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는 누구인가?
노승수 목사
나는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요? 길을 잃어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한 교회의 일꾼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이 직무를 순전하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참 두렵습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참 두렵습니다. 성경을 많이 가르치면 될까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는 것과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전혀 별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두렵습니다. 그냥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라면 그들에게 지식을 잘 전달하면 그만 일 것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그것도<사생활의 보장>을 강조하는 극히 개인주의화 된 이 사회에서 교사의 역할은 전문성있는 지식의 전달로 국한합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들의 삶의 깊은 자리까지 목회자가 진단하고 처방해 줄 수 있는 길이 어쩌면 막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지식은 원하지만 스스로 하길 원하고 혼자서 하길 원합니다.
게다가 현대사회가 전달하는 지식은 그 사람의 인격과 관계하기보다<기능성>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의식구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이 사회가 존경하고 지식인은 인격적인 지식인이 아니라 전문성있는 지식인입니다.<착하고 무능함>보다<똑똑하고 못됨>을 선호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선택지가 꼭 이 두 가지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성경의 원리대로라면, 전자 곧<착하고 무능함>을 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렇지 않지요. 목사에게서 전문성을 기대합니다. 물론 목사는 전문적으로 잘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다익선입니다. 근데 문제는 이렇게 지식에 치우침이 결국 내실있고 안으로부터 여무는 신앙 성숙을 방해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알면 다 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 좋은 설교를 그리 많이 듣고도 변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알고도 변치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현대 사회는 그 사람의 인격적 면모를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그가 가진 능력 특히 지적 능력을 가지고 그를 평가하기 때문에 그런 성경의 배경적 지식들을 가지고 그것으로 다 이룬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수영 교본 100권을 읽어서 수영 선수보다 수영방법에 대해서 더 정통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물에 들어가지 않고는 수영을 배울 수 없고, 결코 읽은 100권의 수영교본이 그로 하여금 물에 들어서자마자 수영할 수 있도록 돕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원리를 모르는 사람보다야 빨리 깨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몸으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도 이와 유사합니다. 우리가 삶의 원리를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모르는 것들은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 배움이 앞서 더 중요한 것은 배움의 자세를 배우는 것입니다. 공맹의 경전인 대학의 서문에는 사람이 기본도리로 세소응대와 진퇴를 꼽았습니다. 세소응대란 세수하고 비질하는 것과 사람을 대하는 도리를 일컫는 것이고, 진퇴란 그 나아감과 물러남을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8세에 소학을 익히면서 배워야 할 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선비들은 학문을 닦기전에 마당을 비질하는 것부터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은 배움의 기본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자세가 되어 있지 않고, 배우고 익히는 것은 독이되지 결코 약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정신에서도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에 열심을 내면서도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들보다 글줄 더 읽으니 낫다고 여기십니까? 혹은 남들보다 성경 한 줄 더 읽었다는 것이 나의 자랑꺼리입니까? 아니면 공맹을 읊조리던 선비들처럼 성경을 줄줄 읊을 수 있음에 우쭐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아직 멀었습니다. 성경을 읽어 머리만 밝힐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 마음을 밝혀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우리 인생에서 가장 머나먼 여행길이 있다면 그것은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이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진실로 대면한다면 그에 대한 지식만 늘어나지 않고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 또한 늘어납니다. 하나님의 영광, 존귀, 위엄, 그의 거룩, 그리고 그의 자비와 사랑, 인자하심, 공의로우심과 엄위에 대한 지식이 진정코 자라난다면 그것은 우리의 비천함, 보잘 것 없음, 나약함, 부패함, 무지함, 무력함, 골수까지 치민 죄의 영향력에 대한 각성도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 이것을 결코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셔야만 하는 일이지요. 그래서 목회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인 것 같습니다. 마치 바위를 계란으로 쳐대는 형국이랄까요? 그러기에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의 일하심을 기도할 뿐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가르치되 결코 그들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가르침을 베풀지 않으려 합니다. 이 압력에 굴복하게되면 그것은 망하게 되는 길일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 말씀이 나를 가르쳐 깨우도록 힘써서 가르칠 것입니다. 성경도 이를 지지합니다. 지식보다 십자가의 도 곧 그분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더 근본임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지식의 기초 곧 여호와를 경외함이겠지요. 그러나 가르칠 수 없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가르치라고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목회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나의 부패와 무능을 하나님의 구원의 자비로움을 뼈속 사무치도록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목회이며,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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