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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교회론

삼위 하나님의 교제와 교회의 공동체성

삼위 하나님의 교제와 교회의 공동체성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우리의 성경해석은 상당히 시대의 풍조를 따라서 이루어진다. 심지어 ‘오직 성경’의 구호를 내세우는 교회와 성도라도 어느 정도는 이 제약성을 벗어날 수 없다. 가령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제 5계명을 설교하는 것은 쉬웠으나 이제는 그리 용이하지 않다. 자주 들었던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설교는 이제 쉽게 듣기 힘든 주제가 되고 말았다. 유교적 사회 통제가 작동하고 있던 시절에 성경의 계명은 쉽게 위계 질서에 기초하여 해석되었고, 경제적으로 힘들 때 맘몬의 위험을 지적하고 천국 시민이 감당해야 하는 고행의 삶을 설파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작 이런 설교는 지금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하겠다. 한편으로는 옛 위계질서가 파괴되고 이제는 자녀들의 장래가 부모의 현재를 결정하며 다른 편으로는 부모들이 그래도 자신들의 노후를 경제적으로는 준비하는 복지 시대에 제 5계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결핍에 의한 맘몬 추구가 아니라 부익부의 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시절에 물욕에 대한 성경의 권면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런 시각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겠다. 한국교회 역사에서 공동체성에 대한 갈망이 이전에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시골교회는 핍박 가운데 있어도 몇 되지 않는교인들이 서로 신앙 안에서 의존하면서 성도의 교제를 누렸다. 공동체에 관한 관심은 이농 현상이 심화되고 도시가 팽창되고 교회가 부흥되어 대형화 현상이 가속되면서 제기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도시화와 떼어서 고려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도시화는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특히 유럽의 대도시에 고색창연한 거대한 교회당의 건물은 눈에 띄이지만 대부분 그곳은 예배처소가 아니라 관광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한국의 도시화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전도나 선교 그리고 대사회적인 책임을 꾸준하게 실천하는 것은 세계교회사의 흐름에서 보아도 감사하고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반면에 교회의 대형화와 더불어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당의 외형과 내부가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든지, 재정 운용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적지 않는 들려온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군중 속의 고독’의 현상이 점차 누적되면서 공동체와 공동체성에 관한 관심이 가시적으로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의 도시화에 따른 교회의 대형화와 그리고 공동체성에 관한 관심은 서로 반비례하는가? 말을 바꾸어서 한국이 농업 위주의 사회였을 때에는 공동체성에 대하여 아무런 불만이 없었을까? 사실 도시화로 인하여 인간 관계가 점차로 사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봄, 여름 가을의 농번기에 두레로 뭉쳐서 함께 작업을 하고 겨울의 농한기에는 무료하리만치 남의 일에나 참견하는 풍습은 거의 사라졌다. 교회는 재정적으로 항상 어려움을 겪으면서 특히 교회 건축을 위해서는 철야기도까지 하면서 당회, 제직회와 전교인들은 회의를 자주 모이고 의견을 모았다. 교인들도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서 교회의 재정에는 어려움이 덜하지만, 함께 기도하고 토론하는 여유를 누리지 못한다. 이제는 경제 행위 자체가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면서 계절의 구분 없이 모두가 경제 활동에 참가해야 함과 동시에 모두가 지나치리만치 자기 일에 몰두한다. 어떤 이들은 주일 예배로만 만족하고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는 알려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공동체성에 관한 관심이 출현한다. 이 양극 현상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공동체성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기초하여 문제를 함께 풀어보려고 한다. 
