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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느헤미야강해

느헤미야의 모범과 치리(느 5:6-19)

느헤미야의 모범과 치리(느 5:6-19) 

노승수 목사

[6]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7]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저희를 쳐서 [8]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9]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10]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곡식을 백성에게 취하여 주나니 우리가 그 이식 받기를 그치자 [11] 그런즉 너희는 오늘이라도 그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취한 바 돈이나 곡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지 일을 돌려 보내라 하였더니 [12]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 보내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저희에게 그 말대로 행하리라는 맹세를 시키게 하고 [13] 내가 옷자락을 떨치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지니 저는 곧 이렇게 떨쳐져 빌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14]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을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부터 삼십이 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5]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16]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17]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일백오십 인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사면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18]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하나와 살진 양 여섯을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 느헤미야의 권징(6-9)

저와 함께 에스라서부터 계속 묵상해오신 분들을 다 느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민족의 범죄를 다스리는 권징과 치리의 방식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말이지요. 제가 에스라서를 묵상하면서도 말씀드렸듯이 에스라는 목회자적 리더십이요, 느헤미야는 장로적 리더십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느헤미야의 처리방식은 일사천리에 결단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신중함과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게 한 것에 비하면 느헤미야는 직접 처리하면서 모범을 행함으로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유다 형제를 종으로 삼는 일이 발생하자 느헤미야의 첫째 반응은 듣고 크게 노하였습니다. 다음은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고 대회를 열어 바로 처리를 합니다. 그것도 직접 나서지요. 느헤미야가 이렇게 단호하고 과단성있게 직접적으로 권징을 행함에도 백성 중에 반발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라의 경우는 치리의 방식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스 10:15). 

근데 느헤미야의 이러한 방식에는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없습니다. 물론 두 일의 사안이 다르기는 합니다. 에스라의 경우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는 사안이었고, 느헤미야가 이 사건은 민족을 노예로 삼고 취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에스라의 경우, 계층 갈등이 없는 민족 전체에 고루 퍼진 범죄라는 점에서 치리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에 비해 느헤미야의 사건은 민족 안에 계층 갈등이 분출된 것입니다. 즉,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갈등이 분출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귀인과 민장'(5:7)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하는도다'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조금 치리를 행하기 쉬웠을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의 '백성의 부르짖음과 원성'이 느헤미야의 치리의 명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왜 치리가 사라집니까?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처리 방식은 무엇이었을까요? 힌트는 본문 8절에 있습니다. "우리는...우리 형제... 우리의 힘을....속량하였거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에서 우리라는 말이 4번이나 강조되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장에 이어서 5장 역시 공동체성에 대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느헤미야는 자신을 이 공동체 밖의 인물로 생각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모범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 힘을 다하여 속량하거늘'이 그 증거입니다. 느헤미야는 힘닿는대로 노예가 된 형제 유다사람을 속량하기 위해 힘을 섰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의 이런 모범이 지금 '귀인과 민장'들이 아무 말이 없고 잠잠한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도자는 그런 점에서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 안에 불평이 가득한 고로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감정을 지도자들에게 투사합니다. 그러면서 지도자들의 이와같은 모범을 외식으로 몰아부치려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 살려는 것은 모든 신자가 마땅히 싸워야 하는 영적 싸움입니다. 그것을 외식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지도자는 항상 모범적이어야한다는 말은 지도자는 항상 '바른 생활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는 항상 자신의 삶 가운데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투쟁과 외로움, 슬픔과 애환, 아픔을 따르는 자들로 보고 깨닫도록 돕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느헤미야는 모범적인 지도자입니다. '우리 힘을 다하여 속량하거늘'이라는 말씀에서 느헤미야의 충정과 애씀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따르는 무리들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라 권면합니까? 지도자들의 잘 못을 지적하고 '우리 대적 이방 사람들의 비방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할 것이 아니냐'고 되 묻습니다. 이 말씀이 이 단락의 핵심입니다. 이방인들, 곧 불신자들의 비방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 가운데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다. 특히 내가 이 사회의 지도적 계층에 있다면, 또는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계층에 있다면 이 말씀은 더더욱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 경제적 문제에 관한 느헤미야의 치리는 느헤미야 시대에만 해당하지 않고 오늘날에도 그대로 해당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자는 기본이지요. 그러나 형제간에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들 간에 이런 일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따르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참으로 말씀을 따르며 불신자들의 비방을 생각하며 경외함으로 행하는 사람입니까? 

