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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느헤미야강해

성벽 재건이 시작되다(느 3:1-32)

성벽 재건이 시작되다(느 3:1-32)

 

노승수 목사

 

[1]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2]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3]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4]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5]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6] 옛 문은 바세아의 아들 요야다와 브소드야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7] 그 다음은 기브온 사람 믈라야와 메로놋 사람 야돈이 강 서편 총독의 관할에 속한 기브온 사람들과 미스바 사람들로 더불어 중수하였고 [8]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 저희가 예루살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 [9]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후르의 아들 르바야가 중수하였고 [10] 하루맙의 아들 여다야는 자기 집과 마주 대한 곳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하삽느야의 아들 핫두스가 중수하였고 [11] 하림의 아들 말기야와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이 한 부분과 풀무 망대를 중수하였고 [12]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 딸들이 중수하였고

 

[13] 골짜기 문은 하눈과 사노아 거민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분문까지 성벽 일천 규빗을 중수하였고 [14] 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15] 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으며 문짝을 달며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왕의 동산 근처 셀라 못가의 성벽을 중수하여 다윗 성에서 내려오는 층계까지 이르렀고 [16] 그 다음은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가 중수하여 다윗의 묘실과 마주 대한 곳에 이르고 또 파서 만든 못을 지나 용사의 집까지 이르렀고 [17] 그 다음은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 르훔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하사뱌가 그 지방을 대표하여 중수하였고 [18] 그 다음은 그 형제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헤나닷의 아들 바왜가 중수하였고 [19] 그 다음은 미스바를 다스리는 자 예수아의 아들 에셀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성 굽이에 있는 군기고 맞은편까지 이르렀고 [20]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 [21]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야의 아들 므레못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엘리아십의 집 문에서부터 엘리아십의 집 모퉁이에 이르렀고 [22] 그 다음은 평지에 사는 제사장들이 중수하였고 [23] 그 다음은 베냐민과 핫숩이 자기 집 맞은편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아나냐의 손자 마아세야의 아들 아사랴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24] 그 다음은 헤나닷의 아들 빈누이가 한 부분을 중수하되 아사랴의 집에서 부터 성 굽이를 지나 성 모퉁이에 이르렀고 [25] 우새의 아들 발랄은 성 굽이 맞은편과 왕의 윗 궁에서 내어민 망대 맞은편 곧 시위청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로스의 아들 브다야가 중수하였고 [26] (때에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하여 동편 수문과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내어민 망대까지 미쳤느니라) [27]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내어민 큰 망대와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오벨 성벽까지 이르렀느니라

 

[28]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29]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30] 그 다음은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 침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31]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고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누에 이르렀고 [32] 성 모퉁이 누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고들이 중수하였느니라

 

1. 대조되는 두 지도자(1-5)

성벽 재건은 52일만에 완성이 됩니다. 이는 느헤미야의 지도력의 결과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일을 적절히 위임을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도움을 결과였지요. 이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도움은 항상 이렇게 사람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은 전체 10개의 성문 중에서 6개의 성문이 중건되는 기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벽 재건이란 이 엄청난 역사에는 모든 사람의 협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대제사장 엘리아십으로부터 이 성벽 재건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족의 지도자가 먼저 솔선하여서 모범을 보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먼저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입니까? 혹 나는 지도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23:11). 그러나 여러분 아시다시피 섬김의 도란 십자가의 도이며 제자의 도입니다. 모든 신자가 따라야 할 우리의 참 선생이 되신 그리스도가 가신 길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길은 특정한 사람에 국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가야할 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어디에선가는 지도자이고 어디에선가는 따르는 자입니다. 직장에서 지도자일 수도 있고 가정에서 아이들을 이끄는 부모로서 지도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력이란 몇몇 국한된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나는 지도자로서 솔선하는 모습을 보입니까? 

 

우리가 에스라서에서도 살폈듯이 항상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이 찬성하고 동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6절에 보니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한 기록이 나오는데, 드고아는 예언자 아모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거기 있던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여기서 '그 주'는 느헤미야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의 측근이었던 자들이 자신이 가진 권세를 이용하여서 이 역사를 담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미룹니다. 어느 공동체나 이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게 자연스런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귀족으로서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불명예스럽게도 이것이 성경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수많은 후 세대들에게 전해지고 전해졌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불명예스런 행동이 천국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구원, 재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고전 3:15).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다른 교훈은 느헤미야라 하더라도 백성이 자원하여서 일에 동참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가장 측근이었으니 가장 설득하기 쉬운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동참치 않은 이 일을 용인하고 있는 것이지요.

