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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교리의 유기적 이해: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인간론은 인간의 죄를 둘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하나는 죄의 법적 책임을 의미하는 죄책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본성적 부패를 설명하는 오염이다.

첫 사람 아담은 첫 범죄로 인해서 본성이 부패하게 되었고 행위언약을 따라서 "사망"을 죄책으로 지게 되었다. 이것이 그 후손 모두에게 전가되는 방식이 있는데 흔히 죄책은 언약과 법령을 따라서 후손에서 매개요인, 그러니까 자기 부모나 조상이라는 매개자 없이 직접 전가된다. 그 근거는 바로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이는 로마서 5장에서도 확인이 된다.

이 법적 책임의 전가를 근거로 해서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생식법"에 따라 즉, 부모가 서로 성적 관계를 맺는 과정 그러니까 조상이 유전적 본질을 후손에게 전달하는 과정을 통해서 부모로부터 "오염"을 전달받는다. 이는 시편 51편의 주해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렇게 전가된 죄책과 오염을 "원죄"라고 한다. 원죄에는 "원죄책"과 "원오염"이 있고 이 죄책은 직접적으로 매개없이 언약에 의해서 "전가"되고 오염은 부모를 매개로 직접 전가된 죄책을 근거로 후손에게 "전달"된다. 이 두 과정은 통칭 전가라고도 불리기 때문에 신학책을 읽을 때 문맥을 잘 고려해서 읽어야 한다.

원래부터 이런 구조는 아니었다. 원래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에게서 언약개념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약 개념이 원시적 아이디어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원죄가 후손에게 전해지는 방식은 오염이 전달되는 방식의 이해로 이해했다. 여기에 법적 책임이 더해진 구조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칭의"라는 표현은 종교개혁 이전에는 낯선 표현이었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서들을 보면 고전적 형태의 표현, 곧 "의화"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칭의"와 "성화"를 합쳐놓은 형태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서 원죄 교리를 확립하고 은혜에 의한 구원 교리를 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퀴나스를 지나 후기 스콜라 시기에 오게 되면 절반의 펠라기우스주의가 발달하게 된다.

그러려면 의화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아담의 타락을 아퀴나스는 "원의의 결여" 혹은 "원의의 부재"라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즉 타락은 원의를 상실한 상태를 의미했다. 이 원의 개념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나 웨스트민스터 문서들에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목사들에게도 낯선 개념이 되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칭의를 이해하는데 무엇간 결손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후기 스콜라 기간 동안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게 되면 이 원의가 우리에게 "주입"된다는 신학이 발달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 아담이 상실했던 의가 주입된 상태는 다시 타락 전 아담의 상태와 유사해진 것이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시피 중생의 상태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여서 죄가 없이 범죄의 가능성만 있던 타락 전 아담의 상태와는 다르지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담의 상태를 일부 회복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주입된 원의로 내가 순종하게 되면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고 불순종하게 되면 벌을 받아 지옥에 가는 상태에 놓인 것이다. 결국 구원이 개인의 행위의 공로에 의해 좌우되는 상태에 놓이고 이 행위적 문제를 계속해서 회피하기 위해서 성도들은 교회로부터 베풀어지는 7개의 성사에 평생토록 매여서 자기 구원에 대한 불안의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상태를 절반의 펠라기우스 주의라고 부른다. 은혜로 시작했으나 행위로 마치게 된 갈라디아주의의 부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는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 해답이다. 루터파에서 언약 교리가 명확하게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의화" 개념, 곧 "원의가 주입"되다는 개념이 "칭의" 개념 곧 의롭다고 칭해지는 개념으로 대치가 된 것이다.

그럼 이 때 주입되었다고 주장되던 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종교개혁자들 통틀어 이 의는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칭의와 성화를 나누는 직접적 이유가 되었고 성화 안에도 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가 우리에게 적용되어지는 "은혜의 주입"이라는 개념으로 대치된다. 이 때문에 "오직 믿음"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성립하게 된다.

다시 의화 교리로 돌아가서 의가 주입되고 나서도 개인은 순종을 통해서 자기 의를 입증할 책임이 있었는데 이것은 기독론과 맞물려 있었다.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자들은 원죄를 형성했던 아담의 최초의 죄의 두 가지 국면, 곧 "선악수를 열매를 따먹는 행위"의 문제와 "사망의 형벌"의 문제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속한 것은 사망의 형벌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의가 주입되었음에도 신자들은 아담이 실패했던 선악수의 열매를 따먹는 불순종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해결함으로 자기 의를 입증해야 했고 앞서 말한대로 성사들에 평생 매여 있는 처지가 된 것이다.

여기서 율법에 대한 불순종으로서 선악수의 열매를 따먹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속이 아니고 십자가는 사망의 형벌의 대속이라는 데는 하나의 교리가 숨겨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교리다. 종교개혁자들이 이 교리를 발달시킨 이유가 바로 절반의 펠라기우스주의를 회피하려는 석의적 시도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우리가 얻어야 할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즉, 율법의 순종도 이미 그리스도가 다 이루셨고 사망의 형벌도 그 댓가를 이미 다 치루셨다는 것이다. 이 의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고 신자가 이 의에 다가서는 방식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신자는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발견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가게 되고 그러면 내 안에 의가 없지만 있는 것으로 간주해주는 것이다. 이것을 "칭의"라고 한다. 이는 칼뱅이 강조하는 연합교리를 통해서 확인된다.

그렇게 신자는 법적으로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고 의인이라고 칭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안에는 부패와 죄의 세력이 남아 있고 죄의 세력은 바로 "성화"를 통해서 제거되는데 은혜의 수단을 의지해서 주님께 나가게 되면 의가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주입"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에 응할 수 있는 능력을 입게 된다. 이것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라고 묘사했다.

구원론에서 칭의는 인죄론에서 죄책을 제거하고 구원론에서 성화는 인죄론에서 오염을 제거한다. 그리고 이 죄책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이고 수동적 순종을 통해서 제거되고 오염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은혜의 주입을 통해서 제거되어진다. 이처럼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은 서로 밀접하게 이어진 건축물과 같다. 서로를 종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신앙을 형성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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