2. 느헤미야의 모범과 치리(10-13)

느헤미야는 '귀인과 민장'에게 너희만 희생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너희만 경제적인 손해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형제와 종자들이 돈과 곡식을 취하여서 백성에게 준다고 합니다. 아마도 '돈을 빌려주는 대부'를 한 것 같습니다. 후반절에 나오지요. '우리가 그 이식 받기를 그치자'라고 합니다. '너희가... 그치라'가 아니라 느헤미야 자신도 이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범이겠지요. 그리고 대안을 제시하기를 오늘 당장에 취한 바 돈이나 곡식이나 새포도주나 기름의 1/100을 돌려 보내라고 합니다. 이 정도이면 아주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그러자 12절에 느헤미야의 말대로 돌려보내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아니하겠다고 대답합니다. 대제사장을 불러 회중 앞에서 맹세까지 시켰습니다. 옷자락을 떨치며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시고 떨어져 텅 비게 될 것이라는 선언도 합니다. 그러자 회중이 다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대로 행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모범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치리의 결과 백성이 하나되고 화목되고 여호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성결도 이와 같습니다. 교회 안에 계층이 나뉘고 갈등과 반목이 생기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장로들은 부지런히 회중을 살펴서 이런 일이 없나 보고 모범 가운데 잘 권면하여서 교회를 하나되게 할 책무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장로가 아니니 해당이 없다 생각지 마시길 바랍니다. 혹 우리 가정에 이런 반목이나 갈등이 없습니까? 이것을 바로 잡을 책무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나 학교, 직장 가운데 생긴 어려움들은 없습니까? 

3. 느헤미야의 올 곧음(14-19)

성벽 재건이 시작되다(느3:1-32)의 본문을 설명하면서 한 번 설명드렸던 내용인데 다시 한 번 언급하겠습니다.<논어(論어語><이인편(里仁篇)>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옳습니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들이 물었다. "무엇을 이르신 것인가?"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서 충과 서에 대해서 송대 유학자 정이천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남에게 미침은 충(忠)이요.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은 서(恕)이다"라고 해설한 바 있습니다. 충(忠)은 中+心으로 나누어집니다. 마음의 중심이 올곧게 하나 있는 것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성을 의미합니다. 서는 如+心으로 남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같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것이 목회의 기본이요 지도자의 기본적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과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6-13절은 느헤미야가 어짊을 실천하는 마음으로서 '서(恕)'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4-19절은 자신에게 정직하고 바름을 실천하는 '충(忠)'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20-32년까지 12년간을 유다의 총독으로 지내면서도 총독의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전 총독들이 백성들을 토색하고 압제하였으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상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향해서는 관대한 목민의 마음을 보이고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한 충성스런 마음을 보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백성의 어려움을 보고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안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도리어 성 역사에 힘을 쏟고 땅을 사지 아니하고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느헤미야의 상에서 먹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도 꽤 많았습니다. 이러하더라도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않으니 이는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라고 합니다. '충(忠)과 서(恕)'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백성의 지도자의 기본기입니다. 지도자에겐 이와같은 어짐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백성에게 베풀고 은혜는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예수께서도 좀과 동록이 들지 않는 하늘 나라에 창고를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곁에 있는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내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도움을 베풀어도 되갚지 못하는 약자들을 도우면 하늘에 상급이 쌓인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이처럼 반복적으로 많이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이런 삶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사실입니다. 저 자신도 말씀을 전하면서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아직도 제 마음 속에는 이기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형제를 위해 더 나누는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