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은총은 종교개혁기 가톨릭의 신학이거나 알미니안의 신학인 줄 알지만 그 역사는 교부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터툴리안은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으로 참된 회개에 이른다 했으며 순교자 저스틴은 하나님이 구원사역을 먼저 시작하신다는 의미로 선행적 은총을 설명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암브로시우스, 크리소스톰과 같은 교부들의 글에서도 선행은총에 관한 내용들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교부들은 “신인협동설”에 가깝게 이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선행은총이 본격적으로 설명된 것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부터다. 어거스틴은 선행은총 교리를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하여 발전시켰다. 그는 펠라기우스에게 보내는 두 편지에 “선행적 은총”과 “후행적 은총”을 주장했다. 그가 두 은총을 주장하기 위하여 인용한 성경은 시편 59:10에 “나의 하나님이 (앞서 가서, prevenient)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와 시편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이다. 시편 59:10의 “앞서 가서”라는 구절이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그는 “하나님이 앞서 가서”라는 구절로부터 “앞서 가는 은총”의 개념을 확보하였고, 23:6의 “정녕 나를 따르리니”를 기반으로 “뒤따르는 은총”을 개념을 주해적으로 밝혔다. 그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의 주체를 성령으로 보았으며 성령의 사역은 불가항력적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선행적 은총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교리는 개혁파적 기원을 두고 있다. 어거스틴이 사망할 즘,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선 이후에도 그 은혜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 논쟁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다가 529년에 이르러 오렌지 회의에서 해결을 보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사항에는 명백하게 펠라기우스와 반펠라기우스를 정죄했다. 로마 가톨릭의 반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에서 말하는 선행은총은 부분 타락한 인류가 스스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일반적 은총을 의미하며 웨슬리가 말하는 선행은총은 전적타락한 인류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시는 특별한 은혜를 말한다.
① 가톨릭
10(타락 이전) - 9(부분적 타락) = 1 ( 자력 구원 가능성: 선행은총)
② 칼뱅과 개혁파
10(타락 이전) - 10(전적 타락) = 0 (완전무능력)
③ 웨슬리
10(타락 이전) - 10(전적 타락) + 1(선행은총) = 1 (응답할 능력)
그럼 개혁파는 선행은총을 말하지 않을까? 어거스틴의 맥락은 자력으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이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은 자연인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은혜의 선행(先行) 없이 스스로 자연법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중세 가톨릭은 "선행 은혜로 믿음을 주시고 이후에는 순종의 공로로" 구조가 된다. 그나마 믿음 역시 전적 타락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반응하는 것 역시 은총에 반응은 자원함이다. 알미니안에게 선행은총은 보편 은총이다.
개혁파가 중생과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를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준비"는 타락한 사람이 은혜받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부응하기 위해 준비될 필요가 있고 이것은 어거스틴의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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