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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느헤미야강해

지도자에 대한 대적들의 공격(느 6:1-14)

지도자에 대한 대적들의 공격(느 6:1-14) 


노승수 목사


[1]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2]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3]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4] 저희가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보내되 나는 여전히 대답하였더니 [5]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내었는데 [6]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7]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8] 내가 보내어 저에게 이르기를 너의 말한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9]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10]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11]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12] 깨달은즉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13] 저희가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14]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무릇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1. 느헤미야를 해하고자 하는 계획(1-9)


느헤미야서가 단순히 성벽을 재건하는 역사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앞서 성벽을 건축할 때,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조성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무너뜨려 성벽 공사를 중단시키고자 하는 산발랏과 도비야의 공동체 외의 대적들에 의한 공동체 붕괴에 관한 메시지를 살폈습니다. 그 다음으로 느헤미야서의 저자는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공동체 속에 귀인과 민장들이 이식을 취하고 세를 과도히 받음으로 백성들 중에 자녀들이 종이되고 전답을 잡혀서 세금을 내는 일이 생겨서 공동체 내부의 갈등으로 공동체가 붕괴되는 위협에 대해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즉 첫 메시지가 외부의 대적에 의한 공동체의 붕괴를 시사했다면, 5장의 메시지는 공동체 내부의 대적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고려하면서 처음 외부의 대적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말씀드린대로 이것은 단순히 내부의 갈등이나 외부의 대적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곧 교회를 붕괴시키고자 하는 사단의 전술과 전략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사단은 심리전을 일삼는다는 점, 그러므로 외부의 대적을 대할 때, 그 심리전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내부의 대적에 대해서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주관자들과 악의 영에 대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대적을 다루는 방식으로 특별히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공히 치리와 권징으로 공동체를 성결케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치리는 공동체가 성결케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의 표지를 참된 성례가 시행되며 하나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며, 온전한 말씀의 지배 곧 권징이 시행되는 공동체를 참 교회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세 번째 요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적들과 영적 대적들은 앞의 두가지 방법 곧 외부의 위협과 내적 갈등이 공동체를 무력하게 할 수 없게 되자 이제 지도자를 공격합니다. 때는 성벽의 건축이 끝이나 퇴락한 곳이 남지 않았으나 아직 성문을 달지 못한 때였습니다. 이 소식을 산발랏과 도비야가 듣고 사람을 보내어 지도자 느헤미야를 만나자고 합니다. 오노 평지의 한 촌에서 만나자고 하지만 실상은 느헤미야를 해하고자 함입니다. 이에 대해 느헤미야는 성벽 공사의 큰 역사가 있으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해 4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같은 요구를 하고 느헤미야는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적들이 음모를 꾸미려는 목적으로 만나자고 할 때는 단호하게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입니다(요 8:44).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마귀라고 하십니다(요 8:3, 44 참조). 사단은 거짓의 아비요, 그를 아버지로 둔 이 세상의 무리들이 있습니다. 게중에는 종교적 지도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계시록에 마지막 때의 배도에 대해 이야기하며 큰 바벨론이란 음녀가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의 피에 취한 것을 요한이 보고 기이히 여기는 장면을 기록합니다(계 17:4-9). 천사가 왜 기이히 여기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이것은 말세의 징조이니 참 신자는 기이히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중에 마귀의 자식들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이들은 음모를 꾸미며, 자신의 아비 마귀를 따라 거짓을 일삼으며 훼방하며, 한 입으로는 찬송과 저주를 함께 일삼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채로 스스로 된 줄로 여기는 교만이 가득한 눈으로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여러분 지금 사마리아의 지도자인 산발랏과 도비야가 이렇게 훼방을 처음 시작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셔야 합니다. 혼합주의 신앙으로 자신들도 예루살렘에 분깃을 달라는 요구로부터 시작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대적이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예루살렘에서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요구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들의 행실은 거짓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증명해줍니까? 그들의 아비는 마귀라는 사실을 증명해줍니다. 


