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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목회는 정치다.

목회는 정치다. 

노승수 목사

섭공(禁나라의 大夫)이 정치가 무엇이냐고,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기뻐 따르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덕을 따라) 찾아오게 해야 한다(葉公問政 子曰 近者悅 遠者來) 

논어 자로편(論語 子路篇) 중에서...

우리 사회에는 정치에 대한 혐오가 자리하고 있다. 참된 정치가 부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2000년도 훨씬 전에 금나라의 대부 섭공이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는 말하기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기뻐 따르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덕을 따라 찾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자는 춘추시대 사람이다. 노나라의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지만 결국 정적들에 의해 쫓겨나 여러 제후국들을 떠돌게 된다. 춘추시대는 그야말로 여러 나라가 난립하고 세력 경쟁이 치열하던 때라 임금이 정치를 잘하여 치세가 안정이 되면 백성이 기뻐하고 원근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목회도 이와 같지 않겠는가? 가까이서 그를 대하는 사람들이 기뻐 따를 수 있어야 하고, 그 덕이 멀리 까지 소문이 나서 먼거리를 멀다하지 않고 찾아 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좋은 소문이 나야 한다. 좋은 소문이 나려면 먼저 함께 하는 성도들에게 기쁨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소문이 멀리나서 멀리서도 찾아 오게 된다. 즉, 내적 기쁨의 원리가 외적인 성장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근자열원자래(近者悅遠者來)의 정치 원리이다. 바른 다스림은 바로 사람의 내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백성들 가운데 기쁨이 있으면 먼 곳의 백성들도 찾아오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면적, 또는 개인적으로도 내 안에 기쁨이 있으면 외적 열매들을 결실케 된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원리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정치란 자신을 닦아서 바르게 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성경에서도 그대로 찾아 볼 수 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법칙(마 7:17)이 그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기뻐하고 먼 곳에 있는 사람이 따르는 일은 열매가 아니라 나무, 즉, 사역의 성과가 아니라 그 내면의 질서에 달린 것이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부모의 행실이 결국 아이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목회 역시 가정과 같아서 대부분의 경우 목회자의 성품을 그대로 닮은 교회로 자라게 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노승수 목사의 목회 칼럼<교회는 목사를 닮는다>를 참조 바란다. 그렇기에 목회자가 성경의 사람(Homo unius Libri)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성경의 사상에 물들고 성경의 사상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고서 바른 정치와 목회를 기대하기 힘들다. 

예전에 한홍 목사가 목회자의 실력을 '칼'에 비유하고 인격을 '칼집'에 비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칼이 무디면 영혼을 치유할 수 없고 칼집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칼을 실력에 칼집을 인격에 비유했다. 그러나 이 둘이 따로 놀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물론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누구나 결점이 있고 모자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나무와 열매가 따로 일 수 없는 것처럼 '칼과 칼집'이 따로 이해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실력은 인격에서 나오며 인격은 실력에서 나오는 법이다. 이것이 따로 노는 까닭은 실력에 대한 세속적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속적 실력이 아니라 진정한 영적 실력은 하나님과의 풍성한 관계로 부터 나오는 것이지 않겠는가?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설명하셨다. 

내가 생각하는 교제와 결실의 두 원리는 인(仁)과 의(義)로 요약할 수 있다. 인의(仁義)는 목회자의 가장 기본적 덕목이다. 내가 여지껏 여러 담임 목회자를 경험해봤지만 가까이서 그를 존경할만하고 그를 대하는 것이 기쁨이 된 목회자는 단 두 사람 뿐이었다. 대부분의 경우가 가까이 할수록 상처만 크게 남는다. 이는 그들이 특별히 나빠서라기 보다 인간의 본성의 부패의 결과이기도 해서 목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사랑해서 만나 부부가 된 두 사람이 살다보니 가장 미운 사람이 되기도 한다. 가까이 있어서 기쁨을 주기보다 상처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군가를 가까이 서 아는 사람들이 그를 기뻐한다면 그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요, 하나님의 아신 바 된 자라고 확신한다.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에 대해서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딤후 2:24-25a)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기뻐하고 먼 곳에 있는 사람이 따르도록 하는 것이 곧 인(仁)이다. 인은 글자대로 해자하자면 사람으로서 두 가지 도리인데, 이것을 논어의 인의편에 이르기를 공자가 이르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옳습니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들이 물었다. "무엇을 이르신 것인가?"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사람으로서 두 가지 도리이자 인(仁)의 실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서 충과 서에 대해서 송대 유학자 정이천은 이렇게 설명했다. "자신으로부터 남에게 미침은 충(忠)이요.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은 서(恕)이다"라고 해설한 바 있다. 충(忠)은 中+心으로 나누어진다. 가운데 중(中)에 마음 심(心)이 합쳐진 조어이다. 마음의 중심이 올곧게 하나 있는 것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성을 의미한다. 서는 如+心으로 같을 여(如)에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이다. 즉, 남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같게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인(仁)은 그런 점에서 수기(修己)에 해당하고 정(政)은 인의 원리가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다스림 곧 치인(治人)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르게 베풀어지는 것을 의(義)라 할 것이다. 논어의 개념을 성경으로 재해석해서 적용해보면, 인의 첫째 원리인 충(忠)에서 위에 있는 중(中)자는 가운데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맞다' 혹은 '곧다'는 의미를 담는다. 충은 마음의 중심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의 올곧음 혹은 맞음을 의미한다. 마음이 스스로 맞을 수는 없는 법 맞다는 것은 무언가 상대를 함의하는 단어이다. 신하의 마음이 임금과 맞음이 충이듯이 하나님과 그 언약 백성의 마음이 맞음 역시 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충성스러운 자는 마음의 올곧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마음을 가진다. 이것을 경건이라 하는 것이다. 믿음은 이처럼 말씀 중심에서 떠나지 않아서 스스로를 말씀에 따라 올곧게 하고 말씀이 권면하는 바를 깊이 사랑하고 말씀이 금하는 것을 혐오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갖는 것이다. 인의 둘째 원리인 서(恕)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것(롬 12:6)이다. 마음의 올곧음이 긍휼의 마음이 없이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로 이어진다면 그것을 올곧음이라 할 수 없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 법이다(잠 10:12). 또 긍휼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품는 일이 진리를 거스린다면 그것은 같은 마음일 수 없다. 주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마 7:6)고 하심으로 분별이 없고 진리에서 벗어난 서(恕)의 마음을 경계하셨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라고 하시면서 이것이 성경의 정신이라고 하셨다. 이런 인의와 덕행이 있을 때, 가까이 있는 자들이 기뻐하고 멀리서 그 덕행을 보고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란 근본적으로 참된 정치를 일컫는 말인 셈이다. 칼빈도 참된 교회의 표지를 말씀과 성례 그리고 치리라 하였으니 교회는 결국 '말씀의 다스림과 지배를 받는 공동체'이고 이것을 온전히 하는 것을 정치 곧 목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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