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앙 안에서 산다는 것..
노승수 목사
부패한 인간의 마음의 근본적 속성은 간교하고 간사함에 있다. 원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이 사람의 마음이어서 쉽사리 스스로가 자신에 마음에 속는 법이다. 사기꾼을 멀리 있지 않고 우리 마음 속에 가득하다. 우리가 쉽게 사기를 맞는 까닭도 우리 마음의 속임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 자신의 마음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자신을 신뢰하려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마음의 어리석음이 좀처럼 벗어지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좀처럼 변화되지 않으며 중생한 자로서 그 삶에 성령의 열매를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랑은 믿음의 자연스러운 열매이다. 믿음이란 것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고, 이 연합은 사랑이 없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속임 때문에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체험을 가장 신뢰한다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체험했다면 그 사람을 다른 관점으로 설득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스스로 현재의 체험을 뛰어 넘는 다른 체험을 경험한다면 모를까? 개혁신학의 신학원리 중의 하나는<유한이 무한을 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속임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오롯이 담아 낼 수 있는 것처럼 군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편협하고 지엽적이 지식을 가지고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군다는 것이다. 그걸 성경이 교만이라 했고, 교만한 마음에는 달리 처방이 없다. 특히 성경의 지식이 가득하고 교만하여진 것은 거의 불치병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설로 일갈하셨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이런 독설에도 자기 이념과 사상으로 무장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의 견고한 진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이 많으신 주님이 이와 같이 독하게 말씀하셨으리라.
그래서 교회의 가장 큰 해악은 모세오경만 인정하고 선지서를 인정치 않고 부활도 부정하던 사두개인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도 부활도 인정하며 열심이 특심하여 열심을 내던 바리새인이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주의나 세대주의적 근본주의 모두 교회의 해악이지만 더 큰 해악이 있다면 자유주의가 아니라 세대주의적 근본주의자이다.예수님은 부활도 선지서도 믿기를 거부했던 사두개주의자들에게<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독한 말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 가장 큰 질타를 받았던 무리는 당시의 외식과 교만으로 가득하여 회칠한 무덤과 같은 바리새주의자였다. 나는 이 원리가 오늘에도 동일하리라 믿는다. 대체로 개혁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보다 세대주의적 근본주의에 더 동류의식을 느끼지만 분명 이 시대에 주님이 오신다면 이 세대주의적 근본주의자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시리라 의심치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깨달았음에도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과 알아감이 없다면 그는 바리새인이요. 세대주의적 근본주의자이다.
성지 순례라는 표현이 적절치는 않지만 성경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이스라엘은 예수를 믿는 이라는 누구나 한 번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관광을 가이드하는 한 성도의 말을 옮기자면, 이스라엘 관광을 위해서 오는 한국의 목사들도 여러 질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무례하고 경우도 없고, 자기 중심적이며, 품위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목사일수록 그 교단이 보수적이다 못해 극단적인 행태를 보이는 교단의 목사들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비교적 인간적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 할 줄 알고 사람에 대한 기본적 예의와 품위를 지는 목사들은 비교적 자유진영에 속한 목사 쪽으로 갈수록 더 그런 편이라는 것이다. 그분도 보수적 교단에 속한 분으로 안타까워 하는 말이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긴다면서 그럴 수 있는가? 하는 탄식이었다. 그분이 언급한 교단이 어느 교단이지를 여기 글로 남기는 것은 적절치 않아 생략하지만 참 반성해야 할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자유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실 이런 열매는 그들이 가진 천박한 신학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중생은 개인의 체험속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신학적 중생이 함께 일어나야 한다.
