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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느헤미야강해

느헤미야의 기도(느 1:1-11)

느헤미야의 기도(느 1:1-11)

 

노승수 목사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더니 [2]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3]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 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관원이 되었었느니라

 

1. 느헤미야서의 배경(1-3)

때는 기원전 465-423의 제위 기간을 가졌던 아닥사스다 시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 중에서는 가장 뒷시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성벽의 재건을 52일 만에 이룬 느헤미야의 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니다. 느헤미야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위로하셨다'라는 뜻입니다. 2절에 제 20년이라 하였으니 주전 446년 경입니다. 수산궁은 바사의 중요한 성읍 가운데 하나였읍니다. 느헤미야가 수산궁에 있을 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예루살렘에서 느헤미야의 형제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방문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었더니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사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에스라서의 기록은 고레스 원년인 537년부터 다리오 2년인 520년에 성전 재건 공사의 재개 그리고 아닥사스다 7년의 에스라에 의한 2차 귀환에 까지 가장 광범위한 시기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아하수에로 임금의 치세 동안에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부림절 전통에 관한 기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에스라서 4장에서 살폈던 4:6-23절은 바로 이 느헤미야서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사건의 내용입니다. 제가 에스라서를 설명드리면서 삽입된 본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의 귀환은 에스라서 7장에서 보듯이 아닥사스다 7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스 7:7). 대략 BC 458년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 보니 이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 기사가 시작되는 시점이 아닥사스다 20년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에스라의 귀환보다 14년 정도 뒤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귀환 공동체의 역사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537년에 고레스의 조서를 통해서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1차로 사람들을 이끌고 성전 공사를 위해서 귀환을 합니다. 귀환과 동시에 시작되었던 성전 공사는 대적들의 방해로 학개 선지자가 예언을 했던 다리오 2년 즉, BC 520년까지 약 17년 간을 건축이 중단됩니다. 그리고 520년에 시작된 성전 재건은 515년에 필역합니다. 대략 4년여 공기를 거쳐서 성전의 공사가 필역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귀향이 에스라서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게 대략 성전이 완공된지 56년 뒤인 아닥사스다 7년 곧 458년경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느헤미야에 의한 귀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아닥사스다 20년 즉, 446년경입니다. 그러니 537년에 시작된 귀환의 역사는 446-445년경에 이르러서야 거의 완성이 됩니다. 1차는 스룹바벨에 의해서 성전 재건의 역사로 2차는 에스라에 의해서 말씀 재건의 역사로 3차는 느헤미야에 의해서 성벽과 공동체 재건의 역사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에스라서를 설명드리면서도 이미 한 번 말씀드렸지만 아하수에로왕때, 에스더가 왕비가 되고 부림절의 위기를 겪으면서 모르드개가 입각을 했습니다. 아닥사스다는 아하수에로의 뒤를 이은 왕이었고 왕의 주변에 유대인 관료들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의 제위 초기에 왕을 보필했고,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20년에 왕의 신임을 얻었으니 비교적 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총 제위기간이 22년에 20년이면 후반기라 할 수 있습니다.

 

2. 느헤미야의 기도(1:4-11)

