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승수의 강해설교/느헤미야강해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느 2:1-10)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느 2:1-10)

 

노승수 목사

 

[1]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 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5]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6] 그 때에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즐겨하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7]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9]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시기로 내가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1. 느헤미야의 근심(1-3)

어제 본문에서 이미 설명드렸다시피 느헤미야는 기도의 응답으로 왕의 술관원이 되었습니다. 슬관원이란 매우 신임받는 직책입니다. 고대 왕들의 세계는 정치적 암투가 굉장했습니다. 그래서 왕을 시해하거나 독살하려는 세력들은 늘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모든 음식을 미리 맛을 보았습니다. 이걸 우리나라에서는 "수라상의 기미(氣味)를 본다"라고 했습니다.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겠지요. 느헤미야는 왕의 술관원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이서 술을 따라드리는 일을 맡은 것이지요. 그러니 왕과 개인적인 친분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느헤미야가 '이사람들에게 은혜를 얻게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처럼 그런 자리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관심사는 왕의 신임을 얻는 그 자리에 있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아닥사스다 20년 니산월에 왕께 술을 드리다가 얼굴의 수색이 왕께 읽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이전에는 수색이 없었더니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기도를 하지 않아서라기 보다 기도를 해가면서 더욱 더 그 마음에 예루살렘을 향한 간절함이 더했던 것 같습니다. 기슬르월에 소식을 접하고 니산월에 술을 드리기까지 대략 4개월 정도의 기간동안 그의 마음에 점점 예루살렘을 향한 애통함이 더하여서 급기야 왕의 앞에서 조차 그 얼굴에 수색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근심을 해야겠지요.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하는 근심 말입니다. '의'를 위해서 하는 근심입니다. 그게 왕의 눈에 읽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묻습니다.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라고 합니다. 서로의 얼굴에 수심과 근심을 알아볼 정도로 지근한 거리에서 왕을 섬긴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봅니다.

 

에스라서를 강해하면서도 말씀드렸듯이 '관중'이 '의'를 설명할 때, '스스로 나서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도 의로운 마음이 있어서 이것을 스스로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한 그의 근심은 왕의 눈에 띄었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스스로 왕께 나아가면 폐하여 질 수 있다는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힌 줄 알고도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에스라서에서 이미 살핀대로 성벽공사의 중단을 명했던 임금이 바로 아닥사스다였습니다(스 4:21-22).

 

그리고 이것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가기 전의 일입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느헤미야 이전에서 성벽을 재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에 대해서 아하수에로 시대(스 4:6) 방해가 있었고, 아닥사스다시대에도 글을 올려 방해를 했습니다. 특히 아닥사스다 제위 동안에는 조서를 내려 왕명이 있기까지 예루살렘의 공사를 중단을 명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기가 에스라의 귀환이 있었던 아닥사스다 7년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를 보면 바사국 왕명은 변개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을 죽여도 좋다는 왕명을 변개할 수 없음으로 인해 그에 대항해서 유대인들도 대적을 죽여도 좋다는 왕명을 내었습니다. 그러니 그 시기가 언제더라도 아닥사스다가 왕명을 내어 공사를 중단한 성을 위해서 근심한다는 사실을 왕이 알게되는 일은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지혜롭게 자신의 관심사가 개인적인 문제로 보이게 하고 성읍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라하고 합니까?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다고 왕께 고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아버지 제사'는 많은 사람의 동정을 얻어서 어지간한 공적인 일에도 불구하고 편의를 봐주는 것과 비슷한 정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조상의 무덤이 위태롭게 되거나 더렵혀진다고 하면, 누구에게나 동정을 받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래서 이 문제를 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왕께 고합니다. 또한 은혜롭게도 왕이 느헤미야에게 질문을 할 때도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색을 다른 문제로 의심하지 않고 마음의 근심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4-8)