1. 신앙의 개인주의적 기초
한국교회가 개인의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종교개혁은 성례전에 기초하면서 사제에 의존하던 암묵적인 신앙을 반대하였다. 성례전보다는 말씀의 선포가 강조되었고, 의존적인 암묵적인 신앙이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명백한 신앙을 추구하였다. 중세의 집단적인 신앙 양태보다는 개인의 신앙체험이 강조되었다. 즉 말씀에 기초하여 사죄함을 체험하고 생을 거룩하게 하려는 적극적인 신앙 행태가 강화되었다. 이것은 개신교회 내의 지속적인 경향이 되었다. 이런 경향은 분리주의적인 청교도사상과 이에 근거한 회중교회주의, 그리고 미국의 부흥운동에서 개인주의적 신앙관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중생과 회심의 체험이 강조되었다. 한국교회는 이런 사상과 운동에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복음을 받았다. 상당수의 피선교국과는 달리 식민 지배국의 선교사가 아니라 선교에 열정을 가졌던 이들을 통하여 복음을 받은 것은 한국교회에게는 큰 축복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개인주의적인 신앙관과 이에 연관된 교회관은 그들의 공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어려움을 주고 있다. 한국교회 초기부터 정착된 부흥회와 사경회는 이런 개인의 신앙 확신을 위한 좋은 방편으로 사용되었다. 즉 성경과 이에 기초한 교회의 고백으로 신앙의 표준을 삼는 전통이 아니라 성경에 기초하되 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추구하는 신앙은 공동체 의식을 강하게 심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성도의 모임 중심의 신앙 훈련은 하나님과 개인의 영혼의 관계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하나니님이 그 모임 밖에서 행하시는 사역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구원을 간증할 수 있는 소수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이기 때문에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공교회성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때로는 적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런 단점과 동시에 이 공동체적 모임이 사회적이거나 자체의 내적 원인으로 인하여 와해될 경우, 이런 모임에 참여하던 회원들은 다른 모임에의 정착을 포기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들은 기존 교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지게되는 책임과 사명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2. 현대 목회에 대한 점검
이런 어려움은 목회에서도 나타난다. 탁월한 능력으로 대형 교회를 이룬 개척자나 담임목사가 은퇴를 하게 되어 후임목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항상 따랐다. 한국에는 교파별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교회가 많은데, 그런 교회들의 담임목사에게 어떤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과연 어떤 대응책이 나올 수 있을까? 같은 신앙의 색깔을 선호하는 개인주의적인 신앙 양태는 목회자들의 목회 방향을 설정하게 만들었고, 또 그런 목회가 단연 선호의 대상이 된다. 이제는 이런 개인주의적 신앙이 그 신앙을 충족시켜주는 목회자에게 가히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의 양태를 만들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정도에 따라서 교인 가입을 허락하는 고전적인 개인주의적 신앙 양상을 벗어나서, 다만 그 목회자의 설교가 듣기 좋고, 그의 교회가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를 출석하는 식으로 발전된다. 마치 기업이 생존하기 위하여 업종의 다양화보다는 전문화에 주력하듯이, 이제는 교회와 목회도 전문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야말로 시장이 넓으니까 교인과 신앙의 수요를 따라서 목회와 교회의 특성을 결정한다. 어떤 교회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교회가 성장하고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는 소문이 나면, 대부분 그 교회와 목회자가 주동이 되어 목회세미나를 개최하거나 그 목회자는 인기있는 강사가 되어 자신의 목회성공의 사례를 전파한다. 이것도 일종의 시장으로 형성되어 많은 일거리와 경제적 활동의 근거가 된다. 반면에 이런 특성이 없거나 또는 쉽게 모방하지 못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도태하고 만다. 마치 재벌의 몸집불리기에 중소기업이 고사당하듯이, 또 대형 유통업체가 골목의 구멍가게를 줄줄이 문을 닫게 하듯이, 대형교회는 번성하지만, 개척교회는 수 없이 시작되었다가 사라지는 안타까운 현상이 연출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최근 목회 경향은 ‘익명성을 바라는 점쟎은 교인들’을 많이 양산하였다. 신앙과 교회 생활에서 각 성도의 이름과 얼굴을 요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목회는 이런 다수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애쓰고, 교인들은 이런 목회를 일종의 문화적 세련미라고 격찬한다. 예배와 설교라는 1시간은 이를 위하여 충분하며, ‘성도의 교제’란 거추장스럽게 되었다. 예배시간 직전에 자동차로 물밀 듯이 몰려왔다가는 송영과 더불어 물밀 듯이 다시 떠나간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특히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교회의 공동체성과 공동체운동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를 적극적인 해결책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차제에 교회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교회의 중요한 측면인 교제와 공동체성에 관한 논의가 더욱 절실히 느껴진다. 우리는 이 문제를 삼위 하나님의 교제의 관점에서 살피려고 한다.
