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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교회론

루이스 벌콥(L. Berkhof)의 교회론

루이스 벌콥(L. Berkhof)의 교회론
신원균 목사
Ⅰ. 서 론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복에 참여하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를 적용하는 구원론은 자연스럽게 교회론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자신에게 연합시키고 그들에게 참된 믿음을 주어서 그 교회를 성도의 모임 즉,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선택한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개념이다. 따라서 교회론을 예정론에 입각하여 그 구조를 세워야 은혜언약 안에 있는 선택의 개념이 교회론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이제 벌콥의 교회론을 통해서 바른 개혁주의의 개념의 교회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벌콥은 교회론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1부에 교회에 관한 교리로 교회의 성질, 교회의 정치, 교회의 권세를 다루고 있고, 2부에서는 은혜의 방편으로 말씀과 성례를 다루고 있다. 벌콥은 은혜의 방편에서 기도를 빼고 다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믿음, 회심과 함께 기도를 영적인 생활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보고,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 즉 언약의 복을 소유하고 향유하기 위한 주관적인 조건으로 생각해서 말씀과 성례만이 은혜의 방편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제정하신 객관적인 통로로 간주하며 이것을 통해서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Ⅱ. 본 론
1. 교회의 다양한 성격
1)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의 교회
현세의 교회는 거룩한 싸움을 싸우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실제로 이 싸움에 참여하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교회 내에서와 교회 밖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적대 세력들과 흑암의 영적인 권세에 대항하여 부단히 전투를 수행하여야 한다. 지상교회가 전투하는 교회라면 천상의 교회는 승리의 교회이다. 
2)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
이 두 교회는 두 개의 다른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지는 다른 두 양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은 지상의 교회가 유형적이며 무형적이라는 사실을 함께 강조하였다. 성경은 어떤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교회에 부여함으로써 교회를 구속의 영원한 복을 전달하는 중개자로 나타낸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런 복의 분배권을 외적인 기관으로서의 교회, 대표적 교회(ecclesia representativa) 즉 성직자 계급에 부여하면서,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중재자로서 사제직을 설정함으로써 양자 사이의 직접적인 교통이 무시되거나 거부되었다. 이 오류에 대해 종교 개혁자들은 영광스러운 것들을 분배하는 교회는 외적인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교회라고 하였고 이 교회는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유형 교회 안에 불완전한 모습으로 구형되어 있으며, 마지막 때가 되면 완전히 눈에 보이도록 구현된다고 하였다. 무형 교회는 자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외적인 기관으로서 유형적 형체를 취하게 마련이다. 교회는 고백과 행위,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 그리고 외적인 기관과 정체를 통하여 가시화 되는 것이다.
3)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제도)로서의 교회
이 두 교회는 하나의 유형 교회의 두 다른 면으로서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령의 끈으로 연합된 신자들의 공동체인 반면,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구원의 방편이요, 죄인들을 개종시키고 성도들을 완전케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영적 능력이 있는 교회로서 그 안에서 모든 유형의 은사들과 재능들이 나타나고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사용된다.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직분들과 방편들을 통하여 제도적 형식과 기능들로 나타난다..
2. 교회의 정의
교회는 선택받은 자들의 공동체(community of the elect, coetus electorum)라고 한다. 선택은 현재 교회와의 현실적 관계 여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자들을 포함한다. 또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선택된 자들의 무리(coetus electorum vocatorum),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몸(coetus vocatorum), 또는 더 일반적으로 말해 신자들의 공동체(coetus fidelium)로 정의되었다. 세례와 고백이라는 관점에서 교회는 세례 받고 참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로 정의되었다. 이 공동체를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녀들과 더불어 참된 신앙심을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쉽게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외적인 표지에 따른 교회의 정의이다. 
3.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주요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 개념이다. 이 통치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강력한 영향력에 의하여 죄인들의 마음속에서 확립되고 인식된다. 이 통치가 확립될 때, 죄인들은 측량할 수 없는 구원의 복을 확신하게 된다. 이 통치는 원리적으로는 땅 위에서 비로소 그 절정에 달한다. 현재는 이 나라가 영적이고 무형적인 형태로 실현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무형 교회는 어느 정도 동일한 것이기는 하지만 엄밀하게는 구별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과 무형 교회의 회원권은 모두 거듭남을 통하여 결정된다. 신자들은 통치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며,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헌신하고 서로 유기체적 연합을 이루는 점에서는 교회를 구성한다. 