그러자 왕이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 때 느헤미야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 합니다. 이게 어제 설명드렸던 '기도의 현재성'이요 '기도의 현실성'입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순간에 기도를 합니다. 왕의 앞에서도 그리고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손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고, 사람의 손으로 변장하여 온다는 '기도의 현실성'에 대한 깊은 인식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는 기도실에서 장시간 시간을 보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물론 기도의 질과 양이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많이 사랑할 수록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기도란 '관계'를 의미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짧은 순간에도 왕을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초월하여 계시는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왕께 구하는 것을 보십시오. 여기서 느헤미야의 치밀한 행정관료적 성품이 들어납니다. 아마도 느헤미야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이런 걸 늘 말씀 드렸던 것 같습니다. 에스라가 왕께 마땅히 구할 수 있는 군대도 구하지 못하고 금식하며 기도했던 점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이런 일은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문제가 아니라 각기 다른 은사와 장단점이겠지요. 무엇을 구합니까? 왕이 즐겨하시고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으면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가서 그 성읍을 중건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 자리가 매우 부드러운 사적인 자리였음을 6절에 설명해줍니다. '그 때에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왕이 다시 묻습니다. 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언제 돌아 오겠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느헤미야가 기한을 정합니다. 이도 아마 다 준비된 대사였을 것입니다. 이는 느헤미야의 기도가 얼마나 실제적이며 현실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강서편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리셔서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왕의 삼림 감독에게 조서를 내려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자신의 거할 집을 위하여 제목을 달라고도 구합니다. 왕의 갑자스런 질문에 두렵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를 놓칠새라 조목조목 필요한 항목을 왕께 당당하게 구합니다. 이는 앞서도 설명드린대로 느헤미야가 이런 것 까지 다 기도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에스라의 지도력을 목사나 목회자의 지도력라고 정의를 한다면, 느헤미야의 지도력은 장로와 집사들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장로교 교회 헌법의 '교회정치'을 보시면 제 2 조에 '교회의 평범한 항존 직원'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삼직, 곧 '목사와 장로와 치리장로와 안수집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삼직은 평등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만 성직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장로와 집사는 평신도가 아닙니다. '평신도'라는 표현은 매우 카톨릭적인 표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평신도를 가르는 기준이 뭡니까?  목사 아니면 다 평신도 아닙니까? 개혁주의 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주의권은 근본적으로 '성직주의'를 배격합니다. 이것이 지난 74년 존스토트 목사가 기안했던 '로잔선언'의 핵심입니다. 목사도 평범한 교회의 직원이요, 치리 장로도 평범한 교회의 직원이며, 안수 집사도 교회의 평범한 직원입니다. 이 셋이 공히 교회의 직원입니다. 목사는 사장이고 장로는 이사고 집사는 과장이나 대리입니까? 이런 수직적 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구조이며, 각기 맡은 임무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 장로, 집사'는 공히 교회의 직원입니다. 목사만을 성직이라고 부르고 장로와 집사를 평신도라 생각하는 것은 전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장로교 헌법, 교회 정치에 왜 이게 등장할까요? 교회 정치를 무슨 세속 정치처럼 생각하는 오해들이 있는데요. 이것은 장로교에 대한 기본적 무지를 들어내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정치는 그냥 정치가 아니라 '직분론'이며, 이 직분론은 그냥 직분론이 아니라 교회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이 교회를 '제도'라고 정의한 것은 1600년간 전해 내려온 교회의 신앙고백을 파수하는 체제로서 교회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정치는 진리 곧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을 파수하는 체제요. 이 체제가 바로 직분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은 목사로 집중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삼직제도입니다. 뭐라고 정의합니까? '평범한'이라고 하지요. 현 작금의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는 장로나 집사를 호칭으로 불러서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 헌법에도 없는 초법적 권한이 목사에게 너무 많이 집중되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이것은 장로와 집사를 호칭으로 부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교회의 진리를 파수하도록 주신 권세를 무력화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더 악화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 그래도 초법적으로 집중된 권한에다 장로와 집사가 그간 행사하던 직원으로서의 권한도 다 무력화 해버리는 호칭제가 등장하게 되면 목사의 권한은 그만큼 더 강화되고 무소불위적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좋으면 다 좋을 수 있습니다. 고대에도 선한 왕과 악한 왕이 있었듯이 선한 왕이 다스리면 문제 될 것이 있습니까? 그렇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신앙의 진리를 파수하도록 주신 교회의 제도는 로마카톨릭과 같은 무소불위적 교황제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삼직이 수평하고 평등한 장로제도를 교리를 파수하는 교회의 제도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회복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장로와 집사를 무력화하게 되면, 목사는 말 그대로 '왕'이 되는 것입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가 아니라 대한 목사교 목사회가 되는 것이지요. 에스라서에서도 보았듯이 에스라서는 말씀의 중건이라는 강조점을 가졌다면 느헤미야서는 공동체의 중건이라는 강조점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각기 어떤 사명을 가졌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전무(행 6:4)했던 것처럼 목사는 이 일에 전무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궤하는 것과 성도를 돌아보는 것과 교회의 재정을 운영하는 것과 성도들이 바른 신앙에 서 있는 유무를 심방하는 일은 장로와 집사들에게 돌려져야 합니다.