이들의 특징은 사나우며 공격적이고 다투기를 잘 한다는 것이다. 모두 바울이 언급한 말세의 특징이기도 하다. 성경은 분명 심판은 주님의 몫이라 했다. 우리가 심판자를 자처하다가 우리 영혼이 망하게 됨으로 심판은 여호와께 맡기라 하였다. 이단에 속한 자는 한 두번 권한 후 멀리하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죽자사자 달라든다. 이미 그 마음이 적개심으로 점령을 당하고도 깨닫지 못한다. 교만은 필연, 적개심을 불러온다.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장이고 살인자인 것도 이런 연유이다. 사납고 미움이 가득하여서 사소한 것에 다투기를 즐기고 논쟁적이다. 잠언은 이런 자를 미련한 자라 했는데,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느니라"고 했다. 분노는 그 자체로 우리를 넘어지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권면하는데로 그것이 해가 지도록 우리 마음에 묵은 것으로 남을 때, 우리에게 끼치는 폐해와 해악은 이루 말할 길이 없다. 분노는 교회 지도자에게 있으면 영적 폭력이 되고 분노와 미움이 성도들에게 있으면 주님의 몸인 교회나 나뉘고 분쟁의 소요에 휘말리게 된다. 분노란 자기 안에 이유가 있지 않고 늘 타인과 환경에 잘못의 원인을 찾는 마음의 발현이다. 그래서 주께서도 바리새인들을<회칠한 무덤>이라 하신 것이며, 그들을 이르기를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 하신 것이다. 원인은 자신에게 있음에도 여러가지 자신의 방어를 위한 무장으로 말씀을 취하고 모든 탓을 밖에 두니 그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일전에 미국에서 비교적 개혁주의적 목회를 하는 존 파이퍼 목사님이 후계자로 생각하는 Mark Driscoll 목사의 설교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마크 드리스콜은 이머징 교회 운동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약간 의심을 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재 그의 사역에는 이렇다할 문제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의 설교 근본주의자(종교인, 바리새인)가 되어가고 있는지 진단하는 7가지 방법은 우리에게 경종을 일깨운다. 바리새인의 7가지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1. Proud 교만 2. Cessationists 성령의 활동을 막음 3. Unloving 사랑없음 4. Hypocritical 허식 5. Joyless 기쁨 없음 6. Methodolatry(Method + Idolatry) 방법의 우상화 7. Powerful 권력의 추구>이런 특성을 결코 개혁주의적 신앙이 아니다. 개혁주의로 미화되지만 자유주의만큼이나 나쁘고 교회와 성도를 병들게 하는 신앙 행태이다.
그럼 개혁주의 신앙 안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의 필연은 사랑이다. 믿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니 사실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 한 일이다. 그래서 믿음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불러 온다. 진리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러나 사랑 자체가 믿음은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요. 이 지식은 공허한 껍데기 뿐인 지식이 아니라 그를 인격적으로 앎으로 생긴 지식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단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그치지 않고 나를 아는 지식으로 이어진다. 반드시 그렇다. 하나님의 존귀함과 내 영혼의 불쌍함과 비천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용납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필연 사랑이란 열매를 맺는다. 마귀의 열매는 거짓과 미움 그리고 살인하는 것이라면 믿음의 열매는 생명을 얻게 하고 자라게 하며 우리 안에 천국의 소망을 싹트게 하는 것이다. 이걸 다른 말로<하나님을 경외함>이라 하고 더 줄여서<경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칼빈은<경건>을 하나님을 뜻을 어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감정이라고 했다. 조나단 에즈워즈 목사님도 참된 신앙 곧 믿음은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고 했다. 사랑이 식어지고 사납고 다투기를 좋아하고 제 고집대로만 하는 일이 내 안에 일어나고 있다면 경계하라. 거기엔 경외함도 경건도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바리새주의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곤고함만이 가득하다. 눈물이 많은 날들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때 은혜가 더 가득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히려 마음이 높아졌을 때, 나도 모르게 나를 점령해버린 곤고함에 내 영혼은 시들어가고 말 것이다.
글을 몇차례 수정했다. 여전히 허술하고 헛점 투성인 자신을 발견하고 더 감사하고 더 안심하게 된다. 이런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슬픔과 애통이 그리고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긍휼이 내 영혼을 구원할 것이다. 부자인 줄 알았다가 가난한 라오디게아인으로 발견되지 않고, 그 심령을 가난케 함으로 천국을 소유한 자로 발견되길 소망한다. 이 곳에 오시는 모든 분들께도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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