유형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도 어느 정도는 동일시될 수 있다. 유형교회는 확실히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부분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세력의 가장 중요한 가시적인 구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형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무형교회의 성격이 다소 있다(양자는 하나이다). 유형 교회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죄악된 세계가 드러내는 불완전성을 함께 나눈다.
4. 교회의 표지
교회가 하나로 있는 동안에는 표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이단이 일어났을 때, 참된 교회를 인식하는 표지가 무엇인지 천명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이 표지로서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구분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반드시 따라야 할 진리의 표준이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으며, 그 표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인정했다.
1) 말씀의 참된 선포
이것은 가장 중요한 교회의 표지이다. 이 표지는 성례에 관계없이 존재하지만, 성례는 말씀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말씀의 참된 선포는 교회를 유지하고 교회로 하여금 신자들의 어머니가 되도록 하는 위대한 방편이다. 이 표지를 교회에 돌린다고 해서, 교회에서 시행되는 말씀의 선포가 완전해야만 비로소 참된 교회로 간주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교회가 진리를 그릇되게 가르치고 부인한다면 교회는 참된 성격을 잃어버리고 거짓 교회가 되는 것이다. 신앙의 기본적인 조항들이 공적으로 거부되고, 교리와 삶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을 때 거짓 교회가 된다.
2) 성례의 바른 시행
성례는 말씀과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례는 그 자체가 고유한 내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례는 말씀의 가시적인 선포다. 따라서 성례는 말씀의 합법적인 사역자들에 의해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에 따라 다만 자격을 갖춘 교인들 곧 신자들과 그 자녀들에게만 시행되어야 한다.
3) 권징의 신실한 시행
이것은 교리를 순수하게 지키고 성례의 거룩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절대 필요한 것이다. 권징을 등한히 하는 교회는 불원간에 진리의 빛이 어두워지게 될 뿐만 아니라 거룩한 것을 남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가능한 이상적인 교회를 유지하려고 하는 교회는 권징을 성실하고 부지런히 시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교회의 정치
1) 개혁파 혹은 장로교 제도의 근본 원리
개혁 교회는 교회 정치 제도가 세칙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결정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 원리들이 직접 성경에서 인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1)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모든 교회의 권위의 원천이다.
로마교회가 교회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는데 반해 종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옹호하였다. 그는 교회와 살아 있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신의 생명으로 교회를 충만히 채우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영적으로 다스리신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교회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계실 뿐만 아니라 교회법의 제정자요 교회의 왕이시라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유기적이고 생명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독점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의 영적인 몸을 이루는 교회의 머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동시에 유기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다스린다는 의미에 있어서도 유형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2) 그리스도는 말씀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권위를 행하신다
그리스도는 주관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권위의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다스리신다. 모든 신자들은 무조건 왕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주권적인 통치자이듯이 그의 말씀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법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씀이다.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형태의 독재적 권력도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 교황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하면서 실상은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하나님의 말슴을 인간의 새로운 고안으로 대처하였다. 그는 전통을 성경과 같은 위치에 둘 뿐만 아니라, 신앙과 도덕의 문제를 주교좌로부터 말할 때 성경과 전통의 오류 없는 해석자로 자처한다.
(3) 왕인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권세를 주셨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권세를 전체로서의 교회 곧 평신도들과 직원들에게 똑같이 부여하셨다. 그러나 직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자신들에게 부여된 의무들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권세를 추가로 부여받았다. 그들은 교회에 부여된 원래의 권세를 공유하며 직원으로서의 자신들의 권세와 능력을 그리스도로부터 받는다. 그들은 교인들의 대표이나, 단순히 교인들의 의견을 대변하기만 하는 자는 아니다. 
(4) 그리스도는 대표적 기관들에 의해 이 권세가 특별히 행사되도록 정하셨다.
그리스도는 전체로서의 교회에 권세를 위임하셨는데 교리, 예배, 권징의 유지를 위하여 특별히 세우신 대표적인 기관들을 통하여 통상적으로 그리고 특수적으로 이 권세가 행사되도록 정하셨다. 교회의 직원들은 투표를 통하여 선출한 교인들의 대표들이지만 교인들로부터 권세를 부여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았고 주님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들은 단순히 교인들의 뜻을 전하는 데 쓰임을 받는 대리자나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타당성 있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의무를 맡은 다스리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의무는 중요한 문제에서는 교회의 동의를 구함으로써 전체로서의 교회에 부여된 권세를 인정하는 것이다.
(5) 교회의 권세는 근본적으로 지교회의 당회에 있다.
