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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개혁의 출발점, 교회와 그리스도의 특성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군대가 아니라 자기 내어줌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갱생은 그 행동 특성 안에 이미 답이 있다.

군대나 겁박 폭력 위압으로 우리 인격이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변화는 그분의 탁월함과 그 지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런 분이 우리와 같아진 데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방어를 풀고 자기를 해방시키는 장면은 상대의 탁월성을 목격할 때가 아니라 나와 같은 지점을 만날 때이다. 기름때가 지워지려면 기름이 필요하듯이 슬픔이 지워지려면 슬픔이 필요하고 두려움이 지워지려면 두려움이 필요하다.

내가 넘어진 자리가 내가 시작해야 할 자리인데 저 멀리서 나를 부른다고 과정을 생략한 체 그리로 달려 갈 수 있는게 아니다. "나만 이래"라고 자괴감과 위축감 속에 홀로 있을 때, 나와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가 희망의 불빛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시작하신 갱생과 회심과 재창조는 이런 지점에서 출발했다. 한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 교회의 변화도 이 껍질을 깨고서 내면의 정서적 욕동의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아마 바로 윗 문장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텐데 좀 쉬운 표현을 들자면 "의인은 넘어지지 않는 자가 아니라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자"라는 의미다. 시행착오를 건너 띠고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의 탁월함과 그 영광의 자리에까지 이를 수 없다. 어떤 생명도 그렇게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심리적 좌절은 정신 건강의 예방주사다"라고 한다. 이는 영적 원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행착오가 성장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개혁과 갱생이 새로운 생명의 출현이라면 이 생명 역시 자연적 생명의 성장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돌봄과 자비 속에서 겪어내야 한다. 공교롭게도 구약에서 긍휼이라는 단어는 "자궁"이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다. 엄마의 자궁과 같은 돌봄과 긍휼이 자궁 밖에서도 존재해야 한다.

우리 속담에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한 까닭은 우리 선조들은 태교를 뱃속의 9달만이 아니라 아이가 세살이 되는 때까지를 태교라고 본 것이다. 아니는 태어나서 2년을 엄마의 자궁과 같은 동일한 돌봄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 시행착오와 좌절을 견딜 내적 동력이 만들어진다. 이 시간의 관계는 자궁에서의 관계와 같아야 하고 이 시기의 애착은 자궁에서의 애착과 같아야 한다. 그것을 영적으로 반복하는 공동체가 교회다. 초대 교부들과 칼뱅, 그리고 개혁파의 여러 신앙고백서들이 교회를 어머니로 고백하는 것이 이런 이유다. 어머니라는 말은 말로만 어머니가 아니라 자궁과 같은 돌봄을 만들어주는 공동체라는 의미어야 한다.

개혁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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