4절은 우리에게 '기도의 태도'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을 생각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아직 왕께 신임을 얻는 관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니의 방문과 그에게 들은 예루살렘의 형편은 그를 슬프게하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게 했습니다. 민족의 죄악을 생각하며 자신의 죄로 여기고 슬퍼했습니다. 음식을 끊고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합니다. 지도자라 하면, 기도자라 하면, 자신의 교회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는 세계 교회를 좁게는 한국 교회를 생각하는 넓은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인도하는 리더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기도자는 이와 같은 민족과 세계를 가슴에 품고 겸비한 태도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수산궁에서 충분히 호위호식하며 가족과 자신의 일신상의 영달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공한 삶을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이었고, 그가 그런 길을 간다고해도 나무랄 사람은 없었습니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은 남의 형편이 아니라 자신의 형편과 같았습니다. 에스라가 백성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을 품고, 중보적 회개를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5절은 우리에게 '기도의 대상'에 대해 알려줍니다. 느헤미야는 정확히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지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곧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두려움은 주를 따르지 않고 주를 떠났을 때 두려워해야합니다. 그러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과의 언약 그리고 언약을 배신한 이스라엘의 형편에 대한 성찰을 담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언약과 긍휼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느헤미야에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하늘의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여기서 나오는 하늘의 하나님은 곧 초월적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자신들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며 사람의 중심을 살펴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무엇보다 당신이 맺으신 그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기도에 있어서 '기도의 대상'에 대한 지식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대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 기도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반하여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앞이 안보이는 민족의 현실을 붙잡고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4절의 기도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5절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이신지를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6절은 '기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을 종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그 종된 자로서 기도합니다. 이 관계가 명확하게 서지 않으면 분명 기도에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은 요술램프의 '지니'가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움직이는 기도에서 수동적 대상이 아니십니다. 그가 주인이시요. 우리는 그의 종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나의 뜻의 관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 삶을 하나님의 뜻에 튜닝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의 종'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빈번하게 기도를 마치 무슨 청구서처럼 하나님께 내어 놓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정립이 안되어 있다면, 우리는 기도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통치자로 우리에게 오시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주의 종이라고 언급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도자들만 종이 아니라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종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느헤미야의 기도에는 기독교의 기도의 핵심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6절은 또 우리에게 '기도의 현재성'에 대해서 알려 줍니다. 주의 종인 느헤미야는 주야로 기도한다고 합니다. 원문에는 '하욤'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데 개역성경에는 번역에서 누락이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옮기자면 'now'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KJV과 NASB가 모두 now로 옮겼습니다. 히브리 정관사 '하'에다가 날 혹은 특정한 기간을 의미하는 '욤'을 합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특정한 날을 정해서 기도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어성경이 그 뉘앙스를 정확히 번역했는데,  '주야로 기도하며'라는 문장과 함께 '기도의 현재성'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닥사스다 20년 기슬르 월은 바벨론 월력의 영향을 받은 유다력으로 9월에 해당합니다. 요즘의 기간으로 환산하면 대략 11-12월에 이르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2:1에 보면 느헤미야가 기도의 응답의 결과의 왕의 술관원이 되는 시점이  니산월이라고 나옵니다. 니산월은 '정월'이니 대략 4-5개월 가량을 느헤미야는 마치 하나님 앞에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밤낮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이와같은 집중력이 요구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입니다. 기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이 바로 '기도의 현재성'입니다. 그것이 '하욤' 곧 now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 말은 이렇게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기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전폐하고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의 현재성'이란 '기도의 일상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권면한 것은 기도만하고 도무지 일하기를 싫어하는 삶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해하는 자들을 향해서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고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기도의 현재성'은 '기도의 일상성'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생애의 일상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이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고전 10:31). 이것이 진정한 기도의 본질입니다.

 

6절 하반절은 '기도의 동일시'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나와 내 아버지 집이 범죄하여'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우리처럼 교회에서 민족과 나라와 선교를 위해서 기도할 때만 기도하고 일상에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기를 잃어버리는 그런 어설픈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곧 주의 종인 이스라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민족을 위해 중보적 회개를 했던 에스라와 동일하게 하나님을 날마다 대면하며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기까지 결코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을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않겠다고 작정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삼상 12:19)?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민족의 수치를 자신의 수치로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였다고 합니다. 기도란 근본적으로 '동일시'란 성격을 가집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과 자신의 성품을 동일시하고 민족의 위해서 기도하는 자는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동일시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그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죄를 나의 죄로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기도에 성격은 그래서 본질적으로 사랑의 성격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데레사의 "기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통성으로 기도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참으로 여러분 깊은 곳에 하나님과 그의 성품을 생각하면서 기도하십니까?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기도를 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입에 말이 많은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중언부언입니다. 그것이 기도일 수 없습니다. 기도는 성령을 따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동일시'입니다. 나는 참으로 바르게 참되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7절부터 9절은 '기도의 역사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고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주신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어 8절에 뭐라고 합니까? '옛적에'라고 합니다. 그 결과 열국 가운데 흩으시고, 또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계명을 지켜 행하며 하늘 끝에서라도 모아서 이곳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기억해 달라고 청원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기도의 역사적 사실을 잊어버립니까? 어제 범죄하여 회개하며 기도한 것을 잃어버리고 오늘도 같은 죄악을 반복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참으로 회개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에는 역사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언약에 참으로 신실하든지, 아니면 언약을 배신하여서 주께 매를 맞았든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의 처한 형편으로부터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까닭은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장구한 인류의 역사일 수도 있지만 한 개인의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극히 개인적인 역사성도 함축합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는 그래서 그의 삶에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참 신자는 날마다 성장합니다. 그가 실패를 통해서도 성장하고 그가 성공을 통해서도 성장합니다. 성경에 의인을 넘어지지 않는 자라 하지 아니하고 7번 넘어져도 일어서는 자라고 했습니다(잠 24:16).  그래서 기도에는 '역사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의 기도가 10년 전과 20년 전과 오늘이 같다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성장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은 자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나의 기도에는 역사성이 있습니까?

