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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다산의 목민심서와 목회

다산의 목민심서와 목회


노승수 목사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다. 도는 만백성을 가르쳐 각기 자신을 수양하게 하고, 태학에서는 공경대부의 자제들을 가르쳐 각기 자신을 수양하게 하여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목민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반이고 그 반은 목민이다."


-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중에서-


목민심서는 모두 12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1부는 총론 격에 해당하는데, 1편은 부임, 2편은 율기, 3편은 봉공, 4편, 애민까지가 1부에 해당합니다. 2부는 수령 산하의 6전, 즉, 이,호,예,병,형, 공전에 대해서 다루는 각론으로 마지막으로 11편은 진황(흉년에 대한 대비)와 12편의 해관(관직을 벗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고을을 두령으로서 어떻게 마을을 다스리고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하며, 떠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룬 책입니다. 나도 그렇지만 보통 고등학교 시절 정약용이<목민심서>를 지었다는 정도의 지식이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다산 선생이 목민심서를 쓰게된 것은 그가 강진으로 57세의 나이로 유배를 가서, 목민관이 한 지방에 부임해서 이임할 때까지 어떻게 백성들을 섬겨야 하는지 유의 해야할 목민의 제반사항을 기록한 책이라고 합니다. 
목민심서는 국내에서 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세를 탄 것 같습니다. 베트남의 호치민은 20세기가 낳은 인물 중의 한 사람인데, 베트남에서 그의 국민들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높은지 월남전쟁 중에도 그의 생일이 되면 적대국이었던 월남에서조차 상점의 문을 닫고 쉬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전쟁 후에는 월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호치민시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지만 민족의 지도자로서 베트남에서 존경받는 지도자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갑자기 호치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월남전의 막바지였던 1979년에 그가 사망하였을 때,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보니, 여벌의 옷 한 벌, 신발 한 컬레, 그리고 다산 선생의<목민심서>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가 어떻게<목민심서>를 가지게 되었는지 알길이 없지만 호치민은 일생 동안에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를 애독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어느 학자는 목민심서를 읽고 탄식하기를 '만일 조선의 정약용이 때를 만나 그의 경륜을 조선반도에서 펼쳤다면 일본은 조선의 종이 될 뻔 했다.'고 했답니다. 
목회자로서<목민심서>에 관심을 갖게되는 것은 이것이 한 지방 고을을 다스리는 목민관이 부임으로부터 해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처신하고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목회자의 일생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기본적으로 그 소속을 노회에 두고 교회의 부름을 받아 한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을 받음으로부터 정년으로 혹은 선교사로 혹은 또 다른 이유로 부임지를 떠나기까지의 전과정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제 가슴에 와닿은 말은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반이고 그 반은 목민이다'라는 말입니다. 군자의 도는 유학이 이르는 도리이지만 성경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도 유익함이 있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빈 목사님도 기독교강요 첫머리에서 인식론의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고 하려면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자라감은 결국 자신을 아는 지식의 자라감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군자의 학문의 반이 수신이듯이 목사의 학문의 반은 자신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군자의 학문의 나머지 반이 목민이듯이, 목사의 나머지 학문의 반 역시 성경과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성도들에게 가르쳐 목양하는 것입니다. 목회에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컨대, 심방과 같은 것이 있지요?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성도의 영혼에 바르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역시 말씀의 내적 적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수신은 목회자만의 미덕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참된 미덕이라 할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쳐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를 따르게 하고 또 교회를 섬길 직원(목사, 장로, 집사)될 자들을 가르쳐 교회를 진리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게 하는 것이 목회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먼저 성경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을 목민심서는<수신(修身)>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목회자가 닦아야 할 학문의 절반인 셈입니다. 그 절반은 그 배운바 말씀을 가지고 성도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께 뿌리를 밖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도록 기르는<목회>즉, 말씀을 가르침이 절반입니다. 결국 성경적 관점에서 군자의 학문이란 자신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에 기반해서 성도를 가르쳐 성경에 복종케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순종케 됨에 있어서 늘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유학에서는 군자에 늘 반대되는 것으로<소인>혹은<소인배>라고 합니다.<소인>혹은<소인배>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말씀을 우리 심령 깊은 곳에 적용하는데 방해꺼리를 찾아서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목회자를 비롯하여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자라감에 있어서 자신을 알지 못함이 가장 큰 방해꺼리입니다. 말씀을 들음과 동시에 참 신자는 자신을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시지 않은 자들은 말씀을 들어 자신의 죄가 발각이 되면 '이를 갈며' 이 문제를 다른 이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의 사례일 것입니다. 이런 행동을 유학에서는<소인배>라 한 것입니다. 송대의 역사철학자 사마광이 "소인배와 정치를 함께 하느니 차라리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하겠다. 어리석은 자는 악을 행하고자 해도 능력이 안 돼 못하지만, 소인배는 간악하고도 흉측한 일을 저지를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소인배>는 결코 어리석지 않습니다. 지혜라 부르기는 힘들어도<간교함>으로 넘쳐납니다. 