교회의 권위는 총회나 총회에서 비롯된 지교회의 치리회에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지교회의 당회에 있고, 여기서 노회, 대회, 총회와 같은 더 큰 회로 옮아간다. 이것은 자치권을 존중하는 것으로서 지교회가 교회 내의 문제를 교회의 직원들을 통하여 치리할 수 있는 충분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2) 교회의 직원들
(1) 비상 직원(Extraordinary officers)
① 사 도
예수님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만 적용된다. 그러나 이 명칭은 바울의 사역을 돕고 사도적인 은사들과 은혜를 받은 일부의 사도적 인물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행 14:4, 14; 고전 9:5, 6; 고후 8:23). 사도들에게는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의 기초를 놓는 특별한 과업이 부여 되었고 그들 이후에 오는 모든 신자들은 오직 그들의 말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친교를 갖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증인 특히 부활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은 기적을 행사할 능력이 있었는데 이 능력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메시지의 신빙성을 입증하였다.
② 선 지 자
신약 성경도 선지자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말하는 이 은사는 이 선지자들에게서 높이 발전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그들은 종종 비밀을 드러내고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 은사의 첫 번째 부분은 교회 안에서 영구적이며, 개혁교회는 이 부분을 명백히 인정한다. 그러나 이 은사의 두 번째 부분은 일시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들은 특별한 영감을 받아 말했다는 점에서 보통 사역자들과 다르다.
③ 전 도 자
성경에는 사도와 선지자 외에도 전도자들이 언급되어 있다(행 21:8; 엡 4:11; 딤후 4:5). 빌립, 마가, 디모데, 디도는 이 부류에 속한다. 이 전도자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은 사도들과 동행하면서 사도들을 도왔다. 그들이 맡았던 일은 설교하고 세례를 베푸는 일었다. 그러나 장로를 세우기도 하고(딛 1:5; 딤전 5:22), 권징을 시행했다(딛 3:10).
(2) 통상직원(Ordinary officers)
① 장 로
교회의 통상 직원들 가운데 장로 또는 감독은 가장 중요한 직분이다. 전자는 단지 '장로' 곧 연장자를 의미하며, 후자는 '감독'을 의미한다. 이 직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양떼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식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그들을 다스리며 보호해야만 했다.
② 교 사
장로들은 원래 교사들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교사를 따로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 이유는 이미 사도, 전도자, 선지자들이 교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단일 계급으로 언급된 '목사와 교사'를 교회에게 주셨다는 엡 4:11의 바울의 진술은 이 두직분이 두 개의 다른 계급의 직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관련된 기능을 가진 한 계급의 직원을 말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③ 집 사 
사도행전 6:1-6은 집사 직분을 제정한 기록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도행전 6장에 서술된 사건 이전에도 항상 종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된 바 있는 집사라는 명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구제 사업에 참여하는 자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둘째, 이곳에 열거된 일곱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바친 선물들을 적절히 분배하는 일을 맡겼는데, 이 사역은 다른 곳에서는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에 의해 보다 특별히 묘사되었다(행 11:29; 롬 12:7; 고후 8:4; 9:1, 12, 13; 계 2:19). 셋째, 사도행전 6장에 언급된 대로 이 직분의 자격은 다소 엄격하며, 그 점에 있어서 딤 3:8-10, 12에 언급된 요구 조건들과 일치한다. 
(3) 통상 직원의 소명
① 내적 소명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통상적이고 섭리적인 지시로 이루어진다. 이 소명에는 특별히 세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과제를 담당하도록 강권함을 받고 있다는 의식. 둘째, 어느 정도는 지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직분을 맡기로 합당한 자질을 갖추었다는 확신. 셋째, 하나님이 분명히 목적에 이르는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체험이다.
② 외적 소명
이것은 특별히 교회라는 매개를 통하여 오는 소명이다. 이 소명은 교황(로마교회)이나 어느 한 사람의 감독이나 감독단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교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의 직원들과 교회의 회원들이 이 소명에 일익을 담당한다.
3) 교회 회의
(1) 개혁 교회 정체에 있어서의 치리 단체(교회 재판소)
개혁 교회의 정체는 상향식 또는 하향식 구조를 가진 교회 회의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회의들은 당회, 노회, 대회, 그리고 총회이다. 당회는 목사(목사들)과 지교회의 장로들로 구성되고 노회는 일정한 지역에 있는 각 지교회에서 파송한 한 명의 목사와 한 명의 장로로 구성된다. 대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한 같의 수의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다. 마지막으로 총회는(장로교의 경우에 있어서) 각 노회에서 동등하게 파송된 목사들과 장로들의 대표자로 구성된다.