3. 성도의 교제. S. Benko, The Meaning of Sanctorum Communio (London: SCM, 1964).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는 마치 서로 대치되는 것인 양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치않는다. 사도신경은 제 3부 즉 성령님의 사역을 고백하면서 먼저 교회를 그리고 나서 ‘성도들의 교제’를 고백한다. 그런데 ‘사도’신경을 12항목으로 나누는 전통에서는 ‘교회와 교제’를 제 9항목으로 함께 묶는다. 10째 항목인 ‘사죄’가 구원론에 해당된다면, 9항목은 ‘교회론’에 해당된다. 특이한 것은 교제의 원어(communio; κοινωνια)에서 공동체(community)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물론 어원보다는 어법이 더 중요하지만, 사도신경에서 함께 묶여져 있던 것이 분리되어 서로 대치되는 양 사용되는 어법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현금 신구교를 막론하고 교회를 공동체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제2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교회를 특별히 공동체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 이후 30년간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해는 교회를 다른 방식으로 규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제압하고 있다. 개신교와 동방교회 안에서도 교회를 공동체로 해석하고 정착시키려는 연구가 많이 있다.. K. McDonnell, "Koinonia/Communio as an Integral Ecclesiology", 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Vol. 25, 1988, 399-427; P. Avis, Christians in Communion (London: Geoffrey Chapman, 1990); J. Zizioulas, Being as Cummunion (New York: St Vladimir's Press, 1985; Reprint 1993); 이런 시도는 특히 교회연합운동에서 유행적이다. 제 5차 신앙과 직제세계회의(1993)의 전체 주제는 ‘Koinonia: Towards Communion in Faith, Life and Witness'이었다.
교제/공동체 교회론에 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코이노니아’는 신약에서 19번 나타난다. 이 말을 ‘교제’로 번역하면 대개 ‘식탁’ 교제나 잔치의 분위기를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이 말에는 ‘참여’의 의미도 있다. 교제는 늘 기쁜 것만을 연상시키고 추구하게 만들지만, 참여는 그 반대의 측면까지도 포함한다. 가령 고난에 함께 참예(고후 1:7; 빌 3:10)하거나, 재정이나 물질을 보조하여 참여(롬 15:26; 고후 8:4, 9:13)하거나, 복음에 함께 참여(빌 1:5)한다. 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함께 참여할 수도 있다(고전 10:6). 그런데 교회론적으로 가장 강하게 사용된 곳은 요한일서에서 나타난다. 복음 전파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와의 교제를 이루어 내며, 그들의 사귐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는 사귐이다(요일 1:2). 이 성도들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면 거짓이 없고 빛 가운데 행하게 된다(요 1:6-7).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고, 동시에 서로 간의 참여가 있게 된다. 여기에서 ‘성령의 교제’(고후 13:13)가 중요한 뜻을 지닌다. 이것은 이 코이노니아가 지닌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양 측면이라 하겠다. 사귐을 막연하게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교제와 사귐은 a. 당사자들이 어떤 제삼의 대상(고난, 물질, 복음 등)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나아가 성도들은 이 복음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고 서로 함께 교제한다. b.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는 참여를 통한 교제를 말한다.
이 교제라는 말은 애초에 기독교적 교제와 교회를 이루는 인격적 관계를 뜻했지만, 구체적인 기관까자는 지칭하지 않았다.. K. Giles, What on Earth is the Church: A Biblical and Theological Enquiry (London: SPCK, 1995), 16.
그렇지만 교제에서 그 교제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 곧 교회라는 의미가 점차로 첨가되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되고 있는 ‘성도의 교제’는 교회를 표현하는 또 다른 말이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세속적 의미에서 코이노니아는 사회학적인 개념으로서, 원래 상인공동체, 촌락공동체나 결혼 관계를 지칭하였다. 세속적으로 사용되었던 원래의 의미는 성경과 교회사에서는 파생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흔히들 지금 교회 안에서 사용하고 있는 ‘공동체’라는 개념은 적어도 용어로서는 이런 집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원래 교회를 지칭하던 말이 이제는 교회와 대치되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중간 결론에 이르렀다.
사도신경에 사용되고 있는 ‘성도의 교제’는 비록 교회론적 용어라고 언급되었지만, 교회사에서는 달리 사용되었었다. 즉 교제라는 원래의 의미에서 나타나듯이, 이 말은 성도 간의 교제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룩한 것들에의 참여’, 곧 성례에의 참여였다. 즉 사도신경이 라틴어로 전수되는 과정에서 ‘거룩’에 해당되는 라틴어는 문법적으로 복수 소유격으로서 남성 또는 중성이 같은 꼴로 나타났다. 특히 성찬에의 참여가 고백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메 참예함이 아니나”(고전 10:16). 나아가 교부 문헌들을 살펴보면, 교제라는 말은 아주 다양하게 사용된다. 먼저 성부와 성자의 관계 즉 성자의 신성을 표현하기도 하며, 성도들과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말하기도 하고, 결혼 관계를 지칭하기도 하며, 교회의 예배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예는 성찬에의 참여이었다. 그런데 이 ‘교제’와 ‘거룩’이 결합되어 사용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성찬에의 참여’였다. 즉 거룩이라는 말은 원래 인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중성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5세기부터 특히 어거스틴에게서 성례전에의 참여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교회를 지칭하는 의미에서 ‘성도의 교제’가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로마교회 안에는 지금도 제 삼의 의미가 사용되고 있다. 성도들의 교제를 확장하여서 산자와 죽은 성도들의 교제를 말하면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근거로 삼는다. 
