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나를 아는 일의 중요성
노승수 목사
오늘은 조금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조선시대 최대의 철학논쟁 중의 하나가 고봉 기대승이 촉발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그것입니다. 흔히 성정론(性情論)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원래 고봉은 퇴계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1559-1566년까지 8년간 퇴계와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물론 서신 교환은 이보다 훨씬 길었고 더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성정론과 관련하여 논쟁을 벌인 기간만 장장 8년이었습니다. 이것은 조선성리학의 사상사에 대단한 족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초적인 상식의 차원에서 설명을 드리자면, 사단이라 함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일컫는 것이요. 칠정이라 함은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을 일컫는 말입니다. 퇴계는 사단(四端)은 성(性)으로부터 칠정(七情)은 정(情)으로부터 나온다 설명하였고, 고봉은 이 둘이 다른 근간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맹자와 중용에 나오는 '이(理)'와 '기(氣)'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이기론(理氣論)>은 우주의 근본에 관한 것이라면 고봉과 퇴계의 논쟁은 우주론이 아니라 심성론(心性論)입니다. 즉, 사람의 마음의 근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사서에 기준하여서 살핀 것이지요. '이(理)'에 해당하는 마음을 '성(性)'이라 하고 '기(氣)'에 해당하는 마음을 '정(情)'이라 한 것입니다. 중용의 서문에 나와있는 것처럼 하늘의 마음 곧 '성(性)'은 미미하여서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늘의 마음의 네 가지 끝자락을 '사단(四端)'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사람의 마음은 위태로운 마음으로 늘 넘치고 불안정한 마음으로 이를 '칠정(七情)'이라고 한 것입니다. 중용은 이 둘 사이의를 잘 붙드는 도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마음은 미미하니 잘못하면 그것은 관념에 불과하게 되고 사람의 마음은 위태로우니 늘 문제가 생기기 쉽상인 것이지요. 하늘의 마음 곧 '성'의 마음은 아직 발현되지 아니한 마음이니 그 미미하여서 깨닫기가 어려운 까닭에 그 끝자락인 '사단(四端)' 곧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잘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사람의 마음 곧 '정'은 이미 발현된 마음이라 위태로우니 이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퇴계는 이 둘을 서로 다른 근원으로 보았고, 고봉과 율곡은 이것을 하나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심성론이기도 하고 수양론이기도 합니다. 아직 발현하지 않은 성의 마음에서 이미 발현해버린 정의 마음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붙드는 것을 '기(幾)'라 하고 여기에 중용의 도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의 마음을 '인의예지'로 간단히 설명하기도 하지만 맹자는 이를 인(仁)의 마음을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의 마음을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의 마음을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의 마음을 '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 했습니다. 인(仁)은 제가 여러 차례 설명을 드린대로 자신의 마음을 올곧게 하는 충(忠)과 타인과 마음을 같이 하는 서(恕)의 마음으로 맹자가 말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의의 마음이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예의 마음이란 타인을 배려하여 사양하는 마음을 일컬으며 지의 마음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이것이 하늘이 우리 마음에 부어준 품성인데, 그것이 미미하여서 그 끝자락과 그 실마리를 붙들어서 정(情)의 일어남을 살피는 것이 바로 중용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이미 발현하여 버리게 되면 위태로운 마음 곧 정(情)이 되는데, 그래서<과유불급(過猶不及)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이라는 말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점으로 살펴보면, 성의 마음은 하늘의 마음이니 당연 성경이 말하는 영적 사고방식입니다. 이에 비해 정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이니 위태로운 육신의 마음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이 선하다는 전제를 가졌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사상과 다른 점이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위태로운 마음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다스리고 수양한다는 점에서 따르고 배울만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의 선조인 조선의 선비들은 공맹의 경전을 읽으면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실천하였습니다. 세상과 사람을 다스림의 근본의 원리는 바로 자기 자신을 닦는 데 있다는 것이지요. 공맹의 근본정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정치철학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정과 개인을 아우르며 자신을 다스리는 도리이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씨조선의 역사가 500년의 세월을 이어 올 수 있는 힘이기도 했습니다.