(2) 지교회의 대의 정체 및 지교회의 상대적 자치권
개혁 교회는 장로이든 목사이든 감독이든 어떤 한 사람이 치리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며 회중 정치도 용인하지 않는다. 개혁 교회는 치리하는 장로들을 대표로 세우고, 이 대표들이 목사(또는 목사들)와 함께 지교회의 치리를 위하여 당회를 구성한다. 개혁 교회의 정체는 지교회의 상대적 자치권을 인정하는데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로 모든 지교회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교회로서 정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로부터 지교회에 어떤 정체도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둘째로, 인근 교회간에 적절한 연합 혹은 합병은 있을 수는 있으나, 지교회의 자치권을 파괴하는 연합은 있을 수 없다. 노회나 대회나 총회는 당회 보다 권한이 높은 것이 아니라, 당회가 가진 것과 같은 권한을 더 넓은 범위에서 행사하는 것이다. 셋째로, 노회나 대회나 총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교회의 내부 문제에 간섭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지교회의 자치권은 연합하는 교회와의 관계와 연합된 교회들의 일반적인 이익을 위해 제한이 있다. 교회 헌장은 일종의 헌법으로서 교회가 연합 할 때, 상호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며 당회가 대표하는 모든 지교회가 엄숙하게 서명해야 한다. 
(3) 대회의들 
① 대회의의 대표적 성격
당회를 형성하는, 교인들의 직접적인 대표들은 노회에서 그 대표권을 행사하며, 이들은 다시 대회나 총회에서 대표권을 행사한다. 회의의 관할 구역이 넓어지면 넒어질수록 회중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어떤 회의도 교회의 통일성, 선한 질서의 유지, 활동의 효율성을 저해할 만큼 먼 회의는 없다.
② 대회의가 관할하는 문제들
교리와 윤리, 교회 정치와 치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통일성과 선한 질서를 보존하는 것과 관련된 일들과 같은 오직 교회의 문제들만이 이 회들의 관할하에 들어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첫째, 성격상 어떤 대회의보다 작은 회의에 속한 문제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작은 회의에서 결정할 수 없게 된 문제들이나 둘째, 성격상 대회의 관할에 속한 문제들 곧 신앙고백, 교회 헌장, 교회의 의식 등과 같은 문제들이 대회의가 다루어야 할 문제들이다.
③ 대회의의 권세와 권위
대회의들은 당회가 가지는 권세보다 더 큰 권세를 대표하지 못한다. 개혁 교회는 당회가 가지는 교회적인 권세보다 더 높은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회의는 그 정도와 범위에 있어서 당회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다. 교회의 권세는 당회보다는 대회의에서 더 크게 행사된다. 대회의의 결정은 권고적 성격이 분명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결정들은 권위를 지닌다. 이 결정들은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건실한 해석과 적용으로서, 교회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진다. 이 결정들이 구속력을 상실하는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경우뿐이다.
6. 교회의 권세
1) 권세의 성질
교회의 권세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행사될 수 있으며, 신자들에게만 속해 있으며, 도덕적이고 영적인 방법으로만 행사될 수 있다. 교회는 인간의 내적이고 영적인 신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대표한다. 교회의 권세는 영적이기 때문에 강권에 호소하지 않는다. 교회의 권세는 독립된 주권적인 권세가 아니라, 사역적 권세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것으로서 교회에 대한 그의 주권적 권위에 종속된다. 이 권세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치하는 방법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고 성령의 지도하에, 그리고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2) 여러 가지 유형의 교회 권세 
(1) 교리권 혹은 가르치는 권세 
하나님은 교회에게 말씀을 주심으로써 교회를 진리의 귀중한 보화를 지키는 자로 삼으셨다. 교회는 모든 불신앙과 오류의 세력에 대항하여 진리를 유지하고 수호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중에게 선포하여 죄인을 회심시키고 성도들을 교화시키는 것도 교회의 의무이다. 교회는 세상에 복음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갖는다.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성자는 부단히 온 인류로부터 영생을 얻도록 선택된 교회를 모우신다. 교회가 이 일을 실행에 옮길 때 사용되는 주요한 방편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교회는 아울러 이미 그리스도에게 나온 청중들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교회는 말씀 선포와 나란히 성례를 시행해야 한다. 성례는 복음을 귀가 아닌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제시하는 상징일 뿐이다. 