 

최근 강남에 사랑의 교회가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건축을 반대하는 성도가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절필을 선언했습니다. 교회 지도자 중에 누군가가 압력을 넣어서 반대가 교회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지도력이 결코 건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공산당이 아닙니다. '교회 정치' 1 장 '원리'는 무엇보다 우리 '양심의 자유'를 제일 먼저 이야기 합니다. 교회가 진리를 파수하는 원리로서 정치를 하는 일에서 제 일의 원리가 양심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교회의 궁극적 주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분은 각자의 양심에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칼빈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어떤 지도자도 개인이 자신의 신앙 양심을 따라 결정하는 일을 방해하거나 압력을 행사해서는 안됩니다. 고대국가는 지금보다 훨씬 엄격한 제정일치적 사회입니다. 유다의 총독이란 사법및 행정에 전반에 합법적 권력을 가진 지위입니다. 그런 지위에 있던 느헤미야도 그의 측근의 이런 불참에 대해 어떤 위압이나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벽재건은 자원하여서 참여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2. 따르는 두 가문의 모범(14, 26절)

이번에는 아무 말없이 묵묵히 예루살렘 성벽 공사에 참예하는 두 가문을 소개할까 합니다. 먼저 14절에 나오는 레갑의 가문입니다. 레갑 가문은 대대로 '벧학게렘'에서 살았습니다. 그 뜻은 '포도원의 집'으로 아마도 이 도성이 포도원으로 둘러 싸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레갑은 원래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속해 있던 겐 족속(대상 2:55)입니다. 아마도 이드로의 장인과 함께 유대 공동체에 합류했던 것 같습니다. 레갑 자손이었던 요나답은 후손들에게 유훈을 남깁니다. 포도주를 대대로 먹지말라고 장막에 거하라는 유훈을 후손들에게 남깁니다(렘 35:6-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은 내 교훈과 언약을 지키지 않는데 이 레갑자손은 대대로 그 조상의 유훈을 지키니 그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영영히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축복을 주십니다(렘 35:19). 레갑을 혈통적으로보면 유대인이 아니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당당히 하나님의 공동체 곧 예루살렘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요 1:13).

 

두번째는 가문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부류가 모인 집단인 느디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성전 노예들입니다. 이 성전에서 물을 깃고 땔감을 준비하는 노예들은 여호수아서에 처음 등장합니다. 잘 아시는대로 여호수아 9장에 기브온 거민들이 잔꾀를 내어 자신들이 멀리서 온 것처럼 곰팡난 빵과 헤어진 옷과 신발로 위장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화친하는 언약을 맺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때부터 성전의 노예로 일하게 됩니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수 9:2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모세 역시 미디안과의 전투의 전리품이었던 노예들을 레위 자손들에게 주어 성전의 봉사를 하게 했습니다(민 31:30) 그들이 거주한 오벨이라는 지역은 기혼강으로 이르는 수문 근처 구역입니다. 아마도 성전에서 제사에 사용되던 물을 나르는 일을 했기에 거주지도 이곳으로 정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충정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비천한 신분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성전 공동체를 세우는 이 일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어떤 귀족들은 담부치 않았다는 불명예의 이름으로 어떤 노예들은 성벽을 재건 자신의 명예로운 이름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세상적 지위와 신분을 따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지도력에 반응하는 따르는 자의 태도(followership)라 할 수 있습니다.

 

3. 의와 이가 합하다(21, 23, 24, 26, 28-30)

제가 요즘 선덕여왕에 푹빠져 삽니다. 폐업을 이루려는 지도자는 '사람을 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덕여왕은 유신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가야의 후손들의 비밀결사조직인 '복야회'를 찾아갑니다. 신라의 대의와 가야 유민의 대의 그리고 그들의 '이'가 맞도록 그들을 설득하여 끌어냅니다. 어제 정말 멋진 대사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얻는 일은 머리로 되지 않는다. '가슴으로 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 김춘추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다. 목회는 사람을 얻는 일입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느헤미야도 이렇게 사람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얻습니까? '대의'만을 강조하면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 속담에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세상 이치가 어떻게 '대의'만을 가지고 되겠습니까? 성도들의 상당수는 세상에서 축복받는 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가 장난감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가르쳐야하겠습니까? 결혼적령기의 청춘남녀가 배우자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속되다 하겠습니까? 지도자란 따르는 자들이 '이'를 추구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는 것을 배우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고 누가 처음부터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에서 지나치게 원칙과 원리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리 선한 일이 못됩니다. 한창 열심이 일어나는 것에 찬물을 끼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열심 이후에 말씀과 설교를 통해서 교훈을 얻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타이밍의 문제입니다.

