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승수의 강해설교/느헤미야강해

성벽과 공동체의 핵심가치(느 4:15-5:5)

성벽과 공동체의 핵심가치(느 4:15-5:5)

 

노승수 목사

 

[15]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16]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19] 내가 귀인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역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나뉘어 상거가 먼즉 [20] 너희가 무론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21] 우리가 이같이 역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었으며 [22]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하고 [23]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

 

[5:1]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 [2] 혹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곡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3] 혹은 말하기를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전당 잡히고 이 흉년을 위하여 곡식을 얻자 하고 [4] 혹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 [5]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으나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니 속량할 힘이 없도다.

 

1. 대적의 방해를 극복하다(4:15-23)

매일성경이 본문을 이렇게 구분한 이유는 제목을 보면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이렇게 본문을 구분한 것은 조금... 격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5장은 따로 묵상할 수 있도록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내용상 내일 본문과 이어지고 그게 더 집중력이 있어 보이는데, 참 아쉽습니다.

 

아무튼 본문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어제 살핀대로 산발랏과 도비야의 심리전은 느헤미야와 백성들에게 간파를 당합니다. 또한 이 대적들의 꾀를 하나님께서 폐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적 대적 마귀의 꾀 또한 하나님이 폐하실 것입니다. 이들의 꾀에 짓눌려 예루살렘을 떠났던 자들도 돌아왔습니다. 함께 뜻을 합하여 성을 건축하는 역사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주변에 형제들이 혹 넘어졌습니까? 그들을 탓하고 정죄하기 보다 바르게 권면하여서 믿음 가운데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격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물론 드러난 죄가 있다면 공동체의 순결을 위해서 바른 징계도 시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공동체가 참으로 안전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마치 가정과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훈육을 받지만 가정이 안전한 공동체라는 확신을 아이들이 갖도록 하는 것이 부모의 마땅한 도리인 것처럼 교회의 직분자들은 마땅히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가 안전한 공동체라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안전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안전감은 외적 조건에서 오는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내적 조건에서 오는 영적 문제입니다. 오늘날 많은 심리학자들이 교회의 이 문제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안전지대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안전은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와 참되게 결탁되어 있을 때, 그리고 그 결탁이 가능하도록 하는 참된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안전감을 얻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른 복음의 선포입니다. 교회는 매번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참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빛이 희미해지니 우리에게 육의 본성과 육의 사고가 나오게 되고 영적 사고 방식을 가질 수 없으니 안전에 대해서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대적들의 심리적 음모는 분쇄되고 떠났던 자들이 돌아와서 힘을 들여 역사를 하는데, 그들을 정죄했다거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비난했다거나 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우리는 형제를 참으로 용서하고 관용하며 참된 톨레랑스를 이룰 수 있습니다. 참된 어짊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충과 서에 대해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특히 '서(恕)'는 같을 '여(如)'에 마음 '심(心)'을 합한 글자입니다. 용서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서란 상대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는 반드시 이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참된 복음 안에서만 우리 공동체 안에서 실현됩니다. 또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악의 세력들에 대함(엡 6:12)이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우리의 형제들이 아니라 우리의 대적임을 기억합시다.

 

이 때로부터 느헤미야의 종자 중에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들은 유다 온 족속 뒤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민장은 군사조직체로서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을 일컫습니다. 민장이 뒤에 있었다는 표현은 유사시 작전 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건축하는 자나 담부하는 자가 한 손에는 일을 하고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나팔수를 세우고 느헤미야가 귀인들과 민장들에게 이르기를 이 역사가 크고 넓어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나팔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나아오라고 전략을 세웁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대적들의 도발에 대해서 확실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무엇이라 합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고 합니다. 이는 느헤미야의 신앙고백이자 느헤미야의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 가운데로 하나님이 개입해 들어오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이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고 느헤미야가 손을 놓고 있었습니까? 인간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을 수립하고 전쟁과 침략에 대비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곧 성벽의 재건이라는 목표를 잃지 않고 수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작정을 믿은 참된 신자의 참으로 바른 태도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너무나 자주 운명론으로 치부하여서 '하나님이 하시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매우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경륜을 당신 혼자 이루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아시고 모든 것을 행할 능이 있으시면서도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당신의 경륜을 계시하시기 위함이요,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또한 당신의 경륜을 이룸에 우리를 동참시키시기 위함입니다. 기도와 신앙의 본질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섭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 '섭리'에는 우리의 순종과 불순종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해야할 모든 작전과 전략을 수립하고 백성들과 민장들을 배치하고 무장을 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 안에서 자라고 합니다. 밤에는 파수하고 낮에는 역사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 무장을 벗지 아니하고 물을 길러 갈 때 조차 병기를 잡게 하였습니다.  

