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동정, 연민, 그리고 공감

공감은 동정심이나 연민과 조금 다르다. 동정심은 그의 삶에서 발견되는 불쌍함을 보고 그것에 대한 "나의 반응"이고 연민은 나와 같은 처지나 혹은 내 경험에서 발견되는 그의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이다.

이 정의 가지고 따지지는 말아주었으면 한다. 딱 들어맞는 정의는 아니니까 그냥 내 경험에서 정의된 것들이니까 그냥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나 봐 정도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이 두 가지 감정의 공통점은 모두 "내 상황"과 맞물린 감정이라는 점이다. 동정심이 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적어도 나도 그와 유사한 형태의 경험이 있었고 거기에 돕고자 하는 마음이 일었기 때문이다. 연민은 단지 돕고자 하는 것에서 지나서 그런 상대의 모습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둘은 모두 내 경험과 내 상황과 맞물려 있다.

우리는 나를 통해서 타인과 소통하기도 한다. 이것이 나쁘지는 않다. 실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 이상의 것을 알기 어렵다. "나는 고통한다"는 진술에서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은 상대의 고통이 아니라 내 고통에서 상대의 고통을 미뤄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공감은 단지 상대의 상황이나 반응에 대한 내 경험의 불러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경험을 미뤄두고 실제 상대의 경험의 맥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그런 것이다. 우리와 다른 본질이시지만 사람의 상황을 직접 겪으신 것이다.

공감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내 안에 다양한 맥락에 대한 이해와 세계관이 공존해야 한다. 마치 다양한 외국어 능력과 유사하다. 그의 언어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경험들이 누적되어야만 공감이 가능하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처음에는 나를 알아주는 것에 대한 기쁨일 수 있지만 우리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것이 연민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러야 하고 공감의 능력이 없이는 결코 알 수 없는 지경이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지나갈 문제가 아니다.

꼬리를 쳐들 때 기분이 좋은 강아지가 꼬리를 쳐드는 것이 공격 행동이라고 인지하는 고양이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공감은 바벨탑을 허물고 각자 난 곳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알아듣게 하는 일에 필수이다. 그것은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심령에 전해져야 하는 생명의 소리이며 사랑의 소리이며 말씀의 소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