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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우주에 관한 수학 이야기

우주에 관한 수학 이야기 

노승수 목사

그냥 좀 따분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신 분은 다 읽지 마시고 마지막 문단만 보셔도 좋습니다. ^^ 저 역시 이 내용을 다 이해했기 때문에 쓰는 것은 아니니까요? 전문적 수학자들이나 알 수 있는 수학적 언명을 제가 다 풀어서 알기란 힘들겠지요.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우는 기하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기원전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클리드가 기하학에 대한 쓴 책에 기원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이지요? 이 사실은 거의 2200년 가량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1800년대 중반에 독일에서 리만이란 학자가 나옵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평면에 가까울수록 180에 근접하게 되고 곡율이 증가할수록 커진다. 좀 말이 어렵지요? 쉽게 풀자면 이런 겁니다. 북극과 적도의 두 점을 이어서 정삼각형을 그린다고 생각해보면 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가 아니라 270도가 됩니다. 왜냐면 지구는 둥글기 때문이지요. 
리만의 이 기하학적 발견은 후에 우리가 잘 아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힌트가 됩니다. 리만은 단지 수학적으로 추측을 했다면 아인슈타인은 정확한 예측을 한 것이지요. 아프리카에서 개기일식이 관측될 때 아인슈타인은 그 별의 위치가 개기일식 때 종전과 다른 위치에서 관측될 것이라는 예측을 했습니다. 예측대로 다른 위치에서 관측되었고 이것은 빛이 중력에 의해 굴절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빛의 굴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주변의 혹은 달 주변 혹은 태양이나 기타 천체들의 주변의 공간이 평면이 아니라 일정한 굴절을 가진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견이지요. 
그래서 천체 물리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이해를 종전과 달리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 허블 망원경은 우주의 끝을 관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대략 빛의 속도로 137억 광년 밖의 우주의 천체 현상이 관측이 되었는데, 우주의 끝이라고 하더군요. 하얀 바탕에 별들이 올록볼록 생성되는, 별이 생성되기 전의 상태가 관측된다고 하더군요. 우주는 어떤 모양일까? 한동안 과학이 지구에 모양에 관한 논의로 뜨거웠지만 지구 밖에서 지구를 관측하게 된 이후로 모든 신비가 벗어졌지요. 지금 물리학자들은 우주 밖에서 본 우주에 대한 관측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이론적으로 가능하게 해 줄 수학적 추측이 있었는데요. 마치 리만의 기하학적 추측을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적으로 이용에 정확한 예측을 해낸 것처럼 말이지요. 그게 앙리 푸앵카레라는 학자가 처음 한 추측이라고 해서 푸앙카레 추측(Poincaré conjecture)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추측은 미국의 클레이 수학연구소에서 2000년에 21세기 수학자들이 연구할 주요 과제로서 소위 '밀레니엄 수학 문제'라고 7 문제를 발표합니다. 물론 아직 수학적으로 증명이 안된 문제이지요.
이 문제들이 더 유명해진 것은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100만 달러의 상금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2년 6월 어느 날 어느 러시아인의 블로그에 이 7문제 중, 푸앙카레의 추측에 대한 증명에 관련된 내용이 올라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거의 믿지를 못했지요. 반신반의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 푸앵카레의 추측을 증명한 것이 인정되어 2006년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의 수상자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이 수상자 선정은 노벨상보다 더 까다롭습니다. 40세 이하에게만 수상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문제를 푼 러시아 수학자 그레고리 페렐만(Grigori Perelman)은 수상과 상금을 거부합니다. 페렐만은 필즈상의 수상을 거부하여 과학과 수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뉴스가 유명일간지인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의 세계 각국의 주요일간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세계의 관심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페렐만이 수상을 거부하자 필즈상 주최측 관계자였던 Ball은 6월 말경에 상트 페터스부르크(St. Petersburg) 근교에 살고 있는 그를 찾아가 마드리드에서 개최되는 ICM에서 기조 초청강연(plenary address)을 하여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상 거부를 번복하기를 권하였지만 한마디로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참 특이한 사람이지요?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 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빛을 발하려면 그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 잘 알아야하기에 어려운 수학적 설명을 언급하고 있는 거랍니다. 
