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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독론

개혁주의 기독론

개혁주의 기독론
박일민(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예수님은 어떤 분이며 무슨 일을 하시는가 "
교회는 신앙을 고백할 때 흔히 사도신경을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그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으로 되어 있다. 이는 믿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의 믿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예수는 참되고,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1) 참된 하나님 
귀신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보통 사람으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남의 사정이나 장래의 일을 알아 맞추는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신성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심한 경우에는 신으로까지 추앙을 받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종교의 교주들이나 이단들이 생겨났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생각이나 행적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매우 고상하고 신성했기 때문에 하나님 같은 사람 또는 하나님으로 불러도 좋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신격화되어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마치 로마 사람들이 황제를 신으로 섬겼던 것과 같은 생각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를 한낱 윤리 종교로 보았던 근세 이후의 철학자들과 일부 신학자들도 이렇게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본래부터가 참되신 하나님이시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되어지신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지신 하나님이시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하셨다(빌 2:6∼7). 또 니케아 신경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해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했다. 
2) 완전한 하나님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부패한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만들기 좋아한다. 그리고는 어떤 신이 다른 신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비교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성부 하나님보다는 완전하시지 못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나셨다는 사실을 오해함에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나셨다면, 예수님에게는 시작이 있으셨다는 말이고, 따라서 예수님은 그를 낳아주신 성부 하나님보다는 영원함에서나 완전함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리우스(Arius)라는 이단자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보다 못한 제이류(第二流)의 신이 아니다. 성부 하나님과 똑같이 창세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고, 천지를 창조하고 주관하신 하나님이시다. 또 그 백성들을 사랑으로 섭리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며, 보좌에 앉아 모든 자들을 심판하실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께서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하셨다(사 9:6). 
3) 참되고 완전한 하나님이심에 대한 증거 
예수님이 참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에 대한 증거는 매우 많다. 
구약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예언으로 증거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이사야 선지자 이외에도, 예레미야 선지자께서는 예언하기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셨다(렘 23:5, 6). 이러한 사례는 단 7:13, 말 3:1, 2 등에도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셨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셨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하나님을 자기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한편, 예수님의 행적이 그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태어나셨다. 또 과거와 미래의 일을 통달하고 계셨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사람이나 자기를 헤치려 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까지도 알고 계셨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다. 사람으로는 고칠 가망이 없는 병든 자를 고치셨다. 죽은 자를 살리셨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실 때만이 가능한 일들이다. 
예수님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택정함을 받던 창세 전에 계셨다(엡 4:1). 천지와 사람이 지음을 받던 때도 계셨다(창 1:26, 요1:1). 구약시대에도 계셨다(삿 13:18 등). 성육신하여 이 땅에 계셨을 때는 물론이요,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롬 8:34). 최후의 심판날에는 심판주가 되시어서 보좌에 앉아 계실 것이다(고후 5:10).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도 성도와 함께 계실 것이다(요 17:24). 이처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느 때나 존재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사도들과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분명하게 증거했다.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다(요 1:1). 사도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셨다(마 26:16).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였다(요 20:28). 사도 바울은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였다(롬 9:5). 
그러나 이처럼 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참되고 완전한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사실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믿어진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사도 요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여 주신다(요일 4:15). 그리고 세상을 이길 힘을 소유하게 해 주신다(요일 5:5). 
4) 하나님이셔야 할 필요성 
왜 예수님은 참되고 완전한 하나님이셔야 했는가. 그 이유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우리의 구속주가 되시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지키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 제사는 단번에 드리는 것이지만,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영원한 효력을 가지는 제사이어야 했다. 그러한 제사를 드리는 일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십자가에서 완성한 구속사역의 효과를 믿는 자들에게 적용을 시키기 위해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 했다. 구속의 적용은 부활과 성령의 보내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사람으로서는 부활을 할 수가 없고 성령을 보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은 참되고, 완전하시고, 무죄한 사람이시다 
1) 참된 사람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면, 육체를 가진 사람은 될 수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육체는 물질이요, 물질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사람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제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인 것처럼 보여지는 모습을 가졌을 뿐이라고 한다. 사막에서 나타나는 신기루나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천사들처럼, 육체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흔히 가현설(假現說)이라고 부른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에 선할 수밖에 없는 육체나 물질을 악하게 보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참 사람이시다. 추위와 피곤함과 배고픔과 고통 등 모든 경험에서 범사에 우리들과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지신 사람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음식을 잡수셨다. 우리와 동일한 몸으로 채찍을 맞으셨고, 가시에 찔리셨다. 우리와 동일한 몸으로 피를 흘리셨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의인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 이새의 줄기, 다윗의 혈통이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다. 또 유대인들을 향하여서는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하셨다(요 8:40). 
