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과 수치심
노승수 목사
아담이 첫 범죄를 한 후에, 아담과 하와가 보인 첫 반응은 바로 수치심이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7, 10) 물론 본문에 수치라는 단어가 명시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벗은 몸을 보고 가리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치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수치심의 1차적인 특징은 '은폐'에 있다. 은폐의 목적은 타자 눈을 가리우는 것이다. 가리는 것(cover-up)은 노출을 통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막는 방어 기제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동안에 숨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치심은 일종의 자아의 자기 방어이다. 영어의 shame은 원래 '노출을 가리거나 숨긴다'는 뜻에서 파생되었다. 적어도 가리워져 있는 동안에는 수치심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창세기의 이 기사는 아담과 하와가 회개를 했다거나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다는 뉘앙스를 전혀 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수치심은 회개를 불러오는 죄책감과도 구분된다. 죄책감은 양심의 내적 고발에 대한 인간 존재가 보이는 감정적 반응이다. 물론 때론 우리의 양심의 기능이 지나치게 과민하게 되거나 혹은 양심이 전혀 기능하지 않는 싸이코패스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죄책감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양심이라는 내적 준거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비해 수치심은 내적 준거를 가지지 않는다. 물론 그가 보이는 수치라는 반응은 내적인 것이다. 특히 자신의 예민한 부분이 갑자기 무방비 상태로 외부에 노출될 때 그것은 타인에게 노출되는 것이지만 자기에게 노출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H. M. 린더)에서 내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수치는 은폐되어 있는 동안에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인터넷에서 명예훼손을 밥먹듯하는 악플러들은 고소를 당하기 전까지 수치를 경험하지 않는다. 그러다 고소를 당하고 처벌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면 곧바로 급전직하하면서 화의의 제스쳐를 보인다. 연예인들에게 악플을 달던 사람들은 그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윤리 기준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내가 볼 때는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사회의 윤리의식은 '죄책감'에 기반하지 않고 '수치심'에 기반해 있다. 또는 버젓이 범죄를 일삼던 이가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는 동안 카메라가 들이닥치면 얼굴을 가린다. 타인의 눈에 대한 수치의 반응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치가 그가 자신이 한 범죄의 사실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 죄책감이 내적 준거인 양심에 의해서 고발되는 것이라면 수치심의 기본적 준거점은 바로 '타인의 눈'이다. 즉, 타인에게 내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개인의 약점이나 신체적인 장애에 대한 사회적 기대라는 타자의 눈이 자신 안에 내면화되면서 가지게 되는 감정이다. 가장 좋은 사례는 아무래도 일본이다. 일본의 전후 반복되는 전쟁범죄의 부정과 역사 교과서 왜곡에 바로 이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왜곡은 바로 수치의 본질은 '은폐'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패전 후 독일과 일본의 전후 문제를 처리하는 근본적 차이를 낳았다. 독일인들은 내적준거인 양심의 증언을 따라 죄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책감의 본질이다.
이런 관점에서 죄책감과 수치심을 근본적 차이를 비교해보자면, 죄책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이고, 수치심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죄책감은 '잘못을 함'과 동시에 느끼게 되지만, 수치심은 타인에 의해 잘못이 '발각'될 때 느끼게 된다.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이는, 이를 '상기'하려 하지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이는, 이를 '감추려고' 한다. 죄책감은 그 기준이 '자기 안'에 놓여 있지만, 수치심은 그 기준이 '타인의 눈'에 놓여 있다. 너무나 적나라한 지적이지 않는가? 그래서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은 죄책의 문제를 수치의 문제로 다루지 않았다.
아담의 첫 범죄에는 죄책감이 없다. 거기엔 기회주의적 자기 은폐만이 있을 뿐이다. 이 은폐는 이후에 지속되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아담과 하와의 대답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책임전가'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이 자신의 한 일을 부끄러워 한다는 사실이 그가 근본적으로 회개와 그에 따른 죄책감을 주님께 내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날마다 죄책을 경험한다면 그렇게 익숙하고 반복적이며 장기간 지속되는 죄를 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죄가 장기간 지속되고 반복되는 까닭은 그것이 발각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수치심이 발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연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윤리적 준거는 '수치심'에 있다. 그래서 발각이 되지 않을 경우, 그들의 범죄 수법은 점차적을 발달하고 대담해진다.
대체로 심리학자들은 죄의 문제를 수치의 문제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즉, 죄의 문제를 실존이나 사실적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외부 환경에 대한 심리적 현실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폈듯이 수치란 죄의 문제에 대한 자기 기만과 은폐에 불과하다. 조금 봐주더라도 자아의 방어적 기능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죄의 문제를 수치의 문제로 환원하고 수치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 심각한 영적 오류에 직면하게 된다. 즉, 죄의 무게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양심의 기능을 마비시켜서 일종의 심리적 위안을 받게 만든다. 성경이 증거하는대로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딤전 4:2)이 되고 만다.
문제는 이것이 이 시대에 복음이란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분명 우리의 구주이시자 주님이심에도 단순히 죄를 고백하고 믿기만 하면 우리 삶을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지 않는다해도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현대 교회의 회심은 단순한 선택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중세시대에 면죄부를 팔아 세람들의 수치심과 두려움을 기만적으로 이용했다. 현대교회는 복음을 면죄부 팔듯이 팔고 있고 여기에는 죄책을 수치심으로 대체하고자하는 환원주의적 심리학에 근거한 신학이 자리하고 있다. 생각해보자 나의 신앙의 동기는 죄책인가? 아니면 수치인가? 한 사람의 내면의 동기를 밖에 있는 사람이 정확히 평가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심령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준거점만 있다면 적어도 자신은 자신을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가정해 볼 수 있다. 나에게 수치가 주된 동기라면 아직 중생치 못하고 회개치 못한 구도자 수준의 신앙인일 것이다. 반대로 자신의 죄책을 계속 상기하며 그것을 주님께 가져 가는 사람은 인격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각자가 판단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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