신앙고백의 역사에서 이런 식으로 어떤 문구의 의미가 분명하여 지면서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사용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라는 의미 전환을 달리 비난할 이유는 없다고 하겠다.
4. 교제의 의미: 삼위 하나님의 교제. 유해무, 「개혁교의학」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199-201, 644-647; J.B. Torrance, Worship, Community and the Triune God of Grace. Carlisle, U.K: Paternoster Press, 1996.; C.E. Gunton, The Promise of Trinitarian Theology (Edinburgh: T&T Clark, 21997); Giles, op. cit., 219-229; L. Boff, Trinity and Society (1986), ET. P. Burns, (New York: Orbis Books, 1988); Emilianos Timiadis, "The Trinitarian Structure of the Church and its Authority", in T.F. Torrance, ed., Theological Dialogue between Orthodox and Reformed Churches (Edinburgh: Scottish Academic Press, 1985), 121-156; J. Zizioulas, Being as Cummunion: Studies in Personhood and the Church.
교제는 내적 관계를 말하고, 공동체는 그 교제와 관계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말하며 사회학적인 기관을 말한다. 교제가 우선이고 그리고 공동체가 가능하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교제를 기초로 하여 외적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나 교제가 사라져도 공동체는 존속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염려하고 피해야 한다. 또 교제에는 잔치만이 지배적 분위기가 아니라 고난과 결핍에의 참여도 포함된다. 우리는 교제의 모본으로서 삼위 하나님의 교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인간의 고난과 결핍에 참여하기 위하여 삼위께서 서로 협의하고 함께 사역하고 함께 완성하여 가는 아름다운 역사는 바로 천국잔치를 연출하는 삼위의 영광으로 영원토록 빛날 것이다.
개신교도들은 위계적 교회질서에 대하여 원초적인 거부감을 지닌다. 사실 제네바의 당회를 현대 민주주의의 산실로 보려는 시도가 있듯이, 특히 개혁교회는 교회 내에 있는 위계제도를 거부하였다. 이런 평등을 지향하는 교회론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교회법과 행정은 위계적으로 정착되고 말았다. 이것이 또한 공동체운동을 부추키는 중요한 내적 이유로 지적된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동등한 하나님으로서 누리시는 아름다운 교제를 교회의 모본으로 삼아서 실천할 수만 있다면, 성도의 교제를 기피할 수 없을 것이요, 반작용으로서의 공동체운동도 올바르게 교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 나타났다. 우리가 이 사랑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찬양하게 된다. 성부 하나님은 땅의 일을 위하여 성자를 보내기로, 성자는 이 제안에 응하기로, 성령은 그의 오심을 예비하기로 협의하셨다. 성자는 성부의 택한 종이요, 마음에 기뻐하는 바 사랑하는 자요, 성부는 그에게 성령을 주셨다(마 12:18).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는 가장 깊은 교제의 비밀을 즐긴다. 성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바쳤고(히 9:14),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했다(롬 1:4). 이와 같이 십자가와 부활도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다. 삼위 하나님의 사역은 동시에 우리를 위한 사역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셨다(엡 2:10). 성자가 성령을 받아 성부의 일을 완수했듯이, 이제는 성자가 성부로부터 동일한 성령을 받아 다시 사랑 받는 많은 아들들에게 주셨다(요 15:26; 행 2:33). 이것은 깊은 교제, 곧 신지식을 말하며, 사랑의 성령으로 가능해진다(롬 15:30 참고). 서로 원수였던 자들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성부께 함께 나아가게 하신다(엡 2:18). 그들은 또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간다(엡 2:22). 이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로써 사랑 받은 자들은 성부가 성자를 창세 전부터 사랑하심으로 주신 영광도 알게 된다(요 17:24).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이기도 하다(요 17:22).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하여 협의한다. 삼위의 협의는 우리와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며, 종국적으로는 천지에서 실현될 것이다.
