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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교회론

한스 큉의 성령과 교회 이해

한스 큉의 성령과 교회 이해 

성령이란 무엇인가? (한스 큉) 
고대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영(靈;Geist)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붙잡힐 듯 하나 붙잡히지 않고, 볼 수 없으나 강력하며, 사람들이 숨쉬는 공기와 같이 삶에 필수적이며, 바람과 폭풍처럼 힘찬 것이 성령이다. 모든 언어들에는 영을 나타내는 언어가 있다. 그러나 다양한 성(性)을 가진 이 언어는 영이 단순히 표현되기에는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라틴어의 영(Spiritus)은 (독일말에서 처럼)남성이다. 히브리어 루아하(Ruach)는 여성이고 헬라어의 프뉴마(Pneuma)는 중성이다. 
영은 여하튼 남성적인 인격과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다. 여성 명사 루아하는 창세기 첫 장에 따르면 수면 위에 운행하는 저 기운(Braus)과 바람(Sturum)이다. 중성인 프뉴마는 신약성서에 따르면 육에 반대되는 것으로, 피조되고 사라져 버리는 덧없는 현실재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생동하는 능력이요 힘이다. {{* 이 글은 한스 큉의 "현대인을 위한 사도신경 해설"(CREDO:Das Apostolische Glaubensbekenntnis-Zeitgenossen erkl rt, M nchen : Piper 1992, 165쪽 이하)에서 발췌하여 편집실에서 번역한 것이다.}} 
영(靈)은 그러므로 창조 때나 계속된 역사 속에서, 또는 이스라엘 가운데 후에는 그리스도교 교회 가운데 역사하는, 생명과 심판을 위해 창조적으로 혹은 파괴적으로 역사하는 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힘이다. 이 능력은 성서에 따르면 강하게 혹은 조용히 인간들에게 엄습하며 개인이나 그룹을 황홀경의 경지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위대한 남성들과 여성들 가운데 영은 역사한다. 성서에서 보는 대로 영은 모세, 이스라엘의 사사들 전사들, 노래하는 사람들과 왕들, 예언자들, 사도들과 제자들 가운데 역사한다. 

II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영이 거룩한 영-聖靈(Heilige Geist)-인가? 영은 그것이 거룩하지 못한 인간들과 세계의 영들과 구별되고 유일한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거룩하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Der Heilige Geistist Gottes Geist). 
신약성서에서도 성령은 가끔 종교 역사에서 보는 것처럼 어떤 마술적이고 물질적이며, 역동적인 자연의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유동체(Fluiduim)와 같은 것이 아니고 어떤 주술적인 실재도 아니다. 
신약성서에도 성령은 하나님 자신(Gott selbst) 이외에 어느 다른 누구가 아니다. 그가 인간과 세계에 가까이 있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 느낄 수 있으나 붙잡을 수 없으며, 생명을 창조하고 심판하는 힘으로 은사를 베풀며 규정할 수 없는 실체로 내재한다. 
그런데 비둘기의 상징(본래는 고대 동양의 사랑의 신의 전령자를 상징)이 성령을 인간에게 가까운 형체로 표현함으로 인간학적 측면을 일깨우고 있지 않는가? 이와 같은 비둘기의 상징으로 성령이 표현되는 것은 (아마도 초대 유대 지혜전승에서부터 예수의 세례받는 장면에 까지 발전되어) 하나님은 성(性)을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남성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차원, 즉 생명을 선물하고 사랑과 평화를 가져오는 상징으로 강조된 것이 아닐까 한다. 대부분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사람들이 성령을 신비적인 형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한데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정된 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을 성령에 까지 확대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381년 콘스탄티노플의 공의회는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 "영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한 본질이다."(Der Geistist eines Wesens mit Vater und Sohn.) 

III 
결코 성령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있는 제3자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아니다! 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태양 빛이 태양으로부터 오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오시는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가까움(N he)이다.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는 하나님이 믿는 자들과 믿음의 공동체에 어떻게 가까이 계시며 현존하는가를 묻는다면 신약성서의 대답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들 인간들에게 영으로 가까이 계신다. 