 

10-11절 상반절은 '기도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종으로서 자기인식'이 '기도의 주체'에 대한 인식이었다면 기도의 정체성은 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물론 자기 인식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기도의 주체가 간구자라는 기도자의 위치에 대한 강조를 가진다면, 기도의 정체성은 그런 기도자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더 강조점을 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된 은덕과 그 지위에 대한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무엇이라고 합니까?주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종'이라고 합니다. 주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과 이것을 모르는 것은 기도에 능력에서 어마어마한 차이를 낳습니다. 전자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면 후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강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건빵만 먹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크루즈 유람선을 타는 것이 평생에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10년 적금을 부어서 크루즈 여행선 티켓을 구매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다 긁어 모아서 겨우 티켓을 장만해서 식사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건빵을 잔뜩사서 승선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1주일은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금방 건방에 물렸고, 식사 때마다 나는 음식냄새에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웨이터를 붙잡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여보시게 그 불고기 한 접시만 주시면, 내가 갑판 청소를 대신하지?" 이렇게요. 그 때 웨이터왈 "손님께서 가지신 크루즈 승선티켓에는 식사비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허탈합니까? '기도의 정체성'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영적 지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1절은 '기도의 현실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으로 자꾸 이적적 요소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의 이적은 계시적 요소를 갖습니다. 좀 쉽게 풀어서 설명드리면 성경의 모든 이적과 절기, 제사법, 성전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계시적 수단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물건을 갓 샀는데, 매일 A/S를 받아야 한다면 그게 명품에 속하겠습니까? 불량품이겠습니까? 여러분 좋은 물건일수록 A/S의 필요가 거의 없고, 품질보증기간이 더 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하시다면, 창조와 그분의 섭리의 방식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우리의 필요를 부족하지 않고 넉넉하게 공급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보통 이적이란 2차원인 즉, 인간이나 자연에 그 원인을 두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의 창조세계가 그렇게 개입을 필요할만큼 허술할까요? 그렇지 않다면 왜 도대체 이런 개입을 하실까요? 앞서 제가 설명드린대로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를 계시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라고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요 5:39). 이런 이적의 특수성에 대해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최종계시가 우리에게 이미 완전한 형태로 주어졌습니다(히 1:1-3). 그럼 이런 초자연적 형태로서의 이적이 오늘날에도 있겠는가? 결론을 말씀드리면 없다는 것입니다. 계시가 이미 완성된 고로 그렇습니다. 그럼 기적이란 도무지 일어나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은사가 필요하고 또 때론 성도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또 그 신앙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혹은 그 성화를 더 촉진하시기 위해서, 특별하신 방법으로 '섭리'하십니다. 이를 '비상섭리' 혹은 '특별섭리'라고 부릅니다. 섭리와 이적의 차이점은 섭리에는 분명 2차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첫째 원인은 하나님이시지만 둘째 원인은 자연이든지, 인간이든지 어떤 창조세계의 여러 방편들을 이용하시되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성도들이 깨닫도록 특별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느헤미야는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은 아마도 왕과 왕의 관원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후반절에 그 때에 자신이 왕의 술 관원이 되었음을 기도의 응답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구하지 않고, 2차원인을 통한 돌봄과 섭리를 구한 것입니다. 이게 사실은 우리 신앙 일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로 치면 이런 것이지요.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라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사선생님과 좋은 약을 연결시켜주셔서, 이 병이 낫기를 기도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기도의 현실성'입니다. 그는 지금 왕의 술관원이 되는 것이 그의 생애의 목표는 아닙니다. 이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도록 기도한 까닭은 예루살렘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구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도울 사람들에게 은혜를 얻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한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먹는 약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우리가 만나는 의사를 통해서 역사하시고 우리가 우연히 발길을 옮긴 약국의 약사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내가 만날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섭리 역사하십니다. 기도는 이와같은 현실성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혹시 기도만 하고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신앙을 가지지는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