모든 교회는 진리를 고백하는 일에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진리를 깊이 묵상해야 할 뿐 아니라 믿는 바를 고백서로 작성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의 회원들에게 신앙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생기게 하며,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교리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2) 치리권
① 질서 유지권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문제들을 적절히 규제할 수 있는 규례를 주사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할 것을 원하신다. 교회는 그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공포한 법들을 실행에 옮길 권한이 있다. 로마 교회에서는 이것을 양심을 얽어 멜 수 있는 규례를 제정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에서는 교회가 제정한 규례들을 어기게 되면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과 같은 형벌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다만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할 권한만을 주장하고 심지어 그럴 때라도 개신교는 사역적 또는 선포적 권한을 주장하며, 율법이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인 것으로 간주하며, 그리스도가 재가한 것 외에는 어떤 견책도 적용하지 않는다.
② 순결 유지권 
순결 유지권은 심사한 후 승인된 자를 받아들이고, 진리에서 떠났거나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자들을 제외시킴으로써 교회의 성결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사되는 권세로써 특히 궝징의 문제에서 행사된다. 예수님은 권징을 제정하셨을 때 사도들을 주시고, 그들의 말과 관련하여 교회에도 매고 푸는 권세 곧 금지되어야 할 것과 허용되어야 할 것을 선언하고, 선언적인 의미에서 죄를 용서하기도 하고 보류하기도 하는 권세를 주셨다(마 16:19; 18:18; 요 20:23). 그리스도께서 이 권세를 교회에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이 권세를 행사할 수 있다.
(3) 사역권
초기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 가운데 신유의 은사를 받고 이적을 행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이적과 이적의 표징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표징 또는 확증이라는 의미른 가지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계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최초로 전파된 복음의 메시지를 증명하고 확증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특별 계시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적들도 자연히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은 교회 내에 가난한 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셨다. 집사들은 교회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수행하는 책임이 있고 신중을 요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과 방편을 고안하여 필요한 재원을 모으고 모은 돈을 관리하며 그것을 신중하게 분배하는 일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직분은 이 같은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가나한 자들을 가르치고 위로해야 한다. 그들은 영적인 원리들을 따라서 이 일을 해야 한다.
7. 은혜의 방편
1)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
(1).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
종교 개혁자들은, 말씀만으로는 믿음과 회심을 산출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성령도 총상적으로 말씀과 분리하여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구속사역에서 말씀은 성령과 함께 역사한다고 말한다. 루터파는 처음부터 성령이 방편으로서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한다고 주장한 반면, 개혁파는 성령이 말씀과 함께 역사한다고 하였다.
(2) 말씀의 두 구성 요소
개혁 교회는 처음부터 은혜의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의 두 구성 요소가 되는 율법과 복음을 구분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신약과 구약의 구분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신구약에 모두 적용되는 구분으로 간주되었다. 구약안에도 율법과 복음이 있고, 신약에도 율법과 복음이 있다. 이 두 구성 요소들은 각각 모두 은혜의 경륜 안에서 교유한 역할을 맡는다. 구약에는 복음이 없다든지, 적어도 율법 세대를 다루는 구약에는 복은 없다고 할 수 없다. 후손의 약속에, 의식법에, 선자들의 선포에 복음이 있다. 사실상 구약 전체에 복음의 물결이 면면히 흘러오다가 메시야 예언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 이와 동시에 신약도 마찬 가지다.
(3) 율법의 삼중적인 용도
율법은 죄를 억제하고 의를 증진시키는 목적을 돕는 정치적 혹은 세속적인 용도와 인간에게 죄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줌으로써, 자신이 율법의 요구를 시행할 능력이없음을 깨닫고 그스도께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돕는다. 마지막으로 율법의 제 3 용도는 신자들의 삶의 규범으로서 신자들에게 의무를 확인시켜 주고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2)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례
말씀을 통하여 귀에 전달된 진리는 성례를 통하여 눈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염두헤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말씀은 성례가 없이는 존재할 수 있고 또한 완전한 반면, 성례는 말씀이 없이는 결코 완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성례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규례로, 이 성례라는 감지 될 수 있는 표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 언약이 주는 유익이 신자들에게 제시되고, 적용되며,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충성을 표현한다.