‘영광’에서 삼위 하나님의 삼위 하나님이심이 가장 구체적으로 계시된다. 성자가 추구한 것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성부의 영광이었다(요 8:50, 16:12-13). 성자는 말씀 뿐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전파하심으로 성부를 영화롭게 했다. 예수의 삶은 삶으로 나타난 송영이다. 그러면서도 성자는 성부가 자신을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셨다(요 17:5). 이제 성자의 몸은 ‘영광의 몸’이다(빌 3:21). 성자가 영광받으신 뒤에 올 성령은 오셔서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요 16:14). 하나님의 영은 영광의 영이다(벧전 4:14). 성자가 성부를 영화롭게 하시는 일은 오직 성령이 성자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완성된다. 이것은 역사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다. 성자가 성부의 모든 것에 동참하는 것은 성령이 성자의 모든 것에 동참하는 것과 비견될 수 있다. 이는 삼위 하나님의 내적 관계를 말한다.
성령은 성도들로 아들과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고, 장차 참여시킬 것이다. 성도들의 영화란 성령을 통한 성부/성자의 교제에 동참, 곧 하나님 영광의 빛으로 변화됨에 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받은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셨다(요 17:22). 성도들이 세례를 받으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지고, 포도 덩쿨인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 성령은 이 일에서 그들이 성자의 아들되심에 동참시키시며, 또 성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완성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 곧 성령을 통하여 성자가 성부와 가지신 교제로 들어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생을 이미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성령님은 이렇게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제자들이 과실을 맺게 하심으로 성부는 영광을 받고(요 15:8), 그들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후 3:18). 이렇게 하여 성령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를 더욱 더 영화롭게 하신다.
구원의 경륜은 바로 하나님의 본질에 속했다. 구원을 삼위 하나님의 협의와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삶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오직 구원이 구원론적으로만 제한되고 급기야는 인간론적인 개인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체험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지만, 우리의 구원 자체는 우리 이전에 이미 삼위 하나님이 당신들의 협의에 기초하여 이루신 사역이다. 구원에만 머물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신앙은 성숙되지 못한 개인주의의 잔재를 지니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교제와 참여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그의 본질에 참여함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성도의 교제’를 포함한다.
5. 교제의 방편으로서의 성례전
개신교는 성례전적인 구교를 대항하여 설교를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으로 받아들인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롬 10:17). 이것은 구교의 성례전적 형식주의의 폐단을 파악하고 성경의 가르침에로 돌아가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의 또 다른 교훈인 성례전, 특히 성찬에의 참여를 무시하는 풍조를 조성해서는 안된다. 교회사에서 살펴불 수 있듯이, 고대교회에서는 성례에의 참여가 교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성례전을 형식주의의 소산으로 보는 입장이 한국교회에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교제를 참여로 볼 경우, 참여하는 대상이 언급된다. 교회가 공동체가 되는 것은 바로 성례전에의 참여를 기초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중세의 폐단이 문제가 된다고 하지만, 성례전을 무시하는 교회는 교회일 수가 없다. 성례전은 삼위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의 방편이다. 성례에의 참여는 삼위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방편이 된다. 세례는 성부, 성자와 성령의 한 이름으로 받는다. 이것은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정하신 제도이며, 죄와 흑암 속에 있던 자들이 생명과 빛 속으로 호적을 옮기는 행위이다. 왜 세례의 집례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체험하지 못하는가? 왜 다른 이의 세례식에 참여하면서, 삼위 하나님 안에서 이미 세례받은 나와 그가 교제하고 있다는 공동체 체험을 하지 못하는가? 성찬도 그러하다. 성찬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는 행위이다. 이것은 오직 기독론적 차원만을 지닌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님 안에서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여 계신다. 이 먹고 마심을 통하여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이처럼 성찬에의 참여는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또 함께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과 함께 한 형제 자매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교제의 장이기도 하다. 이 기초 교제 위에서만 넓은 의미의 성도의 교제나 교회의 공동체성이 실현될 수 있다.
비록 사도신경의 문구가 ‘성도의 교제’로 정착되었다 하더라도, 이 교제는 ‘성례전에의 참여’라는 원래의 의미를 배제하지 않는다. 참 교제는 성례전에의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성례전을 무시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말씀을 강조하는 개신교 전통에 서 있다고 하지만, 과연 말씀이 살아 있는가? 정말로 설교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배설하는 잔치로 매주일 전파되고 있는가? 과연 한국교회 안에서 성례전을 제대로 시행하고 있는 교회는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교회사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전통을 한국교회가 이 점에서 망각하고 있음을 지적하려고 한다.. 현대 목회와 설교에서 시청각적인 효과가 각광을 받는데, 이 또한 중세의 형식주의를 답습할 위험을 안고 있다.