2) 완전한 사람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영과 혼을 나누어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혼은 사람의 혼과 같았지만, 영은 사람의 영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똑같은 생각과 말을 하면서도, 사람의 죄와 상관이 없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이 완전하신 사람됨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에 있는 어정쩡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을 가졌던 초대교회의 인물 아폴리내리스(Apollinaris)라는 사람이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은 우리의 온전한 구주가 되실 수 없다. 아폴리내리스 식의 구주를 통해서는 혼과 몸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영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혼은 사람의 영이 아니기에 사람의 영을 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구원하려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육체와 영혼이 모두 우리와 동일하셨던 완전하신 사람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을 가시셨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눅 23:46). 마태는 이 사실을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라고 기록했다(마 27:50). 또 사도 바울께서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육체와 영혼을 비교하여 말씀하시기를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 4)고 했다. 
3) 무죄한 사람 
아담 이후로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온 인류는 다 죄중에 잉태된다. 그리고 모두가 죄를 범하다가 사망에 이르른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당연히 예수님도 죄인일 줄로 알았다. 그들은 죄없다 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크게 분노했다. 또 역사에는 예수님이 죄를 범한 것보다는 선한 일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선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는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사실 사람들 중에서는 비난받을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영국의 다이아나처럼 크게 추모되어지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흠없는 어린양이었음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망하겠느냐"라고 하셨다(요 8:46). 사도 베드로께서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라고 하셨고(벧전 2:22), 사도 바울께서는 "죄를 알지 못하신 자"라고 하셨다(고후 5:21). 또 히브리서의 저자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셨다(히 9:14). 
4) 참되고 완전하고 무죄한 사람이심에 대한 증거 
예수님이 참되고, 완전하고, 무죄한 사람이심에 대한 증거는 앞에서 언급한 성경 이외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족보가 있었던 것,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의 지혜와 육체에 성장이 있었던 것,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주리고 주무시는 등의 경험과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시셨던 것, 핏방울처럼 땀을 흘리시면서 기도를 하신 것, 이상하게도 모르거나 기이히 여기시는 일이 있었던 것,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신 것 등도 예수님이 사람이셨음에 대한 충분한 증거들이 된다. 
이처럼 허다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참되고, 완전하고, 무죄한 사람되심을 부인하거나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도 요한의 말처럼 적그리스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3, 4). 
5) 사람이셔야 할 필요성 
예수님이 사람이셔야 했던 이유는 하나님이셔야 했던 이유와 같다. 즉 우리의 온전한 구속주가 되시기 위함이다. 죄의 구속에는 반드시 율법의 온전한 성취와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피는 사람의 피여야 한다. 사람의 피만이 사람을 대속할 수가 있다. 그러나 죄인의 피는 자신의 죄값일 뿐, 죄인의 구속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반드시 죄가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 2:17). 
예수님이 사람이셔야 했던 또 다른 이유는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친히 경험하심으로써, 하나님 우편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며 도움을 주신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다시 이렇게 말씀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3. 예수님은 통일된 하나의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다 
1) 통일된 하나의 인격 
예수님은 하나님도 되시고, 사람도 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인격이 있다. 사람에게도 인격이 있다. 그러면 예수님은 두 개의 인격을 가지고 계셨는가. 
예수님은 두 개의 인격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로 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절반은 하나님, 절반은 사람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이중인격의 소유자나, 반신반인(半神半人)의 괴이한 분이 아니시다. 
초대교회에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이렇게 생각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를 당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은 동방으로 이어지다가, 중국과 한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에 경교라고 불려졌던 종교가 바로 그것이다. 