즉 영 가운데 영을 통하여, 그렇게 영으로서 현재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아들여 졌으며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믿는 사람들과 믿음의 공동체에 가까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사도 바울에 따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살려주는 영(고전 15:45)이 되었다. 그렇다! 주(키리오스, 말하자면 예수, 승천한 자)는 영이다."(고후 3:17)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은 지금 동시에 하나님께 들리움을 받은 자의 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올라간 주님은 지금 영의 실존과 활동 방식으로 있다. 그러므로 그는 영을 통하여, 영 가운데, 영으로서 현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믿는 자들과 하나님, 주, 영의 만남 가운데는 실제로 하나이며 동일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주체적인 기억이나 믿음을 통하여서만 현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인간들에게 만나지는 영적 현실, 현재화,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영향력(Wirksamkeit)을 통하여 현재하신다. 

교회의 본질 
교회론은 그 근원인 "교회의 근원"에서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또 받아야 한다. 이 근원은 단순히 역사적 현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철학적으로 성립 또는 해석되는 초월적인ㅡ교회사의 방향을 좌우하는 ㅡ "원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전혀 구체적으로 "주어진 "것이요 "제정된" 것이며 "맡겨진" 것이다. 
교회가 이해하는 신앙에 따라, 역사 안에 활동하는 하나님 자신의 권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 안에, 인간을 위해, 결국 인간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활동에 의해 결정된 이 교회의 근원은 단순히 역사의 첫 순간 또는 첫 단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의 모든 순간의 온 역사를 규정한다. 교회의 본질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현실 교회는 그 근원을 등한시하거나 거기서 완전히 멀어질 수 없다. 이 근원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모든 역사적 양상과 모든 변화와 모든 일시적 우연성 속에 항상 참되고 계속 타당한 것이 주어진다. 
교회의 본질은 주어져 있을뿐 아니라 맡겨져 있다. 세계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세계사의 변화 속에서 그 근원적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부동성(immobilismo)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응성(aggiornamento)에있다. 교회는 항상 새로이 새로운 날(giorno)에 참여해야 하고, 항상 새로이 역사의 변화와 인간생활의 변모에 적응해야 하며, 항상 새로이 개혁과 쇄신과 재고를 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숙고해야 할 일은 현재의 실태에서의 출발이요 과거의 근원에의 조회(照會)이며 미래의 교회상의 추구이다. 교회의 존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메시지 안에 있는 그 근원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교회의 존립근거는 결정적으로 타당한, 따라서 지금도 타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활동이다. 근원을 되돌아봄은 언제나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어느 시대의 교회에 있어서나 조회의 근거로 존속하고 있는 신앙의 원초적 증언에서 구체화된다. 원초적이기에 이 증언은 비할 데 없이 독특하며, 비할 데 없이 숭고하기에 그것은 생생한 구속력을 가지고 계속 모든 시대의 교회의 판단 기준이 된다. 
이 원초적 증언, 원초적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다. 다른 모든 교회 전통은 그것이 아무리 심오하고 탁월한 것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초적 증언을 중심으로 이 원초적 메시지를 ㅡ 제각기 다른 역사적 상황에 따라 ㅡ 해석,주석,설명,적용한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원초적 메시지는 바로 줄곧 변천하는 교회 선교의 상황에 의하여, 계속 변모하는 일상생활의 질문과 문제와 요구들에 의하여 그 깊이가 드러난다. 모든 주석과 해석, 모든 설명과 적용은 원초적인 생명력과 박진한 구체성과 탁월한 현실성을 가지고 증언하는 성서의 메시지에서 거듭 새로이 그 판단 기준과 정당성을 찾아야 한다. 성서는 교회 전통을 "규정하는 규범"(norma normans)이며, 전통은 "규정된 규범"(norma normata)으로 보아야 한다. 