이런 대적들의 음모에 대해서 느헤미야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4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만나자고 하면 한 번 즘은 만나 줄 법도 한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여러분 교회에들어오는 대적의 세력은 가만히 들어옵니다. 양의 탈을 쓰고 들어오는 이리떼이지요. 그들이 처음부터 이리인 체 하고 들어오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권면합니다(살전 5:22). 악은 어떤 경우에도 공동체 내부에서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실수가 없는 공동체가 되도록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죄 중에 출생한 인간이 어떻게 범죄함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지도자는 악을 고수하고 악을 고집하며 거짓을 일삼는 무리를 교회에서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도자라함은 교회의 직원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곧,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모두 교회의 참된 진리를 파수하도록 부름받은 교회의 직원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직원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은 교회가 진리를 파수하고 그 진리로 성도들을 보호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니 음해를 목적으로 만나자고 할 때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한가지 교훈은 성도 공동체는 지도자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1절에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는 표현에 이어서 지도자 느헤미야에 대한 공격을 오버랩 시키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차례 느헤미야서는 단순히 성벽 재건의 역사가 아니라 공동체를 세움의 역사를 보여준는 책이라고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구약에서 성문은 다스림의 장소입니다. 모든 재판은 성문에서 이루어집니다. 시편에 문들어 머리들어라는 표현 역시 영원한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께 모든 권세를 드림에 대한 표현입니다. 권세와 권위의 상징인 성문을 아직 달지 못한 때라는 시기에 대한 표현과 지도자 느헤미야에 대한 공격의 연결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기록이 단순히 성벽 준공에 목적이 아니라 공동체가 최종적으로 진리를 파수하는 체제로서 교회의 직분에 의해 완성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에스라의 리더십을 목사의 리더십으로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장로의 리더십으로 설명드린 것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여기서 지도자에 대한 기도가 꼭 목회자를 위한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목사 뿐 아니라 장로님들과 안수 집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대적들은 교회를 훼파하기 위해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성벽의 방어력이 100%이라고 가정하여 봅시다. 그런데 성문의 방어력이 평균이 93.75%입니다. 그런데 8개의 성문 중에 한 성문의 방어력은 50%라면 이 성의 방어력을 얼마이겠습니까? 이 성의 벙어력은 50% 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소치의 원리'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진리 파수의 체제는 바로 '직분'에 있습니다. 그래서 직분자를 뽑을 때는 공동의회에서 2/3의 지지를 얻어서 선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직분자들의 최대의 의무는 바로 성경과 성경을 통해 우리 교회가 2000년간 고백해 온 신앙고백의 진리 곧 교리를 파수하는 것입니다. 한 성에서 대적을 맞아 성을 수성하고자 할 때, 어디에 가장 많은 방비를 하겠습니까? 당연 성문입니다. 왜냐면 이곳이 가장 취약하기 때문이지요. 교회 공동체는 이처럼 진리의 파수자인 직분자를 뽑는 일에 신중하여야 하고 뽑은 직분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타락하여 죄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교회는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의 직분자들의 권위를 존중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느헤미야가 만남을 거절하자 이제는 만나지 않을 수 없도록 음모를 꾸밉니다. 5절 이하에 나오는데요.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보냅니다. 이것은 이 사실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을 또 편지를 배달하는 과정에서 마을마다 소문이 퍼질 것이라는 것을 느헤미야로 느끼도록 하고 위협감을 느끼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느헤미야가 반역을 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스무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는 것이지요. 이 가스무는 2:19에 나오는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6절에 나오는 '가스무'는 동일인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자신은 중재자다는 점을 강조해서 느헤미야가 내려오도록 하는 회유와 협박을 동시에 행하는 고도의 전술입니다. 이도 심리전이지요. 소문의 다른 내용은 7절에 등장합니다. 느헤미야가 선지자를 세워 자신을 왕으로 예언하도록 부추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이 바사와 아닥사스다에게 들릴 것이니 내려와서 나와 의논하자고 협박과 회유를 같이 합니다. 보통 이러면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니 넘어가기 딱 좋지요. 


사실 이것은 느헤미야를 끌어내기 위한 술책이기도 하지만 느헤미야의 말처럼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입니다. 이런 것을 '투사'라고 합니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을 느헤미야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느헤미야는 이들을 위협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산발랏과 도비야, 가스무는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위협은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이런 사람들이랑은 대화하기 힘듭니다. 이 나르시스적 자기 중심성은 거의 병적입니다. 정상처럼 보이지만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만 보이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이야기해도 자꾸 그렇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흔히 '의처증'이나 '의부증' 환자처럼 배우자의 모든 행동이 외도의 행동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지요. 건강한 사람은 이런 일에 자신의 마음의 올 곧음으로 대처하는 법입니다. 제가 몇 차례 설명을 드렸지만 어질 '인(仁)'은 사람(人)의 두 가지(二) 도리를 의미합니다. 송대 유학자 정이천의 설명대로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으로서 '충(忠)'과 타인을 대하는 방식으로서 '서(恕)'를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으로 나를 오해해 올 때, 자신의 충 곧 올곧음이 있는 사람은 굳이 그것을 변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과 크게 다투지 않는 법입니다. 하늘 아래 부끄럼이 없기 때문이지요.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이 한동대 문제로 한동안 구설수를 심하게 겪으셨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교회 직분자들에게 100페이지가 넘는 연판장을 돌리고 당뇨가 있어서 인슐린 주사를 맞는 것을 두고 '하용조 목사 마약한다'라고 소문을 퍼뜨리더랍니다. 그런데 이 어른의 놀라운 점은 이 사건이 한 3년 정도 계속되었는데, 예배시간에 이에 대한 변명을 한 번 쯤은 할 것도 같은데 전혀 한 번도 이를 언급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일이 끝난 뒤에 '그 동안 고생이 믿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한 마디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도자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소문으로 느헤미야를 흔들어서 나오게 하고 나오면 그를 헤치려고 계획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자신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까닭에 이런 말에 요동치 아니합니다. 9절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 그로 인해서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여 이루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역시 기도의 사람입니다. 이 순간에 그는 무엇을 합니까? '내 손을 힘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현실성이요 일상성이요 기도의 현재성입니다. 그는 눈을 뜨고 기도합니다. 현실을 목격하고 그것을 자신의 힘을 다해 대담히 헤쳐 나가면서 기도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진정한 자세입니다. 그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까닭도 이런 기도의 자세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어짐은 기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향 한결같은 마음에서만 이런 올곧음이 나오는 것이지요. 사람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질서가 없고 규모가 없어지는 까닭도 지도자들이 원칙과 말씀을 지키고 고수하는 데서 멀어지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2. 느헤미야를 해하고자 하는 음모(10-14)