(1) 성례의 구성 부분
① 외적인 혹은 가시적인 표징
엄격한 의미에서 이 용어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표징과 상징되는 것을 가리킨다. 성례의 외적인 물질에는 물, 빵, 포도주와 같은 요소들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이 요소들과 함께 시행되는 거룩한 의식도 포함된다. 이와 같은 외적인 관점에 근거하여 성경은 성례를 상징(표징)과 인이라고 부른다(창 9:12, 13; 17:11; 롬 4:11). 
② 의미하고 인치게 되는 내면적인 영적 은혜
성경은 이를 다양한 방법으로 말하고 있는바, 은혜 언약(창 9:12, 13; 17:11), 믿음의 의(롬 4:11), 죄 사함(막 1:4; 마 26:28), 믿음과 회심(막 1:4; 16:16),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롬 6:3) 등으로 표현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영적인 부요함을 말한다. 성례는 일반적인 진리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가 받아들인 약속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약속의 실현과 관련하여 우리의 믿음이 강화되는 것을 돕는다(창 17:1-14; 출 12:13; 롬 4:11-13). 성례는 죄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참여라는 언약의 영적인 복을 가시적으로 제시하고 깊이 의식하게 한다(마 3:11; 막 1:4,5; 고전 10:2, 3, 16, 17; 롬 2:28, 29; 6:,3 4; 갈 3:27). 표징과 인으로서의 성례는 은혜의 방편이다. 곧 성령을 통하여 마음속에 역사하는 내적인 은혜를 강화시키는 수단이다.
③ 표징(sign)과 표징이 의미하는 것간의 성례적 연합
이것을 통상적을 성례의 본질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성례를 구성하는 것이 정확히는 표징과 표징이 의미하는 것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의 입장에 따르면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표징이 의미하는 것이 표징 안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며, 외적인 요소(materia externa)를 받아들이는 것은 필연적으로 내적인 요소(materia interna)의 참여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루터파가 말하는 것처럼 장소적인 것도 아니다. 그들은 표징과 표징이 의미하는 것이 같은 공간에 현존하기 때문에 신자나 불신자나 다 표징을 받을 때 완전한 성례를 받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영적 혹은 도덕적이고 관계적이어서 믿음을 통하여 성례를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외적인 표징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성령에 의하여 사용될 때 은혜의 방편이 된다.
(2) 성례의 필요성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계가 구원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세례 받은 후에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는 고해 성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견진, 성찬, 그리고 종부 성사는 시행을 명령받고 탁월하게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세례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며,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비추어서 의무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고의적으로 성례의 사용을 멸시하는 것은 영적인 빈곤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파멸적인 경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거은 의도적으로 그리고 완악하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과도 같다. 성례는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3) 구약과 신약의 성례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구약 시대에는 할례와 유월절이라는 두 개의 성례가 있다. 구약 시대의 할례는 피의 제사로서, 죄책과 조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을 상징하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삶의 전영역에 침투시킬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의미했다. 유월절도 역시 피의 성례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의 희생을 통하여, 애굽인들이 당해야 했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대속의 희생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 1:29, 30; 고전 5:7). 구원 받은 가족은 죽임당한 어린 양의 고기를 먹었는 데, 이것은 믿음의 소유하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성찬시 떡을 떼는 것과 매우 같은 의미이다. 신약의 성례도 두가지이다. 곧 세례와 성찬이 그것이다. 신약 시대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이것들은 피 없는 성례이다. 그러나 이 성례들은 구약의 할례와 유월절이 상징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4) 기독교 세례
① 세례의 제정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화목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시에 하나님의 승인를 받았다. 사도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도록 명령를 받았다. 세례의 형식은 세례를 통하여(곧, 세례가 상징하는 것을 통하여) 수세자가 신적인 자기 계시 또는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안에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사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며, 동시에 그 계시의 빛에 따라 살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행 2:28, 10:48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베푸는 세례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세례를 지칭하며, 예수님의 권위로 세례를 받았는 것이다. 즉, 수세자들이, 사도들이 전파하고 자신들의 주로 순종하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세례의 올바른 양식
침례교에서는 완전한 침수 후에 물에서 건지는 방식이 세례의 표지의 본질이라고 한다. 이 양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수세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파 신학은 세례의 상징의 본질에 관하여 정결케 함이라는 개념에서 찾는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은 69문에서 다음과 같이 묻고 답변한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한 희생에 참여하는 거룩한 세례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떻게 인쳐지는가?” “그리스도가 이러한 외부적으로 보이는 물로써 씻는 의식을 정하시고, 외면적인 신체의 때가 물로써 씻기는 것과 같이 확실히 그리스도의 피와 영에 의하여 나의 영혼의 때가 즉 나의 모든 죄가 씻기는 것임을 약속하셨다.”