근원적 설계의 현대적 적용 
그러나 분명히 말해 두자: 시대가 지나고 교회가 변하고 교회의 자기 이해가 변하는 속에서 신약성서에 나타난 실제의 교회 ㅡ 이 역시 이미 변화와 복잡한 다양성을 보이고 있었다 ㅡ 에 대하여 숙고한다는 것, 그것은 옛것일수록 더욱 완전하며 원시교회야말로 "황금기"의 교회라고 찬양하는, 낭만적 호고(好古)취미의 교회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에 입각한 신학이 지켜야 할 중대한 의무는, 어는 한 시대에 ㅡ 설사 가장 오래된 시대라 하더라도 ㅡ 집착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근원이 되었었고 또 나날이 살아 있는 교회의 근원이 되고 있는, 하나님 자신의 생생한 종말론적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밝히는 일이다. 어느 그리스도교 신학이 이러한 연구태도의 의무에서 면제될 수가 있는가! 
신약성서를 숙고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2세기의 유대인 크리스천이나 16세기의 재침례파 처럼 비역사적으로 신약성서의 교회를 반복,재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의 교회는 우리가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상황을 무시하고 무조건 따라야 할 모델이 아니다.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여 되풀이하는 것도 그 자체가 유익한 것은 아니다. 문자(文字)는 죽이고 영(靈)은 살린다는 것은 교회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가 그야말로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려면 단순히 과거만을 고수해서는 안된다. 역사성을 지닌 교회로서 항상 변하는 세계, 항상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사는 세계 속에서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스스로 변해야 한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가 신약성서의 교회를 숙고해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수시의 진전상이 모두가 신약성서에 의하여 허용될 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사에는 과오와 퇴보도 있어 왔다. 
원초적 증언인 신약성서의 메시지는 변하는 역사 안에서 언제나 최고심(最高審)의 구실을 한다. 그것은 만대의 교회를 평가하는 규범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탕을 둔 근원에서 비롯하여 이미 교회의 본질을 충만히 지니고 있는 신약성서상의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본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의 우리 시대에 맞게 변형시켜서 적용하여야 할 근원적 설계다. 
신약성서상의 교회 이외에 교회의 근원적 설계가 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제자들의 새 공동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마지막 시대의 공동체임을 자각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로 제자들에게 요구된 새로운 결단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활동에 근거해서만 가능했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선민"이나 "성도"라는 칭호를 지니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그들이 구약의 칭호인 동시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공동체의 칭호인 "하나님의 단체"라는 칭호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었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유대교에 있어서 이 이름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는 흩어지고 감추어져 있으나 장차 모여서 이루어질 종말의 하나님 백성을 가리켰다. 이에 해당하는 희랍어 "하나님의 교회"가 새로운 공동체의 이름으로 통용되었고, 오늘날 간단히 "교회"라 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라는 말은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로 사용되어 복잡한 의미와 뉘앙스를 띠게 되었다. 게르만어에서 통용되는 말(독일어 Kirche, 영어 church, 스웨덴어 Kyrka; 비교:슬라브어의 cerkov)은 루터가 지적했듯이 로마의 정치적 집회인 "꾸리아"(curia)에서 유래한 말이 아니다[루터가 "교회"라는 말을 싫어하고 "공동체"라는 말을 좋아한 데는 이 점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 말은 테오도리크 대왕의 고트 왕국에서 유래하여 도나우강 이북과 라인강 이남 지역에서 통용되었었다. 그 어원은 비잔틴 희랍 어형인 "kyrike"로서 "주님께 속하는"이라는 뜻이다. 보충하자면 "주님께 속하는 집"이라는 뜻이요, 요컨대 "주님(Kyrios)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게르만어와는 대조적으로 로만어(라틴어 ecclesia,스페인어 iglesia,불어 eglise, 이탈리아어 chiesa)는 모두가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희랍어 "에클레시아"(ekklesia)와 직접 관계를 보존하고 있다. 그러면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회라는 말의 뜻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에페소 사람들이 사도 바울로에게 난동을 부린 이야기(사도 19:32,39-40)에 나오듯이 세속 희랍어에서도 사용된 말이다. 가령 투키디데스, 플라톤, 크세노폰이나 그후의 희랍인들이 이 말을 사용할 때, 또는 희랍 시민들이 이떤 제명(題銘)에서 이 말을 읽을 때, 그 뜻은 즉시 분명한 것이었다. 