이제 대적들의 계획은 더 은밀하고 더 음흉하며 더 비열하게 계획됩니다. 느헤미야로 범죄를 하게 해서 소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난을 일으킬 때, 선덕의 지지자인 서현공과 용춘공을 화백회의에 참석치 못하도록 술을 먹이고 아침에 참석하고자 하니 병부를 동원해서 참석을 막고 화랑들이 무력으로 뚫고 들어가자 화백회의장에 무력 난입한 것을 빌미로 유신과 알천을 체포하면서 명분을 얻는 방식이지요. 정치인들이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우선 사람을 매수했습니다. 느헤미야와 가까운 유다 공동체 내의 사람을 매수합니다. 스마야를 매수합니다. 그리고 두문불출합니다. 느헤미야를 끌어드리려는 계책이지요. 이에 느헤미야가 심방을 갔습니다. 보통 이런 때 딱 넘어가기 좋습니다. 게다가 스마야는 우연인 것처럼 가장 하여 여선지 노아댜를 통해 대적이 느헤미야를 죽이로 오는 것을 거짓 예언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그가 이렇게 주장하면 누가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오늘날로 치면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따르지 않을 성도가 있습니까? 그런데 목사라도 말씀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면 '신앙양심'을 따라 따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진리를 파수하는 '교회 정치'의 제 1 장은 바로 '양심의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보통 방비를 하고 있으면 당하지 않지만 방비가 없이 그리고 내부의 대적이 이런 일을 꾸밀 때 넘어가기 쉽습니다. 앞의 편지 사건은 이 사건에 비하면 유치한 것이지요. 느헤미야가 찾아 갔더니 대적이 죽이려 올테니 성전에 숨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느헤미야의 대처 방식은 한결같습니다. 그는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예'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참된 경건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이라고 칼빈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느헤미야가 죽음이 두려워서 제사장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성전에 들어가 숨는 죄를 범하겠습니까? 대적들의 목적은 뻔합니다. 그렇게 성전에 들어가 숨으면 느헤미야가 죄를 지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느헤미야의 지도력을 떨어뜨리는 것이지요. 12-13절에 이유가 나오지요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었고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여러가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해오는 사역자나 성도들을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목사가 교회 정치를 함에 있어서 공식적인 제직회나 당회의 자리에서 의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성도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함으로 교회의 문제를 풀려는 경우 대부분 삯군일 가능성이 많습니다.<삼국지>에 여포와 동탁이 나오는데요. 초선이라는 인물이 미인계와 이간계를 통해서 이 둘의 관계를 갈라 놓습니다. 이간이란 '두 사람을 따로 만나 서로에 대해서 다른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의외로 교회에 이런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공식적으로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따로 만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간계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마야가 두불출하고 느헤미야로 찾아오게 하는 것은 고도의 수법이지요. 이런 자리에서 예언을 하면서 성전에 숨자고 하면 홀라당 넘어가기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원칙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도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느헤미야가 이런 위기를 잘 넘길 수 있는 까닭 역시 기도의 힘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기도합니다.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과 그들에게 뇌물을 준 산발랏과 도비야의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예전 군사정권 시절이지만, 갈보리 교회의 박조준 목사님의 '외화밀반출 사건'은 꽤 유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영락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박조준 목사님이 강단에서 당시 전두환 정권의 잘못에 대한 선지자적 메시지를 많이 하자 그 교회 장로를 매수하여서 출국 심사전에 목사님께 선물이라면서 손가방을 주고, 곧 바로 출국심사장을 통과하자 공안당국이 들이닥쳐서 '외화밀반출사건'으로 구속해버립니다. 사실 이런 일을 피하기가 쉽지 않지요. 느헤미야는 이런 대적들의 소위에 대해서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에서 느헤미야의 '기도의 동일시'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느헤미야의 입장에 서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자신의 대적들이 공동체를 허물기 위해서 행한 여러 악행들에 대해 기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갑니다. 기도란 제가 여러차례 설명드린대로 단순히 골방의 사건 만은 아닙니다. 기도란 우리 삶의 현장 속의 사건입니다. 나는 참으로 이런 느헤미야의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