비록 한국교회가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신앙의 수고를 세계교회를 향하여 하고 있다 하더라도, 공교회적인 관심을 상실한 교회는 ‘파당성’에 빠지고 말 것이다. 나아가 한국교회가 신앙과 목회에 있어서 안고 있는 ‘개인주의’를 반성해야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신앙이 한국교회의 성장의 배경에는 있다고 하지만, 적어도 교회의 공동체성에 있어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놀라우리 만치 무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성찰도 없이 일각에서 ‘폐백 대신 성찬식’을 제안하는 것은 안타까우며,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성경’은 ‘성경 전부’를 뜻한다.
6. 마치는 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사이의 아름다운 영광의 교제가 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교제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이 관점이 신앙관과 목회관을 결정해야 한다.
도시화와 대형교회가 공동체운동에 원인을 제공하지만, 우리는 한국교회가 근본적으로 성경적인 교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자성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만약 성례를 제대로 시행할 수 있는 규모의 교회를 많이 세울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성경적인 교제 공동체를 형성할 것이요, 정신 없이 왔다가 급하게 떠나가는 교인들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교제를 무시하고 익명성을 중히 여기는 신앙 양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신앙으로서 조만간에 시들고 말 것이다. 고난과 헌신을 수반하는 참여와 교제를 누리지 못하는 신앙은 건강하지 않다.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으려면, 이제는 대형교회에서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속설을 파괴하여만 한다.
그리고 공동체운동을 추구하는 성도들은 항상 자신들이 얼마나 신앙을 균형있게 체험하고 있는지를 자성해야 한다. 반작용으로서의 도피는 결코 건설적일 수 없다. 성도는 교회의 회원이 됨으로써 자신이 기대하는 것보다는 더 이상의 것을 얻는다. 교제는 말씀과 성례를 통한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이 교제는 성도들과의 교제의 기초이다. 교제에는 참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제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이 되면, 그는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들과의 교제에 참여한다. 그리고 참여는 고난과 협력을 요구한다. 현실 교회의 부조리는 ‘성도의 어머니’인 교회를 비난하고 도피할 수 있는 근거를 주지는 않는다. 공동체를 꿈꾸는 성도들은 과연 얼마나 그 교회를 위하여 고난에 동참하였는가? 이를 위하여 교회는 신앙을 고백하는 개인들의 모임이라는 성경적인 것 같으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교회관을 버려야 한다. 고백하는 그 순간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 구속하기 위하여 오셨고 죽으셨고, 또 성령님을 보내셔서 당신의 교회를 부르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동일한 관심 집단으로서의 공동체는 교회일 수가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으로서 인간들 중에 존속한다. 
그러므로 동일한 이익집단을 목표로 삼는 전문화 목회와 이를 통한 성장이나 교회의 대형화는 제 아무리 성경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제는 반성의 때가 되었다. 그렇지만 대형교회 자체보다는, 고백하는 개인을 교회와 제도와 현실 판단의 출발과 기준점으로 보는 개인주의적인 신앙관과 목회관이 문제의 핵이다. 익명성을 제공하거나 반작용인 공동체운동에 원인을 제공하는 목회는 점검되어야 한다. 설교자와 목회자는 삼위 하나님을 알아야 하며, 날마다 교제를 통하여 직접 체험해야 한다. 나아가 그 풍성한 신지식과 교제가 설교와 성례전, 그리고 목회적 대화와 전반적인 목회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전달될 때, 한국교회는 지금까지의 성장을 보다 더 단단한 기초 위에다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교회라는 공동체의 아픔에 참여하고 개혁하려는 시도하지 않고 기피하거나 도피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비록 현재의 교회가 ‘성도들의 교제’가 아니라 ‘죄인들의 교제’(한스 큉)라 할지라도, 우리는 참여를 통한 교제 공동체인 교회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성자께서는 죄를 물든 세상을 피하지 않고, 바로 그 죄 중에 오셨다.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협의하시고 고난받으시고 완성을 향하여 역사를 운행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교제가 바로 깨달아져서 교회 공동체가 그 교제를 모본으로 삼아서, 한국교회는 건전하고 잔치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교제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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