여기서 시민이란 전령관의 부름을 받고 모인 사람들(ekkletoi)이다. 에클레시아는 그러므로 "불려나온 사람들"이고 이 불려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며 백성들의 집회다. 따라서 에클레시아가 직접 의미하는 것은 ㅡ 아무리 종교적 의미를 가미한다 하더라도 ㅡ 정치적 집회이지 신성한 종교 의식의 집회는 아니다. 또 그것은 구체적 집회, 수시의 "회합"을 의미한다. 회합이 없는 휴회기간에는 에클레시아도 없다. 이런 의미의 에클레시아와,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말의 신약성서상 용법을 직접 세속 희랍어에서 추론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가 개념의 척도가 되는 것은 희랍어의 어원을 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할 때 어떤 말을 사용했는가에 있다. 70인역에는 이 말이 약 백 번 나온다. 그리고 그것도 거의 모두가 원래 세속적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카할(kahal=소집된 모임)에 해당한다(법적,종교 의식적 공동체로서의 백성들의 모임을 뜻하는 eda는 대개 synagoge로 번역되어 있다). 
"에클레시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은 "주님의"(혹은 "야훼의")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이다. 여기서도 집합과정이 등한시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모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무슨 목적으로 모이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즉 하나님이 모으시고, 따라서 에클레시아가 하나님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에클레시아라는 말이 수식어 없이 이런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이것은 임의의 사람들이 임의로 모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는 수시로 일어나는 임의의 집회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미리 선택한 사람들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다. 이리하여 이 말은 이미 70인역에서도 종교적,예배적 개념으로 되고 있었거니와, 그후 점점 더 ㅡ 꿈란 문서에 "카할(kahal)이라는 말이 확실히 드문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ㅡ 종말론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즉 마지막 시대의 참 하나님 공동체로서의 에클레시아가 되어가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이어받음으로써, 의식적으로 참 하나님의 집회, 참 하나님의 공동체, 참 종말의 하나님 백성으로 자처했다. 

죄많은 교회이자 거룩한 교회 
이 교회는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이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교회다. 죄많은 동시에 거룩하고, 거룩한 동시에 죄많은 공동체다. 이것은 교회론적으로 본 "의인이자 죄인"이다. 즉, 죄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죄 은총에 의하여 "의로운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교회를 한결같이 아래로 부터만, 죄많은 인간 편에서만 보면 교회를 감싸 주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교회는 인간적인, 그렇다, 너무나 인간적인 종교 단체에 불과하다. 
한편 교회를 한결같이 위로부터만, 하나님의 거룩함에 의해서만 보면, 교회 내에도 인간적인 위험과 유혹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교회는 인간 세계와는 먼 이상적 천상 존재가 된다. 그러나 바야흐로 교회는 하나님의 영과 악의 세력의 싸움터요, 그 전선(戰線)은 단순히 거룩한 교회와 속된 세상 사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죄 은총이 미치는 죄인들의 가슴 속을 가로지르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보면 거룩하고 아래에서 보면 죄많은 두 개의 교회란 없다. 거룩하고 죄많은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이다. 구약성서의 비유를 빌려 교부 시대 이래로 자주 일컬어지고 있듯이 교회는 하나의 "순결한 창녀"이다. 거룩함과 죄많음은 교회의 양면이다. 그러나 결코 동등한 양면은 아니다! 교회의 거룩함이 빛이라면 죄많음은 그늘이다. 죄악은 교회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본질로서 고려되어야 할 음울한 파라독스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은 너무 정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교회는 움직이고 있다! 죄많음과 거룩함은 단순히 교회의 양면만이 아니다. 그렇다. 이들은 역사 안의 교회의 과거요 미래다. 교회와 과거와 미래는 둘 다 그 나름으로, 과거는 과거대로, 미래는 미래대로, 교회 안에 현존한다. 바로 이 때문에 교회는 참으로 현실적으로 의화되고 성화된 교회다. 교회는 하나님 은총에 의하여 죄많은 과거에서 벗어나 있다. 