성경에도 삯군 목자에 대해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아닌 삯군 목자를 위해서 열심을 내도록(갈 4:17) 합니다. 얼마나 교묘한지 그 가르침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삯군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성도들로 하여금 목회자에게 열심을 내도록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성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열심을 내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칭찬으로 도배를 해서 결국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사기꾼들의 전형적 수법이기도 하지요.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 그 양이 자기의 양이 아님으로 버리고 달아난다고 했습니다(요 10:12-13). 삯군의 목적은 처음부터 그들의 착취하여 기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소인배의 특성은 이런 삯군의 가르침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말세가 되면 귀가 가려워 사욕을 좇아 선생을 둔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자기 본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으로부터 메시지를 듣는 것이 소인배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칭찬을 좋아하고 책망을 싫어합니다. 물론 어린아이는 칭찬이 필요하고 칭찬을 통해서 좋은 성품이 생기기도 합니다. 모든 일에 균형이 필요하듯이, 늘 귀에 듣기 좋은 말만 따르는 것을 소인배의 특징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교역자를 경계하고 듣기 좋은 소리를 듣기를 즐겨하는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목민관으로서 군자의 도리와 반대되는<소인배>의 특징에 대해서 맹자에 이르기를 "비판하고자 하나 꼭 집어 말할 것이 없고, 풍자하려 해도 할 만한 것이 없으며, 덧없고 더러운 세태에 잘 적응한다. 사람됨이 충직해 보이고 행동은 청렴결백한 듯하여, 여러 사람이 다 그를 좋아하고 스스로도 자신이 옳다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성경이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흐름을 잘 읽어내며 거기에 잘 적응을 하는데, 처세에 굉장히 능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좋은 사람이라 칭찬을 얻을 뿐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옳게 여긴다 했습니다. 마치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았던 유대인의 모습(롬 10:3)과 그리고 자신을 옳게 보이려 했던 율법사(눅 10:29)와 흡사합니다. 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항상 자기를 옳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의 판단자가 된 듯한 어투를 사용하지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신을 옳게 믿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잘 자각하지 못합니다. 자신은 틀림이 없고 바른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해 속으로는 늘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간교하게 누구의 의견이 다 듣고 있으며 자신의 마치 최종판단자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맹자가 말한 이들의 또다른 특징은 바로 '양비론'과 '양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사람이 좋게 보이는 까닭은 특정 사안에 관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어떤 일들에 대해 두 가지를 다 긍정함으로 양쪽으로부터 모두 인정을 받으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인배의 전형적 행태입니다. 논어의 학이편에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라 하여 군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양비론과 양시론은 결국 모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삿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이런 특징은 그의 처세에도 그대로 들어납니다.<소인배>라 하여 그 마음이 옹졸하고 명민하지도 않으며 처세도 못하는 꽁생원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에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하면서 이 세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그리스도의 유일성>이라는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이 바로 이런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매우 고상한 인간의 윤리와 도덕으로 포장하려 하겠지요. 그러나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 법입니다(눅 7:35). 우리의 유일한 구속을 그리스도 예수로만 나오지 다른 것과 양립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지요. 
세번째 이 소인배에 대해서 공자는 "소인배는 남 탓만하며, 궁해지면 별 짓을 다 한다"고 했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고 도가 아니면 듣지 말아야 하는 법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족속입니다. 그래서 군자는 늘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길을 셋이서 갈 때 그 중 한 명은 나의 선생이라 여기는 반면, 소인배는 결코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알버트 J. 번스타인은 "만약 세 사람이 당신을 말이라고 부른다면, 인정하고 안장을 장만하라."고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 알기가 어렵고 그래서 타인이 보는 눈이 때론 더 정확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교훈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 마음의 이러한 소인배적 구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책망은 항상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항상 이걸 우리 남편이 들었더라면,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령께서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이 말씀을 내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군자의 학문의 반이 바로 자신을 닦는 수신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안되면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이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언제나 각자의 심령에 성령으로 말씀하여 주시기는 하지만 지도자라는 자리가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리이기 때문에<성경의 사람>이 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주께서 쓰시는 그릇은 재능이 많고 민첩한 그릇이 아니라 깨끗하고 충성스런 그릇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돌이켜 배우지 않는 자는 남을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이 많이 선생되지 말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로서 어느 것보다 저는 저 자신을 가르치는 일에 힘쓰려 합니다. 매주 돌아오는 설교에 때론 미쳐 제게 충분히 교훈되지 못한 것을 가르칠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을 매주간 만나야 하는 목회자이기에 학문의 반인 수신을 제대로 하는 일의 중요함은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야 학문의 절반인 목민 곧 목회도 잘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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