2) 구별된 두 속성 
예수님은 통일된 하나의 인격을 가지셨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인 신성과, 사람의 속성인 인성이 그대로 구별되게 남아 있었다. 하나의 인격이 되셨다고 해서, 예수님은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상태로 변화되거나 혼합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한 인격을 가진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고, 사람의 속 마음을 꿰뚫어 보심과 동시에, 인성 때문에 체포를 당해 문초를 받으시고, 매를 맞고, 죽음을 당하셨다. 
예수님의 한 인격 속에 구별된 두 개의 속성이 있음은 삼위일체 못지 않는 신비이다. 신비는 이해나 설명이 어려움을 의미한다. 무리하게 억지로 풀려하면 오해를 하기가 쉽다. 초대교회 때의 유티커스(Eutychus)가 그 예이다. 유티커스는 예수님을 신성도 인성도 아닌 제3의 성을 가진 분으로 오해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451년에 모였던 칼케돈 회의는 유티커스와 같은 오해를 막기 위해서 예수님은 한 인격에 두 개의 속성을 가지셨지만, 두 속성 사이에는 분리, 분할, 혼잡, 변화가 없었다고 신조로 밝혀 놓았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의 정통교회는 칼케돈 신조에서 말한 이 네 개의 부정적 의미의 표현에 유념을 하고 있다. 
3) 구별된 두 의지 
인격체에는 의지의 활동이 있다. 예수님은 통일된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계셨지만, 구별된 두 개의 속성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의지와 사람의 의지가 함께 있었다. 이 두 의지는 구속 사역을 이루실 때에 종종 서로 어긋날 때가 있을 수 있다.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신 말씀에는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의 이러한 현상은 두 의지를 가지셨기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것일 뿐이었다. 사람의 의지는 항상 곧바로 하나님의 의지를 따랐다. 이 사실은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죄인의 구속이 가능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졸고 있던 제자들을 보시고,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함을 탄식하신 일이 있었다(마 26:41). 우리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항상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핵심인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참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요, 참되고 완전하고 무죄한 사람이시면서, 통일된 하나의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 믿고 고백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해가 어려울 때는 능히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고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예수 동생이니, 재림 예수니 하는 자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면서 열심히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셨을까.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셨다. 희랍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야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의미한다. 기름은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만 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일을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 
1)선지자 직의 내용 
선지자는 선견자 또는 예언자라고도 불려진다. 이 말에서 보면, 선지자는 남달리 장래의 일들을 미리 내다보고 예언을 하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선지자는 장래의 일들을 예언만 아는 사람이 아니다. 선지자는 직면하고 있는 현재의 일들에 대해서 권면이나 위로를 하거나 교훈을 하기도 한다. 또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 칭찬이나 책망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선지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미래라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중보하는 자인 것이다. 이 때문에 선지자는 위로나 축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책망이나 저주를 예고할 때가 많다. 그래서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지자에게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먼저는 수동적인 요소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는 것이다. 선지자는 음성, 환상, 꿈 등 여러 가지 형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는다. 다음에는 그 받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능동적인 요소이다. 받기만 하고 전달하지 않으면 선지자가 아니다. 여기서 수동적인 요소는 반드시 능동적인 요소보다 앞서야 한다. 이 순서는 바뀔 수가 없다. 발람의 경우에서 보듯이 만일 받지 않고 내놓거나, 받은 대로 내놓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가 된다. 
전달하는 방식은 받는 것만큼이나 다양하다. 말 이외에 글로 쓰기도 하고, 아내를 돈 주고 사오는 호세아 선지자처럼 상징적인 행동으로 전달을 하기도 한다. 선지자는 필요한 경우에 능력을 행하기도 하고, 이적이 일어나게도 한다. 
선지자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따라서 그 임무가 다양했다. 그러나 그들 임무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결같이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질 선민 이스라엘의 유익이었다(행 3:24). 
2)그리스도의 선지자 직에 대한 예표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에 대한 예표는 일찍이 모세에게서 나타났다.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희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하였다(신 18:15).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행 3;22-23).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고향에 가셨을 때, 친히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선지자라고 하셨다(마 13:57). 