죄와 죽음은 이미 옛 일이고, 반드시 또다시 거기에 빠지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과거는 이미 현재의 교회가 내다보는 미래에는 아무 효력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교회 자신의 과거로 남아 있다. 
구원을 받았으나 여전히 유혹을 받고 있는 교회다. 교회에 주어진 거룩함은 교회를 자동적으로 죄없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세례나 성찬 같은 외적 수단으로 보장될 수 있는 정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거듭 새로이 과거를 벗어나 미래를, 즉 거룩함을 지향해야 한다. 이 미래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이미 보증되어 있다. 
교회는 온전히 이 미래로 조건지어져 있다. 그러나 교회는 거듭 새로이 이 미래를 모색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는 거룩한 존재이기에 또한 거룩해야 한다. 존재가 당위를 요구한다. 겸손하면서도 명랑하게 교회는 순례자로서의 과거를 - 과거 그대로! - 현재로부터 미래로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새로운 은총에 의하여 과거가 깨끗이 사라지고 미래가 영원히 이의 없는 현재가 될 때까지. 
이와 같이 교회는 교회의 길이 있다. 세상에서 선발된 교회요, 세상의 다른 공동체와는 구별되는 공동체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선발되었다고 해서 격리되어서는 안 되고, 구별되었다고 해서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비단 이 공동체가 애당초 다른 공동체들의 영향권 내에 있고 양쪽의 구성원이 같은 사람들이므로 격리, 고립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단순히 세상에서 선발되어 나와 있다기보다는 하나님께 속하는 성도들로서 다시 세상에 파견되어 있다. 교회는 따라서 모든 "속세"와 분리된 성역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이미 본 바와 같이 예수가 말한 돌입한 하나님 통치의 의도에 반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일상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온 세상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또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교적 자유의 의도에 반한다. 자유로운 그리스도 신자에게는 그 자체로 불결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 모든 것이 허용된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어 있는 것은 세상 안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달리 살고 행동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디든 일상 생활 중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말씀을 받아들여 믿고 순종하면서 자기가 받은 사랑을 다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는 곳이면, 거기에는 거룩한 교회가 있다. 그리고 물론 동시에 이 거룩한 교회야말로 거듭 사죄를 받을 필요가 있다. 
-한스 큉의 저서 "교회란 무엇인가" 중에서- 

* 신학자 한스 큉은 카알 라너와 함께 20세기 최고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1928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그레고리안 대학과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32세에 독일 튀빙겐 대학 신학교수로 취임한 이래 은퇴한 지금까지 튀빙겐에서 살고 있다. 62년부터 3년에 걸쳐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자문교수로 활동하였다. 
현재 지구윤리재단 총재직을 맡고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날의 교회개혁 지구적 책임성 등의 저서가 있다. 올해 일본 니와노 평화상을 받았다. 
한스 큉(Hans Kung)의 저서 
1. 교회 ``````````````````````````````````````````` 한들출판사 
2. 위대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들 ````````````` 크리스천 헤럴드 
3. (신학 텍스트 총서)그리스도교 ·············· 분도출판사 
4. 왜 그리스도인인가 ````````````````````````` 분도출판사 
5. 교회란 무엇인가 ``````````````````````````````분도출판사 
6. 신은 존재 하는가? ````````````````````````` 분도출판사 
7.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8. 믿나이다 ````````````````````````````````````` 분도출판사 
9. 현대신학은 어디로 가고 잇는가? ``````` 한국신학연구소 
10. 중국종교와 그리스도교 ```````````````````` 분도출판사 
11. 세속 안에서의 자유 ```````````````````````` 분도출판사 
12.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 ``````````````````` 분도출판사 
교수자격 박탈당한 한스 큉, 여전히 교황청의 주류신학에 저항 
-의무적 독신, 여성사제, 성찬례 문제들, 로마의 집요한 방해에도 여전히 논란거리