 

<논어(論어語> <이인편(里仁篇)>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옳습니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들이 물었다. "무엇을 이르신 것인가?"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서 충과 서에 대해서  송대 유학자 정이천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남에게 미침은 충(忠)이요.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은 서(恕)이다"라고 해설한 바 있습니다. 충(忠)은 中+心으로 나누어진다. 마음의 중심이 올곧게 하나 있는 것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성을 의미합니다. 서는 如+心으로 남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같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것이 목회의 기본이요 지도자의 기본적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옳음을 주장하는 일은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올곧게 타인에게는 미루어 그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데, 반대로 자신에게는 관대하게 타인에게는 올곧음을 주장하는 자기 중심성이 나타나면 교회는 참으로 어려워집니다. 이런 지도자가 세워지는 것은 교회의 재앙에 가깝습니다. C. S. 루이스가 그랬답니다. 나를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있는지 곰곰히 묵상해보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더랍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에게 관대합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을 사랑합니다. EBS에 '인간의 두얼굴'이란 다큐프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남자의 얼굴을 여자의 얼굴로, 여자의 얼굴을 남자의 얼굴로 포토샵으로 수정을 하고 여러 사진을 제시하고 가장 호감이 가는 이성을 고르게 했더니 모두 자기 얼굴을 수정한 이성의 얼굴을 골랐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타인에게는 엄격함을 보이는 것이 소위 '소인배'의 행동입니다. 대인과 군자란 자신의 마음을 올곧게 하며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지도자입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자기 집앞을 중수하게 한 것은 이처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의 자신에 대한 올곧음은 후에 또 나옵니다. 그것은 그 때 가서 다시 한 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어진 마음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 이방민족들로부터 위협에서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개인적인 '이'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세워져야 하는 '의'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성의 내부에 살던 사람들 혹은 성의 내부에 집을 가지고 있던 자들의 집 맞은 편의 성벽을 재건하도록 지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가족의 안위라는 자신의 '이'와 맞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곧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다는 하나님 나라의 '의'와도 맞습니다. 지도자는 이처럼 지혜로운 전략적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를 추구하면서 점차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삶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도자의 몫입니다. 또한 이것은 거창한 생각만해도 기가 죽는 대단한 일이 아니라 바로 집앞에 무너지 벽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당장에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지도자가 성경적 지도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배워갈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것 틀렸다 저것도 틀렸다. 바르지 않다는 식의 지적질만 해대면 그 교회나 공동체나 성도와 회원들이 성숙과 성장이 일어나겠습니까? 주눅이 들고 앞에서 조심하게 되고 외식이 늘어나게 됩니다. 교회는 가정과 같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가정이란 울타리 속에서 많은 실패와 실수에 대해서 용납을 받습니다. 우리 사회도 학생들에 대해서 관용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교회가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그들을 성장해야 할 자녀들로 보고 그들이 바른 사람을 살 때까지 참아 인내하며 관용하는 '톨레랑스'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지도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이'를 추구하는 마음과 하나님 나라의 '의'가 절묘하게 일치하도록 백성을 지도하여서 성벽 재건의 공사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52일만에 성벽이 완성되는 경이적인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4. 연합하다(전체적으로)

본문에는 '다음에'라는 단어가 28회나 등장합니다. 혼자하고 끝내버린 것이 아니라 연이어 이어지는 성벽 재건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북쪽, 서쪽, 남쪽, 북동쪽 성벽이 차례로 세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과 지역의 사람이 함께 합니다. 여리고(2) 드고아(5, 27), 기브온(7), 미스바(7)등의 다양한 지역에서 대제사장(1), 금장색(8, 31, 32), 통치자들(9-12, 14-19), 레위인들(17), 상인들(31-32) 딸들(12) 이방 출신인 레갑의 후손들(14) 성전의 노예의 후손이 느디님 사람들(26) 빈부귀천, 출신지역, 남녀를 무론하고 모든 사람이 동참하여서 연합하였습니다. 이처럼 공동체의 리더십이란 '함께 흔들 깃발을 제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는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가는 길을 알고 따르는 사람들을 그 길에 동기부여를 하고 그 비전 아래 사람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런 일이 아니고는 결코 사람들은 하나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성숙의 정도가 다 다르고, 성장배경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교회는 바로 이런 모든 장벽을 철폐하는 교회였습니다(엡 2:14). 나는 옆에 나와 다른 지체들을 용납하는 마음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