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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능동순종과 주재권 논쟁의 공통점

율법은 우리를 성전이신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수단이 된다. 이를 이전 시대 개혁자들은 준비론이라 했다.
자기 죄를 깨닫고 괴로워 하고 해결하기 위해 이런 저런 노력을 하다가 그리스도께로 방법이 없어서 두 손들고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께서는 택지에게 믿음을 주입하신다. 믿음은 주입된 습관으로 하나님을 찾고 인식하는 기관이 된다.
율법에 미치지 못하는 삶으로 괴로워하다가 주께 나와 내가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두 가지를 주께 해결받는다.
1. 사망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해결받는다.
2. 내 부족한 행위를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으로 해결받는다.
이를 이중 전가(double imputation)라고 한다. 칼뱅 신학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과거 미국에서 주재권 논쟁이 있었을 때, 세대주의 목회자지만 맥아더 목사는 이 논쟁에 중심에 서게 되는데 그가 중심에 서게 된 이유는 실은 그가 세대주의자라서다. 주변의 대부분의 세대주의자들은 율법을 폐기된 경륜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은혜란 율법의 요구가 없어진 것을 의미하며 십자가가 이를 모두 해결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1. 구세주이시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맥아더의 주장은
2. 구세주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3. 그런데 이 2는 성경이 요구하는 의무에 순종이 요구되고 이 주장은 이런 내용을 함의하기에 세대주의자들의 거센 도전과 항의에 직면하게 되었다.
같은 논쟁의 다른 버전의 재연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부정이다. 이를 부정하고 행위언약을 부정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마치 마술적 효력을 지닌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의의 주입을 거절한 것이지 믿음의 주입과 이를 통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서 은혜가 주입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개혁자들의 신앙고백서에서 행위의 열매가 은혜에 대한 감사로 나오는 이유가 이것이기도 하다. 바둑에서 사활을 결장하는 것이 "수순"이듯이 똑같은 재료를 사용했다고 같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
3. 로마 교회는 죄를 지은 후 고해 다음에 보속의 행위를 두고 그 후 사면을 둠으로 행위가 구원을 결정하는 구조를 민들었다.
4. 그러나 개혁자들은 은혜로 주입된 믿음으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고 이에 따라 구원의 능력, 곧 은혜가 주입되고 이것이 맺는 열매로서 행위를 두었다.
따라서 개혁 전통에서 행위는 감사의 조건일 뿐이다. 이는 내가 은혜빋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열매는 어떤 수순에 있느냐에 따라 사와 활을 결정한다. 이런 열매를 한 번도 맺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기 신앙을 다시 점검해 봐야 한다.
어떤 이가 가톨릭에도 구원받는 이가 있다는 취지로 능동순종을 안 믿어도 구원에 지장 없다는 식의 포스팅을 했던데 일면 옳은 말이다. 구원은 허나님이 정하시는 일이고 그분의 선택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하시다고 나도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구원받겠지라고 생각하는 건 악하고 게으른 종의 표지다. 바른 신학이 바른 생활을 열매로 맺는다. 종국에 주께서 우리에게 보시는 게 열매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성경의 대부분의 종말에 관한 워딩은 행위에 따른 심판이다. 물론 은혜로 한 우리 행위도 여전히 주께서 받으실만하지 않다. 그래서 그 종말에 우리가 심판대에서 당당히 주장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이 내 순종이라는 것이다.
칼뱅과 바울의 강조점이 연합교리에 있는 것은 괜한 강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