침례교를 제외한 교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견해는 세례의 근본적인 개념 곧 정결케 함이라는 개념이 의식이 안에 표현되는 한, 세례의 양식은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단지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씻음의 효력을 일으키는 행위를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침례교는 주께서 침수를 통한 세례를 명하셨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세례를 시행하는 자는 그의 권위에 노골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침수는 적합한 세례의 한 양식이다. 그러나 물을 흘려 붓는 것이나, 물을 뿌리는 것도 적합한 세례의 양식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의식들이 정결케 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③ 세례를 받는 자
가. 성인 세례
성인들의 경우 신앙 고백이 선행 되어야 한다. 세례는 표징과 인인 동시에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는 은혜의 본질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세례는 중생, 믿음, 회심, 그리고 칭의를 전제로 한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었다는 사실도 세례의 전제가 된다. 세례라는 성례는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며, 믿음은 모든 다른 신적인 은혜의 작용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세례는 다른 은혜의 작용에도 크게 유익을 끼친다.
나. 유아 세례
가)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유아들에게 세례을 주었다는 명시적인 기록은 없지만 몇가지 점에서 유아 세례의 성경적 근거 발견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주로 영적인 어약이며 이 언약의 표징과 인은 할례이다. 이 언약은 지금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현시대의 ‘새 언약’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유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언약의 유익을 나누어 가졌으며,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상징과 인으로 받았다. 유아들은 옛 세대에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할례는 신적인 권위에 의해서 세례로 대치되었고, 은혜 언약에 들어오는 상징과 인의 역할을 세례가 담당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이 옛 시대의 언약의 표시와 인을 받았다면, 그들은 분명히 새 시대에서도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신약은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 일상을 벗어난 일이 아니라 오히려 통상적인 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행 16:15, 33; 고전 1:16).
나)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유아 세례
세례를 받는 어린이들은 거듭났으며 따라서 믿음의 씨앗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어린이 안에 있는 이 믿음의 씨앗을 강화시키신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성찬의 작용이 성찬식을 거행하는 순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세례의 작용도 반드시 그것을 시행하는 순간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물론 세례를 시행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어떤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마음속에 은혜를 증진시킬 수 있다. 유아 세례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도 강화시켜 주며, 자신들이 키우는 아이들이 은혜 언약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자녀를 믿음으로 교육시켜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끼도록 해준다.
(5) 성 찬
① 성찬의 제정
성찬의 제정에 관한 기록은 공관복음서에 하나씩 그리고 고전 11장에 하나, 도합 네 번의 기록되어 있다. 분명한 사실은 주께서 성찬을 유월절 식사를 마치기 전에 제정하셨다는 것이다. 새로운 성례는 유월절 식사의 중심적 요소와 연관이 있었다. 어린 양과 함께 먹었던 떡은 새로운 용도를 위하여 성별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일반적인 ‘축복의 잔’으로 불리는 세 번째 잔이 새로운 성례에 있어서 두 번째 요소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이와 같은 경로를 통하여 구약의 성례가 아주 자연스럽게 신약의 성례로 전이 되었다. 유월절 양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모든 피의 제사와 같이 유월절 양은 피 흘림이 죄 사함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외에도 그것은 예표적인 의미가 있었는데, 즉 정하신 때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제거할 대희생의 제사를 예표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이스라엘 구원을 기념하는 국가적인 의미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어린 양이 출현하여 죽임을 당하는 시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상징과 예표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충분한 희생은 더 이상 피 흘리는 일이 필요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피의 요소가 속성은 그래로 지니면서도 피 없는 요소로 대치되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한 일이었다.
