작동하다가 그 관계가 가족이 되거나 연인이 될 때 타자로서 배려하던 "타자 심상"이 작동하던 가족과 연인이 자기 욕구와 관련된 "자기 심상"으로 대체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둘도 없이 좋은 사람인데 정작 가족을 잘 돌보지 않는 경우의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이 문제의 핵심은 우리 사회의 공동체 윤리가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의 공동체적 돌봄이란 방식으로만 작동할 수 없게 변했다는 점이며, 개인의 힘의 더 강해져서 공동체적 요소를 넘어 개인적인 성장의 필요도 증가했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자기 심상"은 주로 엄마와 동일시하면서 생기는 심상으로 내 자신에 대한 이미지들의 총합으로 매우 정서적이며 무의식적입니다. 이것을 기초로 타인과 관계맺음이 일어나며 자기와의 관계맺음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심상도 여기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타자 심상"은 좌우를 분별하기 시작할 때, 받는 여러 공동체에 대한 교육과 간섭에 의해서 특히 한국 사회에서 발달하는 문화적 특징입니다. 서양인도 타자 심상이 있지만 직접적으로 자기 심상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매우 독립적인 자기 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가치를 공동체적 가치로 승화시켜버려서 인정받음에 목말라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하는 체면이나 관심에 매여 있게 되는것이죠. 그것이 배려라는 건강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눈치가 타인을 지배하고 조정하려는 특징으로도 나타나게 됩니다. 주로 욕구의 충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자기 심상의 힘을 타자 심상의 힘에 기대어 있게 될 때, 공동체적 연대가 강화되기도 하지만 내 스스로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과 윤리적 연계가 약화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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