그러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은 다른 선지자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수동적인 요소가 없이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셨고, 그 내용도 주로 자기 자신이 다스리실 하나님의 나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를 비롯한 다른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였다면, 그리스도는 그 실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에수님께서는 포도원 비유에서 다른 선지자들을 종이라고 하시고, 자신을 아들이라고 하셨다(마 21:31 이하). 종과 아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예수님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도 크게 비난을 받아야 한다. 
3)그리스도의 선지자직 수행방법 
예수님의 선지자 직 수행법은 다양했다. 예수님은 산에서, 들에서, 집에서, 성전에서 주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다. 그러나 말없이 땅 바닥에 그림을 그리시면서, 또는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엎으시면서 전하기도 하셨다. 또 바람을 꾸짖으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면서 전하기도 하셨다. 기도하는 모습과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을 통해서도 전하셨다. 요컨대 예수님의 모든 행적이 다 선지자 직의 수행방법이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모든 것을 다 기록하려면 이 세상이라도 부족할 것이라고 했다(요 21:25).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선지자들처럼 위로와 권면, 교훈과 훈계, 책망과 저주가 때를 따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를 많이 사용하신 점에서 매우 독특했다. 이것은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면서도,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4)그리스도의 선지자 직 수행시기 
그리스도께서는 잉태되고 탄생하심에서부터 부활 승천하실 때까지의 전 생애를 통해서 선지자 직을 수행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 수행시기는 지상 생애 기간 동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하기 이전에도 선지자 직을 수행하셨다. 많은 경우에 '여호와의 사자' 모습으로 나타나시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다. 마무레 상수리 나무 아래의 아브라함(창 18:22), 주인을 떠나가던 하갈(창 21:17), 고향으로 돌아오다 잠이든 야곱(창 31:11), 기도 중의 마노아(삿 13:18),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만났던 여호와의 사자가 그 예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의 마음속에 계시의 영으로 역사를 하시면서 선지자 직을 수행하기도 하셨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가리켜서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하였다(벧전 1:10-11). 그리고 이러한 배경을 기초로, 그리스도께서는 육에 있는 노아 때의 영들이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고도 하였다(벧전 3:18, 4:6).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지금도 선지자 직을 수행하시고 계신다. 성령의 조명 사역과, 사도나 전도자나 목회자나 성도들의 복음전도 사역이 바로 현재에 그리스도께서 선지자 직을 수행하고 계시는 수단이다. 우리가 부지런히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이유나, 주의 종들의 외치는 말씀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국에서도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은 계속된다. 지금 우리는 비유로 알려지거나 감추어진 진리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희미하고 애매해 하는 것들이 많다. 여러 장애물들 때문에 왜곡을 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천국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 수행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이렇게 말씀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참으로 우리를 설레임 속에서 기다리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2.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 
1)제사장직의 내용 
선지자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증보하는 것과는 달리, 제사장은 사람을 하나님께 증보한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이라는 사람들 중에서 뽑혀 나서(히 5:1),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쳐진다(레 21:6).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서 제사장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히 5:4). 
이렇게 하여 세움을 받은 제사장이 하는 일은 시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축복을 하는 것이다(신 21:5). 백성들은 제사장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 예물이나 제물을 드릴 수도 없었다. 따라서 제사장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선지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일 없었다. 
2)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에 대한 예표 
성경은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고 했다(히 4:14). 구약의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에 대한 예표였다(히 8:4-5). 그리고 제사의 종류, 시기, 절차, 방법, 제물 등 제사에 관한 각종 규례들도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에 대한 예표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은 다른 제사장들에 비해서 매우 독특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제물이셨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는 한 번의 제사로 번제와 화목제와 속죄제 등 모든 유형의 제사를 함께 드린 제사장이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단번의 제사로 영원한 효력을 지니는 제사를 드린 제사장이셨다. 그래서 다시는 제사가 반복될 필요가 없게 하셨다(히 10:11-12). 구약의 어떤 제사장도 그리스도와 같은 제사를 드린 일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들은 그 독특함 때문에, 아론이 아닌 멜기세덱으로 예표가 되었다(시 110:4, 히 6:20).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었다. 그리고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는 사람 즉,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하고 신비로운 사람이었다(히 7:2-3). 멜기세덱의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이 왕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음과 더불어서, 영원한 효력을 지니고 있음을 잘 예표해준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라고 하였다(히 7:11). 