② 성찬시에 임하는 성례적 연합 혹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의 문제 
가) 로마 교회의 견해
로마 교회는 성례적 연합을 물질적 의미로 생각하였다. 표징은 의미하는 것과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길을 터 주기 때문이다.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라"는 예전문을 낭독할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로마 교회는 말한다. 이것들의 본질은 변할지라도 속성은 그대로 남는다.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임재한다. 로마 교회의 견해는 인간의 감각에도 맞지 않으며, 떡과 포도주의 모양과 맛을 실제로 몸이요 피라고 믿을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실체와 속성의 분리를 믿는 것과 물리적인 몸이 동시에 여러 곳에 임재하는 것을 믿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체를 높이고 숭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 루터파의 견해
루터는 로마 교회의 화체설을 거부하고 공재설로 대체했다. 루터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남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고 아래,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몸과 피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인격이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재한다고 한다.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성찬시에 장소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한다. 루터파의 견해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견해와 별반 다른 것이 없는 견해이다. 이 견해가 속성의 변화 없는 본질의 변화의 반복적인 기적을 포함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속성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채 본질만이 변화하는 기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것이 내 몸에 동반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 
다) 쯔빙글리의 견해
쯔빙글리의 성찬론에서 모든 반지성적인 신비주의를 제거하고 소박하고 단순하게 성찬을 표현하려는 경향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종종 성찬은 단지 주의 죽으심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성찬은 인 또는 보증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 같은 생각을 충분히 전개하지 않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성례에서 하나님이 보증하신 것보다는 신자들이 서약한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먹는 것과 그를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을 동일시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성찬시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만 신성으로만, 그리고 성찬에 참여한 신자들의 이해에만 임재하실 뿐이다.
라) 개혁파의 견해
칼빈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쯔빙글리의 성찬론을 반대했다. 첫째, 이 견해는 성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을 희생시키면서 신자들의 행위를 강조한다. 둘째, 이 견해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을 그의 이름을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칼빈에 의하면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의 사역 곧 죽으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 사역 곧 영광 중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도 관계가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불론 육체적으로 그리스도 장소적으로 성찬시에 임재하시지는 않지만, 몸과 피를 포함하는 전인으로서 임재하시며 또한 향유된다고 말한다. 그는 신자들과 구주의 전인격과의 신비적인 연합을 강조한다. 그의 표현은 아주 명료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에 임재하지 하늘에만 장소적으로 임재할지라도 신자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생명을 주는 감화를 그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 감화는 실제적인 것이면서도,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신비적이요, 성령을 매개로 하여 전달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받는 믿음의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가능케 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수찬자가 믿음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로 들어올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감화를 수찬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③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찬 혹은 그 효력
가) 성찬에서 받는 은혜
성찬은 신자들만을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죄인들의 마음속에서 은혜의 사역을 창조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의 임재는 수찬자의 마음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만 성찬을 시행하셨다. 행 2:42, 46은 믿는 자들이 떡을 떼는 일을 꾸준히 계속한 것을 말하고 있고, 고전 11:28, 29는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것을 강조한다. 성찬에서 단지 말씀의 효력과 받은 은혜를 증가시킬 뿐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은혜요, 영적으로 자양분을 공급받고 다시 살리는 은혜요, 구원의 확신을 점점 증가시키는 은혜이다. 
나) 이 은혜의 사역의 방식
(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견해
로마 카톨릭 교도들에게 있어서 성찬은 하나의 성례일 뿐만 아니라 제사이다. 성찬은 일차적으로 제사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 제사의 피 없는 갱신'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찬에서 실제로 다시 죽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방불한 외적인 변화를 겪으신다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또한 일관성이 없기는 하지만, 성찬의 효력은 어떤 장애물의 존재에 의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성향의 결핍을 통하여 그리고 사제가 교회의 요구를 듣지 아니함을 인하여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정지될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나) 개신교의 견해
개신교의 대표적인 견해는 성찬이 의식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찬은 그 자체가 은혜의 원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손에 있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성찬의 효율적인 작용은 수찬자의 믿음 그 자체뿐만 아니라 믿음의 행동에 달려 있다.
Ⅲ. 결 론
벌콥의 교회론은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도 부분은 다루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말씀과 성례만이 진정한 은혜의 방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점만 빼고는 교회론에서 다루어야 할 부분은 다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될 자를 영원전에 기뻐하신 뜻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이 선택은 모든 세대, 모든 민족에 걸처서 이루어졌고 이루어 가고 있다. 이 선택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를 이루고 각자 주어진 은사로서 서로 섬기고 봉사를 한다. 그렇게 선택된 자들은 유기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며 말씀과 성령에 의해 규칙과 제도를 만들고 그 주어진 소명에 따라 직분자들이 세워져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대표자들로써 이 공동체를 다스린다. 
우리는 이런 개념을 가지고 교회론을 살펴봐야 하며 그리고 참된 교회의 표지로써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바른 의미를 알아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구별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권징은 사라지고 성례가 시행되도 그 수여자나 참여자나 그 바른 의미를 알지 못해 성례는 단순히 의식적이고 행사적이 것으로 전락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권징과 성례만의 문제는 아니고 결국은 참된 말씀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교회론을 살펴봄을 통해서 참된 교회가 회복되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