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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마음을 다스리는 일

마음을 다스리는 일


노승수 목사


어느 날 운전을 하면서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가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젊은 친구가 빵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겪은 일을 사연으로 보냈는데, 어떤 아저씨가 와서 빵을 2만원어치 넘게 사고 계산하고 나오려다가 봉투 값 50원 받는 것에 기분이 나빠하며 그냥 나가는 경우를 당한 것이다. 또 내가 아는 한 자매는 유명 기독교 출판사에 근무하는데, 모두 신앙에 열심이 있는 고객들이 500원이나 1000원에 기분이 상해하며 모든 걸 취소하고 가는 경우를 자주 본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정서적으로 미숙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고객을 대하는 직원의 태도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정상적이거나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불교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는데,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다. 사물이나 사건은 긍정적으로 보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보는 보기에 따라, 혹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여러 사건들은 우리의 마음상태를 보여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TV 뉴스를 보다가, 다른 사람은 흥분하지 않는데, 특정한 사건에 흥분하는 것은 그 TV프로그램이 분노를 가져다준다기보다 그 개인 안에 이미 있던 어떤 분노를 그 프로그램이 건드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시어머니 혹은 남편의 어떤 행동이 나를 화나게 한다."라는 표현을 한다고 가정하자. 행동은 시어머니나 남편이 했는데, 화는 내 마음에 있다. 뒤집어 이야기 하면, 아무리 화가 날 행동을 해도 내 마음에 근본적으로 화가 없다면 화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국에 유명한 경험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은 참으로 인과율을 경험으로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인과관계는 경험되는 게 아니라 그저 마음의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불이 났다'는 [사건1]과 '연기가 난다'는 [사건 2]는 경험되지만 이 둘 사이의 인과는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사건이 시간적으로 근접해서 일어나는 것을 마음이 습관으로 연관 짓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런 깊은 성찰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너무 쉽게 내 마음의 여러 감정들의 원인을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사건으로 돌리며 탓하기 일 수다. 
우리 속담에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처럼 분노의 감정은 원인이 상대에게 있는듯하지만 실상은 자신 안에 분노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안에 이런 분노를 비롯한 핵심감정이 내재되게 되었을까? 유?아동기에 부모나 정서적으로 중요한 사람(key figure)과의 관계에서 형성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려서 부모가 분노나 짜증을 많이 아이에게 내고 부부관계도 늘 다툼이 많았다면, 아이는 고스란히 부모의 분노를 감당할 수밖에 없고 억압하게 된다. 그래서 그 아이는 자라서, 나는 엄마, 아빠처럼 안해야지 하면서, 어느 새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짜증을 내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흠칫 놀라게 된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는데, 마음은 그 만큼 중요하며 우리 삶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변인이 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을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외적조건이 좌우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것에는 열심이지만, 정작 중요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는 소홀한 게 사실이다. 
그럼 어떻게 화나 여타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을까? 보통 우리는 긍정적 감정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부정적 감정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고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회화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감정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자체로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우리 몸에 통점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뜨거운 것을 만지고도 몸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우리 몸은 더 큰 해를 입을 것이다. 이 고통이란 반응이 우리가 더 다치는 것을 방지해주는 일종의 emergency system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부정적 정서반응은 그 자체로 위기를 경보하는 기능을 한다. 
화가 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게 내가 지내온 어린 시절이라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완전한 환경 가운데 완전한 양육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의 심리적 외상과 좌절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화를 억압하고 사태의 부정적인 면을 늘 외면하면서 사는 것 역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긍정적 사고란, 이처럼 자기 안의 감정을 억지로 긍정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감정을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에 달려 있다. 오히려 이것은 착각으로써 '긍정'보다 훨씬 힘이 든다. 자신의 믿음에 위배되는 것을 자신의 시야에서 배제해버리는 방식의 긍정적 사고는 사실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의 좋은 부분도 혹은 맘에 들지 않는 부분도 주님앞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를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하신 그 분 앞에 온전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돌이킴' 곧 회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돌이킨 사람은 그 성품이 변하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분노가 내 안에 있구나!"하는 자기 각성과 깨어있음이 매우 중요하다. 반응은 그 다음 문제다, 분노나 다른 감정을 다스리려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부정하고 부인하면 결코 우리가 그것을 다스릴 수 없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기도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 성경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예배는 상한 심령이라는 표현도 이것의 다른 표현이다. 내 분노가 깨달아질 때마다, 내 슬픔, 불안, 억울, 소외, 외로움, 두려움, 공포 등의 감정이 깨달아질 때마다, 그것을 타인에게 투사하거나 자신 안에 억압하지 않고, 기도로 가지고 가는 것, 이것이 성숙한 인격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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