 

약간 옆길로 샛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와 그의 치밀한 성품으로 교회에 예루살렘 공동체에 꼭 필요한 모든 것을 왕께 구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구한 것을 모두 받았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표현합니까?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신자의 삶의 일상성이요, 기도의 현실성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은 직접적이기보다 항상 변장한 손길로 등장합니다. 때론 내가 도움을 받기보다 도움을 주는 것을 통해서 우리 영혼이 도움을 입기도 합니다. 서양에서는 집에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하나님이 내리신 선물'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는 평생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물어보면 부모들의 소원은 한결같습니다. 내가 저 아이보다 딱 하루만 더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그런 말을 들으면 참 가슴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아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면서 사실은 우리 영혼이 더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됨을 또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선한 손을 보내시어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런 내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에 에스더서입니다. 놀랍게도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나 여호와같은 신적인 표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를 읽는 모든 사람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선한 손이 섭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저의 목회 칼럼 "에스더서의 잔치"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허락한 것도,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에서 수색을 읽은 것도, 그 자리가 하필이면, 왕후와 함께 하는 자리인 것도, 느헤미야를 보내기를 즐겨하고 그의 구하는 것을 들어준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3. 대적들의 근심(9-10)

느헤미야의 '의'에 대한 근심은 그의 오랜 기도와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로 응답을 얻습니다. 그가 왕의 술관원이 되고, 그가 왕께 술을 따르면서 얼굴의 수색이 왕의 눈에 뜨인 사실, 그가 왕께 개인적인 문제를 아뢰이듯 아뢴 사실, 그리고 왕이 즐겨하여 그를 보내고 필요한 것을 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한 손길의 도움이요 그가 기도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의로운 근심의 해결은 대적들에겐 새로운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영적 전쟁의 최전선은 전황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산발랏과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근심'하였더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의도적입니다. 앞서 설명드린대로 느헤미야의 근심과 대적의 근심을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적들의 근심꺼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근심의 대상입니까? 나는 의로운 일로 근심합니까? 아니면 대적들처럼 자신의 '이'를 위하여 근심합니까? 느헤미야는 '의'를 위해서 근심하지만 대적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손해가 갈까 하여서 근심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이와 비슷하게 근심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1]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2:1-4) 고린도 교회의 영적 안녕을 위해서 하는 근심이었습니다. 바울의 기쁨은 이들 공동체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위해서 근심했던 것이지요. 이런 마음이 바로 '기도의 동일시'의 마음입니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기에 근심도 합니다. 이에 비해 산발랏과 도비야가 하는 근심은 이스라엘이 흥왕하게 될까하여 근심하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지요?' 이웃이 흥왕해지면 내가 손해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 어촌에 어부가 두명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어부가 더 그 마을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때 한 명은 '아 이 친구랑 고기를 잡으면 더 많이 잡겠구나!'하고 생각을 하고, 다른 한 명은 '아 저 놈이 내 고기를 다 잡아가겠구나!'하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