이 즈음에 이렇게 공맹의 경전을 이리저리 서투르게나마 이야기 하는데는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치세의 도리로 경전을 가지고 닦을 뿐 아니라 자신과 가정을 다스리는 도리로서 이 경전을 대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기독교는 어떨까요? 칼빈 역시 신학이라는 것이 그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만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의 신학서론인 기독교 강요의 첫머리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이 결코 따로 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노라 한다면 필연 그는 자신을 아는 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이 결코 따로 놀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학의 첫 단추라면 당연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교의에는 바로 자신에 대한 고백이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시는대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첫머리 곧 서론을 제외한 3-11문은 바로 인간의 비참함을 아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공맹을 논했던 주자학이 조선후기에 이르러 인간의 심성을 논하는 '성리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선비들도 우주론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심성에 관한 철학적 이해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참되신 우주의 창조주이신하나님을 알고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를 안다면 응당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하겠지요. 신앙은 결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그치면 안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안다면 반드시 자신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가장 큰 악덕은 바로 자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속은 시커멓게 썩어 가는데 자신의 것은 하얀 회칠을 해둔 것이지요. 기독교 신앙의 본질, 곧 성경을 상고함의 본질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기독교에는 필연 심리학이 필요합니다. 세간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세속의 심리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비판해대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세속 심리학에 기독교가 물드는 까닭은 심리학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우리의 마음을 깨닫게 하기에 형편없는 반쪽자리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심리학의 부흥은 찬미할 아이들이 없음으로 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깨달아야 할 것은 그것이 잘못되었다 비판만하고 그것을 틀어막기만 해서 될 것이 아니라 정말 바른 기독교 심리학, 기독교 심성학, 기독교 성정론이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안경이기도 하지만 우리 영혼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 드러내지 않고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어떻게 우리가 복음 안에서 바르게 설 수 있다는 말입니까? 현대 교회, 특별히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생긴 꼴을 볼 수 없는 맹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을 보지 않고는 부흥도 없습니다. 회개없는 부흥이 없듯이 말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내 죄악의 참상을 보고 그 비참함에 통곡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섣부른 위로와 위안이 어쩌면 한국교회를 망쳤는지 모릅니다. 아직 충분히 병이 낫기도 전에 약을 끊어버린 폐병 환자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영적 질병이 독서벗처럼 우리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마음의 참상을 진정하게 바라보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물론 성경의 진리 안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없이 기독교 복음은 그저<부유의 복음><솜사탕 복음><풍요의 복음>일 뿐<십자가의 복음>은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나를 깨닫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와 내 마음의 실상을 아는 일, 여기에서 균형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그 교차로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우리 영적 실상을 마음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깨닫는 일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기회가 닿는대로 성경의 사상 안에서 우리 마음의 길들에 대해서 여러 편의 연재를 해보려 합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마음에 대한 분별의 마음이 생기길 소망하면서....
이 즈음에 이렇게 공맹의 경전을 이리저리 서투르게나마 이야기 하는데는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치세의 도리로 경전을 가지고 닦을 뿐 아니라 자신과 가정을 다스리는 도리로서 이 경전을 대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기독교는 어떨까요? 칼빈 역시 신학이라는 것이 그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만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의 신학서론인 기독교 강요의 첫머리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이 결코 따로 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노라 한다면 필연 그는 자신을 아는 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이 결코 따로 놀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학의 첫 단추라면 당연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교의에는 바로 자신에 대한 고백이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시는대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첫머리 곧 서론을 제외한 3-11문은 바로 인간의 비참함을 아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공맹을 논했던 주자학이 조선후기에 이르러 인간의 심성을 논하는 '성리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선비들도 우주론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심성에 관한 철학적 이해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참되신 우주의 창조주이신하나님을 알고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를 안다면 응당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하겠지요. 신앙은 결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그치면 안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안다면 반드시 자신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가장 큰 악덕은 바로 자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속은 시커멓게 썩어 가는데 자신의 것은 하얀 회칠을 해둔 것이지요. 기독교 신앙의 본질, 곧 성경을 상고함의 본질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기독교에는 필연 심리학이 필요합니다. 세간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세속의 심리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비판해대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세속 심리학에 기독교가 물드는 까닭은 심리학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우리의 마음을 깨닫게 하기에 형편없는 반쪽자리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심리학의 부흥은 찬미할 아이들이 없음으로 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깨달아야 할 것은 그것이 잘못되었다 비판만하고 그것을 틀어막기만 해서 될 것이 아니라 정말 바른 기독교 심리학, 기독교 심성학, 기독교 성정론이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안경이기도 하지만 우리 영혼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 드러내지 않고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어떻게 우리가 복음 안에서 바르게 설 수 있다는 말입니까? 현대 교회, 특별히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생긴 꼴을 볼 수 없는 맹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을 보지 않고는 부흥도 없습니다. 회개없는 부흥이 없듯이 말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내 죄악의 참상을 보고 그 비참함에 통곡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섣부른 위로와 위안이 어쩌면 한국교회를 망쳤는지 모릅니다. 아직 충분히 병이 낫기도 전에 약을 끊어버린 폐병 환자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영적 질병이 독서벗처럼 우리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마음의 참상을 진정하게 바라보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물론 성경의 진리 안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없이 기독교 복음은 그저<부유의 복음><솜사탕 복음><풍요의 복음>일 뿐<십자가의 복음>은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나를 깨닫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와 내 마음의 실상을 아는 일, 여기에서 균형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그 교차로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우리 영적 실상을 마음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깨닫는 일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기회가 닿는대로 성경의 사상 안에서 우리 마음의 길들에 대해서 여러 편의 연재를 해보려 합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마음에 대한 분별의 마음이 생기길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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