3)그리스도의 제사장 직 수행방법 
그리스도의 제사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다. 십자가에서 친히 자기 자신의 피를 드린 후, 그 피를 가지고 손으로 만든 성소가 아닌 하늘의 지성소에 단번에 들어가는 방식의 제사였다(히 9:12). 이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혔던 휘장은 갈라졌다. 그 결과로 누구든지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의 제사를 의지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사실 때문에 로마교회의 사제주의에 맞서서 만인이 제사장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한 번이었지만, 그 효력은 영원하기 때문에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반복되어야 할 것처럼 의식을 행하는 일이 있다. 미사제도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미사제도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제사장의 제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제사와 관련된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 내 우리에 든 양,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위해서 내어줌이 되셨다는 식으로 제한된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셨다(요 7:25). 
4)그리스도의 제사장 직 수행시기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지금도 제사장 직을 수행하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다(롬 8:34). 
하나님 우편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성경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신하여 피흘려 주신 자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를 해주신다(히 7:25). 성도의 봉사나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이 되어지도록 승화를 시켜 주신다(계 8:3, 히 13:15). 참소자 사탄이 성도를 향하여 벌리는 송사에 대한 적절한 변호를 해주신다(롬 8:33). 
이러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은 쉬지 않고 영원히 계속된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르기를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히 7:24)라고 했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거나,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를 도우시고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은 잠시도 쉬시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곤경 중에도 위로와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확고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좌로나 우로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3.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1)왕 직의 의미 
그리스도는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만물을 그 기쁘신 뜻대로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하기를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라고 하였다(시 103:19). 또 이사야 선지자는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낳고...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하였다(사 9:6). 예수님께서도 빌라도에게 답하시기를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라고 하셨다(요 18:3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주의 자격으로만이 아니라, 구원과 관련하여 중보자의 자격으로도 왕 직을 수행하신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왕 직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왕 직을 말할 때는 흔히 유다, 이스라엘, 다윗 등과 연관하여서 언급을 한다(단 7:14, 미 5:2, 슥 9:9, 눅 1:33).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통치를 하시는 영역을 가리켜서는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른다. 
2) 그리스도의 왕직 수행방법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왕 직은 주로 영적인 방법으로 수행되어진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은 성도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귀신을 명하여 쫓아내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복종케 하는 방법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의 왕 직은 항상 칼이나 폭력이 아닌, 말씀과 성령을 수단으로 수행된다. 그리고 그 왕 직의 목적은 죄인의 구원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 직을 빙자하여 십자군과 같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또 이 땅에서 특정한 세력집단을 조직하는 것도 잘못이다. 대부분의 사이비 단체들이 이러한 과오에 쉽게 빠져들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의 다스림은 다만 사단과 세상을 향한 경우에 국한되어야 한다. 
3)그리스도의 왕 직 수행시기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왕 직 수행의 시기에는 현세적인 부분과 미래적인 부분이 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성도들의 마음과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가리켜서 현세적 천국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천국은 이미 우리 안에 임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다(눅 17:20-21). 또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였다(마 12:28).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왕 직이 완전하게 수행되지 않고 있다. 사탄의 방해 활동이 허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 거짓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은 것처럼 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 직 수행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과 태어나지 않은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 직의 완전한 수행은 장차 이루어진다. 즉 개인적으로는 죽은 이후에 천국에 이르렀을 때이고, 전 인류적으로는 주의 재림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때이다. 우리는 이 때를 가리켜서 미래적인 천국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고, 장차에도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 속에서 마음껏 천국생활의 기쁨을 만끽하여야 하고, 그러면서도 미래의 천국을 소망 중에 바라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으로다"(롬 14:8)고 말씀한 것을 보면, 그는 현세적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고 살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고(딤후 4:18)하면서 현세적인 천국과 함께 미래적 천국을 바라보았다. 
사도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시라는 고백이다. 우리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되시는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한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 되시는 주님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시는 왕 되시는 주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써 지금과 또 영원토록 행복을 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