이 푸앵카레 추측이란게 뭐냐 위상수학이라고 불리는데, 공간에 대한 수학적 설명이라고 간단히 이해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예컨대, 지구 주위를 끈으로 한 바퀴 두른 후 당기면 어떻게 될까? 구면이나 줄을 당기면 당연히 구면을 따라 줄이 당겨져서 한 점으로 모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도넛같은 공간이라면 줄을 넣어서 당기면 가운데 동그란 원이 남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주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만약 우주선을 타고 먼 우주로 나가는 데 끈을 달고 나가는 거죠 그리고 그 우주선이 돌아왔을 때, 그 끈을 당겨서 점이되면 우주가 둥글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추정이 바로 앙리 푸앵카레의 추측입니다. 
그런데 이 밀레니엄 수학 과제를 페렐만이라는 젊은 수학자가 수학적 증명을 해낸 것입니다. 어떻게 했냐고요? 하버드 수학자들도 이해하는데 한 해가 꼬박 걸린 증명을 제가 설명할 길은 없지요. 아무튼 우주의 모양에 대해서 아인슈타인이 남긴 업적은 공간이 평평하지 않고 얼마든지 굴절되며 어쩌면 우리는 굴절될 공간안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모양을 대략 8가지 정도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미 아인슈타인이 증명했듯이, 시간과 공간은 절대 물리량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제가 우주의 탄생과 관련하여서 초끈이론에 대한 글도 잠깐 쓴적이 있는데요. 과학자들이 발견한 우주에서 가장 작은 입자는 일종의 끈, String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지요. 모든 물질은 고유한 파장을 가지고 있고, 근데? 여기에 외적 교섭을 통해서 그 파장을 변화시킬수도 있다고 하는군요. 물론 아직까지는 이론적입니다. 파장에 대한 외적교섭으로 예컨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도 물리학으로 설명될 날이 멀지 않아 보입니다. 야구공을 수박으로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잠깐 이야기가 곁길로 샛네요 ^^ 
그런데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 푸앙카레 추측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낸 천제 수학자 그레고리 페렐만의 삶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몸을 닫고 있는 Steklov 수학연구소의 교수직을 사퇴하고 이전에 수학교사였던 모친과 단 둘이서 모친의 연금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뉴스가 최근에 영국의 모 일간지에 게재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는 세속적이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며 특히 물질적인 욕심이 없는 사람이며 장시간 산보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는 100만달러에 달하는 상금을 거부하고 수학자의 최고의 영예인 필즈상도 거부한 채, 그가 교류를 맺었던 모든 학자들과도 관계를 끊은 채 조용히 연구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그의 정신세계입니다. 하버드의 수학자 한 분은 아마도 그가 이와 같은 수학적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집중된 고독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진리를 추구하고 찾고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영적 세계의 진리는 아니더라도 물리적 세계 혹은 수학이라는 보다 상상에 가까운 세계라하더라도 그 진리를 증명해내는 학자가 보이는 단순하고 명예를 좇지 않는 삶의 모습 말입니다. 
수학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고독과 집중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케기 위해서는 얼마나 필요할까요? 그와 같은 고독과 집중이 말입니다. 현대 한국 교회의 목사는 너무 분주한 것 같습니다. 세속적 진리를 케는 사람도 이와 같거든 하물며 영혼을 구원하는 진리를 케는 목사가 너무 세속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너무 멀리 와 있다 이런 생각 말입니다. 우리가 참된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따르고 있다면 우리에게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이기적이며 욕심이 많으며 자기 중심적입니다. 이런 열매에는 사실 진리를 소유했다고 볼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뿐입니다. 수학적 진리가 그의 삶을 고독하게 하고 단순하게 했다면 참된 영적 진리를 우리 삶을 얼마나 단순하게 할까요? 그리고 나는 그 진리로부터 얼마큼의 거리를 두고 좇아가고 있을까요? 아니면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런 생각들을 조금 해 봤습니다. 저도 사실 기회만 된다면 지방의 소도시에 자그마한 교회에서 성경을 연구하며 작은 정원을 가꾸며 때론 호젓한 산책로가 있는 조용한 마을에서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친근히 지내길 소원해 봅니다. 이 천재 수학자의 삶과 그 선택의 동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부럽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좀 어수선하네요...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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