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Eschatology Precedes Soteriology’)

“…second to none in its importance for the Pauline system of thought, the eschatological appears as predeterminative both [sic.] the substance and form of the soteriological.” 
“It would be far more accurate to say that the eschatological strand is the most systematic in the entire fabric of the Pauline thought-world. For it now appears that the closely interwoven soteric tissue derives its pattern from the eschatological scheme, which bears all the marks of having had precedence in his mind” (Geerhardus Vos, The Pauline Eschatology, 60).
노승수 목사
eschatology precedes soteriology라는 표현은 성경신학의 거장 게르할더스 보스가 했던 말이다. 그 뜻은<종말이 구원을 앞선다>는 뜻으로 이 말은 성경신학적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말이 조직신학으로 분해되는 순간 그 어의를 상실하고 만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은 좁은 의미에 장차 일어날 일로서 종말의 개념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머나먼 우주 저 넘어에 있는 별들을 허블 망원경이 당겨서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보여주듯이, 종말을 염두에 둔 현재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역시 구원의 적용 곧 내 삶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제대로 이해되려면 현재의 맥락으로는 어렵고 미래적 사건으로 종말이 현재를 사는 방식으로 우리 삶의 현존 가운데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흔히 이것을<종말론적 사고>라고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구원 계시에 대한 이해의 담보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실현의 방식은 항상 잠재태에서 현실태로의 이행이라는 성질을 가진다. 즉, 상수리 나무는 항상 도토리라는 잠재태를 통해서 현실태로 구현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경륜 속에는 도토리 보다 상수리 나무가 먼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림을 그리려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림에 대한 구상을 이미 마친 것과 같다. 화가의 창작 세계 속에는 이미 모든 구도가 완성되어 있지만 이 완성된 그림의 구도는 작가의 창작을 통해서 첫 붓터치로부터 작품의 완성이라는 최종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미 화가는 그의 내면 세계 속에 완성된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창조와 구원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다. 창조와 구원이란 섭리적 영역에서는 창조와 구원이 선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의 시현자 곧 하나님의 세계 곧 초월의 세계 속에는 종말이 먼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종말이 구원을 앞선다>는 표현은 성경의 이해와 관점을 단순히 우리의 입장에서<구원 적용론적 관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을 함축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구원 적용론이라 함은<구원의 서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구원의 서정 곧 부르심에서 영화에 이르는 이 과정에 대한 관심은 전적으로 인간의 주관적 필요에 의한 것이다. 이미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신학자들이 이 과정에 대한 치밀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일치된 견해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이<구원의 서정>이 우리 영혼에 필요한 것임은 틀림이 없지만 실제 하나님이 성경에서 의도하신 것과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진행될 수 있음을 보아왔다. 구원의 서정을 엄밀한 방식으로 그 순서를 확정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 주지 않는 것이다.<조직신학>에 편중된 사고의 위험은 바로<계시>보다<이성>이 우위에 두는 것이다. 실제로<조직신학>은 항상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 혹은 말하고 있는 것보다 항상 두서너 발자국 앞서서 나가곤 한다. 종말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박윤선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계시의존사색>을 해야 한다.
그럼 성경 계시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내고 있을까? 성경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진술해내지 않고 구원사라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진술이 되어 있다. 이것을 흔히<구속사적 관점>혹은<언약사적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보낸 편지를 그 사람의 마음에서 읽어야 가장 정확히 읽을 수 있다. 편지를 받는 사람 스스로의 관심사에 대한 지적 혹은 정서적 함몰은 실제 의도를 왜곡하기도 한다. 예컨대, 교회 청년부에서 마니또 게임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 자매가 한 형제의 마니또가 되었다. 자매는 그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에게 편지 말미에 사랑한다는 인사말을 남겼다. 그런데 형제는 평소 이 자매를 몹시도 흠모하고 있었고 그로부터 받은 편지는 마치 하나님의 계시와 같았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인사말에 정서적 지적 함몰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자신을 남자로 사랑한다고 확신에 빠진 것이다. 보낸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구원 계시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곡해 내지 오해 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바라볼 때 늘 이 종말의 최종적 완성을 염두에 두고 현재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종말은 심판적 의미를 포함하지만 거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경륜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것이다. 보스가 종말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이런 함의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종말이 구원에 앞선다>는 표현은 성경 계시를 해석하는 하나의 해석적 툴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해석적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고 해석이 항상 우리의 삶과 순종을 동반하듯이, 우리의 세계관이 된다. 이를<종말론적 사고>혹은<구속사적 사고>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종말은 종말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를 의미하기 보다 하나님의 최종 계획과 구원의 경륜이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신학은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해석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을 마음에 담고 현재의 삶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머나먼 우주의 별을 망원경으로 줌인(Zoom in)하듯이 종말의 완성을 현재 우리 구원의 문제로 당겨와서 우리 삶을 해석하고 그 위에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은 겸손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0) 2018.03.03
마음과 나를 아는 일의 중요성  (0) 2018.03.03
대학의 정신과 신앙  (0) 2018.03.03
복수라는 것....  (0) 2018.03.03
나섬과 물러섬  (0) 2018.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