한스 큉으로부터 가르치는 교회법적 권리를 박탈한지 30년(1979.12.18.)이 되었다. 그의 끈기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와 영감과 자극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2009년 12월 18일은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제안하였다는 이유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스 큉 박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회법적 권리(missio canonica)를 박탈한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후, 또한 1968년 7월 25일 이래 그 백과사전과도 같은 교황회칙<인간 생명 Humanae Vitae>에 자극을 받아, 한스 큉은 1970년에 출판된<교황 무류성? 하나의 연구>란 책에서 교황직은 참으로 '오류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이와 함께 큉은, 우리의 시대의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바,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그 이후로도 그 문제는 계속 남아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신학자 한스 큉은,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적인 조언자로 지명되기도 하였지만, 그가 나중에 교회에 의해 배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교파 교회운동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화(義化)>는 스위스의 개혁신학자 칼 바르트에 관한 것으로 1957년에 완성되었는데, 그것은 1968년까지 독일 튜빙겐 대학에서 큉의 동료 교수로 있었던 죠셉 라칭거의 칭찬을 받았다. 큉은 1999년에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 사이에 이루어진 의화교리의 선언에 관한 합의에 주요한 기여를 하였다. 1999년에 시작된 그의<세계 윤리 계획 Project world ethos>은 종교간 대화를 위한 중요한 자극제로 작용했지만, 오늘날에는 우리의 세계적 문제들에 당면하여 이전보다 더 절실하다. 2009년 10월 6일 그는 UN 건물 앞에서 ‘세계적 사업 윤리에 대한 선언’을 공표했다. 

교회법적 권리인 '가르치는 권리'
(한스큉은 가톨릭신학 교수자격을 박탈당해, 그에게서 들은 강의는 가톨릭신학생들에게 학점이수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스 큉은 현재 교양과정을 주로 맡아왔다-편집자)
를 박탈당한 후에도, 큉은 신학적인 기초가 튼튼한 그의 주장을 1870년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무류성의 교리로 후퇴시키지는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로마의 횡포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저항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1979년 큉은 초교파(에큐메니칼)신학회의 회장으로 지명되었는데, 이 자리는 가톨릭의 권한 밖에서 그를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그는 1997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1968년에 큉은 다른 신학자들과 더불어<신학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선언의 초안을 썼다. 이 선언에 전 세계에 걸쳐 1360명의 신학자들이 서명했고, 여기에는 후에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되는 죠셉 라칭거의 서명도 있었다. 1989년에 큉은<콜로뉴 선언>을 공동으로 서명하였다. 이것은 열린 가톨릭을 지지하고 교황 권위의 확장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한스 큉은 또한 1995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된 ‘Kirchen Voilks Begehren’(‘우리가 교회’ 캠페인)의 정신적 지지자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교회’ 국제운동을 낳았다. 그의 회고록<논쟁적 진리>의 2권은 ‘우리가 교회’ 운동에 대한 관심을 위하여 체계적이고도 역사적인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관심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는 이미 1960년대와 70년대부터 이것을 위하여 싸웠던 것이다. 큉은<교회>1967,<그리스도신자 되기>1974,<신은 존재하는가?>1978) 등 근본적인 저술을 통해, 특정한 교회개혁의 주제들을 성서적이고 영성적으로 정당화시키면서 일찍부터 이런 논의들을 공개된 영역으로 끌어내었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큉이 제기한 교황권에 대한 의문들이 충분히 답변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교회의 지도력과 평신도들 사이에 증가하는 갈등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의무적 독신, 여성사제, 성찬례 문제들은 로마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2005년 9월 한스 큉은 그의 전 대학 동료 라칭거 교수였던 교황 베네딕트 16세와 전격 회동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개혁에 관한 모든 주제들은 미리 배제되었다. 그리고 한스 큉은 통상 그랬던 것처럼 그 회동 후에도 그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개혁 주제들에 계속 몰입해 왔다. 한스 큉의 자서전 2권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공의회가 아니라 공의회에 대한 배신이 교회를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다." 
가톨릭 개혁 운동인 ‘우리가 교회’는 2008년 3월 19일 그의 80회 생일에 다음과 같이 감사를 표시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려는 그의 끈질긴 노력, 초교파주의의 주제들과 세계종교들 간의 대화에 대한 헌신은 우리에게 용기와 영감, 자극을 부여한다.
번역/남충희
[출처/ We are Church, Christian Wels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