 

동시에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싸우시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뭔가 달라진 것을 감지하셨나요? 느헤미야 1:4에 느헤미야의 기도가 생각 나십니까? 뭐라 했습니까?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했지요? 그 이후에도 1:5, 2:4, 2:20에 하늘의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2:20을 기점으로 점차 우리 삶에 개입해오시는 하나님으로 그려집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러다가 4:4에 드디어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4:9과 오늘 본문의20절에도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는 주기도문의 두 가지 호칭을 기억나게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의 하나님, 초월자이신 그 분은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기도의 본질이 하나님이 우리 삶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에 관한 최고의 모범을 담은 성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삶에는 하나님이 들어와 계십니까? 나는 하나님을 내삶의 전 영역에 주인으로 초청하고 있습니까?

 

2. 내적 분열이 생기다(5:1-5)

여러분 5장의 기록이 조금 어색하지 않습니까? 왜 느헤미야서의 저자는 갑자기 장면을 전환할까요? 여러분은 지금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감독은 도대체 어떤 의도로 성벽 건축의 역사를 끝까지 다 기록하지 않고 중간에 백성들 중에 흉년이 들어서 그 자녀가 노예로 팔리는 일을 끼워 넣었을까요? 이 순서는 분명 시간 순서의 기록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 성벽은 52일만에 완공이 됩니다. 그 중간에 추수가 끼어 있어서 그로 인해 형제가 노예가 되는 일이 발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편집에는 감독의 의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읽어내어야 한껏 흥미진진하게 드라마를 즐길 수 있고 성경 역시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리고 유기적 영감에 의해서 이 기록을 남긴 인간 저자에 의해서 뭔가가 의도되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 역사 기록을 한다면, 52일간의 성벽 재건을 쭈욱 Linear 하게 기록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생명의 말씀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이 안에는 생명의 메시지가 담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록의 목적에 맞게 특별한 '시간의 재구성'이 등장합니다. 5장의 기록은 이런 시간의 재구성에 해당합니다. 6장에 가면 다시 성벽 재건의 기록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점을 시사할까요? 왜 저자는 성벽재건에 대적들의 방해와 내부에서 일어난 형제를 종으로 삼는 사건을 오버랩시킬까요?

 

어제도 설명드렸다시피 성벽의 재건은 단순히 성벽의 재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핵심가치'의 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핵심가치는 다른 것이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성벽'은 이 공동체성의 상징이요, 안전의 상징이요, 하나됨의 상징입니다. 차별없음의 상징이요, 예배 공동체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앞서 4장에 들어서서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과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은 계시록 21장이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경의 비전이 성취되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본문이 전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강화체 본문은 분명한 메시지를 이끌어 내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내러티브 본문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시각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관점이 중요하게 되는데, 성경은 성공스토리도 아니요, 위인전은 더더욱 아니요, 성경의 주연은 하나님이시며, 조연은 성경의 여러 인물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미숙하고 신학이 부재한 설교자들 중에 본문의 의미를 단순히 그런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형제를 돌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얻었다고 해서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깊은 우물에서 맑은 물을 길어 내듯이 성경으로부터 생명의 메시지를 우리는 길어 내어야 합니다.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부르짖어 형제 유다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자녀는 많고 양식은 없고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는데, 흉년이 들었으니 밭과 포도원을 전당잡히고 곡식을 얻자고 합니다. 2절을 공동번역은 녀를 종으로 팔고 양식을 얻었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또 빚을 내어 세금을 바쳤다는 원망이 일었습니다. 5절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우리 육체도 형제의 육체와 같고 자녀도 저희 자녀와 같거늘 이제 자녀를 종으로 판다고 합니다.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으나 속량할 힘이 없다는 부르짖음이 사무쳤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참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어떤 혈통도, 어떤 신분도, 어떤 지위도, 어떤 능력이나 재능도, 재물의 많고 적음도 차별함이 없이 하나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우리는 성령 안에서 참으로 하나된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교회 안에서 이런 차별을 철폐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에 주신 직분 곧 목사와 교사(신학자)와 장로와 집사는 이런 일을 감당하고 교회와 성도를 섬기도록 주신 직분입니다. 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이런 직분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